〈 16화 〉두근두근 문예부
일단 더러워진 몸을 씻기는 것이 우선 과제이겠지. 여전히 오들오들 떨리는 몸을 안아든 채 욕실까지 가 샤워기의 물을 튼다. 차갑다가도 이내 따뜻해지는 물의 온도. 손을 내밀어 직접 온도를 확인하자 적당한 정도의 따뜻함이 손바닥을 덮는다.
축 늘어져 있는 선아를 욕실용의 작은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힌 다음 젖은 옷을 벗기고자 와이셔츠의 단추를 붙잡는다.
하지만 그 순간 발생한 문제. 그것도 아주 중대한.
"…왜 그래?"
“아, 아무 것도.”
'이, 이걸 어떻게 벗긴담.'
식은땀이 볼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그리고 등줄기를 타고 쏘아지는 오한. 두 손을 여전히 단추에 못 박은 채 슬쩍 선아의 눈치를 엿본다. 이제서야 눈치 챈 건데, 흠뻑 젖은 하얀 와이셔츠 너머로 훤히 들여다보이는안.
그 동안 선아는 좀 작은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가까이서 보니 그 말이 전혀 사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지금 무슨 얘기 하냐고? 그, 그, 가, 가, 가아…아무튼 그거.
딱 보기 좋을 정도의 크기와 아름다운 형태, 레이스가 달린 큐트한 디자인의 핑크색 브래지어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히 늘어나있다. 그 선정적인 자태에 무심코 꿀꺽하고 군침을 삼킨다.
…나란 녀석은 지금 사람이 아프다는데대체 뭘 품평하고 자빠져 있는 거야. 점점 더 음흉해지려는 시선을 옆으로 돌린다. 의뭉스러운 선아의 시선이 내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차마 고개를 원위치로 돌려놓을 수가 없었다.
여자가 된 지도 16년째지만, 아직도 나나 언니 외의 여자의 알몸에는 익숙하지가 못하다. 이전처럼 성욕 같은 것은 그다지 샘솟지 않지만, 대신 죄악감이나 배덕감이 든다고 할까. 왠지 몰래 엿보는 것 같아서 부끄러워.
저, 정말 성적으로 흥분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지난 세월 동안 남자로서의 의식도 많이 사라졌으니까. 그런 저열한 것과는 어디까지나 다르…아니, 그렇다고 해서 성적 흥분이 또 나쁘다는 건 아닌데, 그, 좀 그렇다고나 할까….
아무튼! 지금만큼은 내가 남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만약 내가 남자였더라면…지금쯤 내 아랫도리가 어떻게 돼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설마 부끄러운 거야?"
"윽!"
아, 매서운 일침, 정곡을 찔렸다.
"…정 그러면 나가 있어도 돼. 혼자서 벗고 씻을 정도의 힘은 돌아왔으니까."
"고마워…"
그렇게 감사를 표한 후 욕실을 나가 문 앞에 기대어 선다. 스르륵스르륵, 선아가 옷을 벗고, 쏴아아-하는 물소리가 대충 10분쯤 지속되더니 뚝 끊겼다.
곧 내가 빌려준 티셔츠와 츄리닝을 걸친 선아가 욕실 밖으로 나왔다. 아직 덜 마른 적갈색 머리칼을 수건으로 문지르는 선아. 축축하게 젖은 그녀로부터 무언가 향긋한 내음이 발산되는 것도 같은데, 그래봤자 내가 쓰는 것과 같은 샴푸 냄새.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선아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애쓴다.
"드라이기 빌려…이건 뭐야."
“별 거 아니야.”
방까지 같이 가기위해 선아의 손을 잡는 순간 이질적인 감촉이 손바닥 아래를 덮친다. 의구심에 선아의 팔을 반대로 틀자 손목을가로지르는 무수한 자상들이 드러났다. 길쭉하고 우그러짐 하나 없는 흉터들은 깔끔하긴 했으나 그 깊이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걱정스레 선아의 기색을 살핀다.그러나 선아는 오히려 웃는 얼굴로 내 쪽을 안심시켰다.
"옛날에 다친 거야. 이젠 안 아프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어쩌다가 다친 거야?"
“정말로 별 거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괜찮아.”
“…응”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캐묻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굳이 과거의 상처를 들쑤시는 것도 실례인 행동이겠지.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꾹 다문다.
"…미안, 괜한 이야기를 하고 말았네."
"으응, 괜찮아. 오히려 시아가 걱정해줘서 기쁜 걸."
선아는 자신의 흉터를 쓸어내리면서 어딘가 과거를 돌아보는 듯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혹 내가 그녀의 아픈 기억을 건드린 건가 싶어, 작은 목소리로 사죄의 말을 꺼내니 오히려 내 등을 다독이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선아.
…역시 이 아이는 상냥하다. 어제 교실에서는, 그래, 내가 다른 사람과 사귀느라 자기와멀어질까 지나치게 걱정한 것이겠지. 선아가 내 첫 친구인 동시에,선아의 첫 친구가 바로 나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내가 선아를 내치는일은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그녀를 불안에 떨게 만든 셈이다.
어찌 보면 모든 게 내 탓일 지도 모른다. 최형곤이 갑작스레 떠난 것도, 선아가 밤늦게까지 비를 맞은 것도. 나는 줄곧 자신이 성숙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인간관계에서 만큼은 그 생각이 틀렸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
"…머리, 말려줄게."
"응."
땅바닥으로 파고드는 우울함을 숨기고, 혹여 상처에 닿을까 조심하면서 선아의 손을 꽉 부여잡는다. 그러자 선아 또한 나의 손을 마주잡았다. 텅 빈 가슴 안을 채우는 유대감. 이번 생을 통틀어 처음 느껴보는 그 감정에 옅은 웃음을 흘린다.
나는 아직 어리고, 배울게 많다. 그러니 잘못된 것들은 앞으로 고쳐나가도록 하자. 사람을 사귀는 법도, 사람을 헤아리는 법도, 차차 배워나가도록 하자. 그렇다면 언젠가 나로서도, 그저 말 뿐인 어른이 아니라 진짜 어른이될 수 있겠지.
일단 지금은, 당장에 해야 할 일부터.
내 방의 문을 열고 간소한 화장대(그다지 쓰이진 않는다) 앞에 선아를 앉힌다.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선아의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문지르면서 드라이기의 전원을 킨다. 둥근 배출구로부터 뜨거운 바람이 위이잉 뿜어져 나오고, 그것을 선아의 머릿결에다 가져댄다. 다른 손으로는 이쪽저쪽으로 휘날리는 머리카락들의 정리를. 촉촉한 수분기가 급속히 사라져간다.
“있지, 우리들은 친구 맞지?”
그렇게 한창 머리를 말리고 있는 도중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지는 선아. 여전히 드라이기를 한 손에 든 채로 태연하게 답한다.
“당연하지.”
“앞으로도 영원히?”
“응, 앞으로도 영원히.”
“그럼 사랑한다고 말해줄래?”
“사랑해…잠깐, 무슨 말을 시키는 거야!”
유도심문이라도 당하듯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대사에 황급히 입을 다문다. 그러나 이미 뒤늦은 때라, 키득키득 장난스런 미소를 짓는 선아.
“역시 시아는 바보구나.”
“뭐 임마?”
대놓고 비꼬는 말투에 머리를 말리다 말고 손에 든 드라이어를 내팽개친다. 대신 입을 크게 쩍 벌린다.
"…와앗! 잠깐, 뭐하는 거야!"
"혹슈야!!"
"아아앗!! 잠깐, 그만 물어! 아파! 이거 진짜로 아프니까!!"
당연히 아프겠지. 아프라고 하는 거니까. 안 아프면 그게 석두지 사람이냐?
그렇게 눈앞의 소봉한 정수리를 앙 베어 문 채, 선아가 제발 놔달라고 사정을 할 때까지 내 단죄는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