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두근두근 문예부
머리를 말린 이후로 제법 많은 시간을 둘이서 보냈다. 콘솔 기기로 같이 게임을 즐기거나, 시덥잖은 수다로 열을 올리거나, 정말 오랜만에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즐길 수 있던 시간. 마치 수학여행이라도 온 기분. 여섯 시가 되기 전까진 시간이 가는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다행이도 선아는 처음 봤던 것만큼 아파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씻은 이후론 나보다 더 쌩쌩한 일면을 보여줘서 걱정하던 나를놀라게 했다. 어쩌면 이 아이, 나보다 튼튼할 지도.
"벌써 여섯 시네…"
"왜? 늦었어?"
"응, 미안하지만 이만 가봐야 될 것 같아."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제안하려던 참에 선아가 먼저 우울해진 얼굴로 운을 뗐다. 아무래도 집안이 엄한가 보다. 정말 가기 싫다는 얼굴을 하고선 가야된다는 말을 하는 선아.
아쉬운 건 나도 매한가지지만, 그 실망한 모습이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 같아 무심코 실소를 띄운다. 팔을 뻗어 소파 옆자리에 앉은 선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내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머릿결이 손을 간지럽힌다. 그제서야 풀리는 울상.
"데려다줄게. 집은 가까워?"
"응. 여기서 15분 정도 거리야."
그렇다면 얼마 되지 않네. 소파에서 일어나 의자에 걸쳐두었던 패딩 하나를 주워들고, 그녀에게도 다른 외투 하나를 건넨다. 짧은 거리라도 밖은 아직 춥다. 처음에는 어차피 바로 앞이라며 내가 준 옷을 거부하던 선아도 계속 권유하자 이내 고집을 꺾었다.
그 후 집 안의 모든 불을 끄고, 밖으로 나온다.
"오…"
문득 고개를 쳐들자 시야에 들어오는 경치, 일상의 장면이지만 옆에 있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일까. 새삼 다시 보게되는 그 풍경.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태양에 온 세상이 주홍빛으로 물든 착각을 하며 감상에 젖는다.
그때 내 팔에 엉겨오는 선아의 팔. 팔에서부터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따뜻함에 일순간 몸이 흠칫한다. 시선을 눈앞의 경치로부터 천천히 옆으로 돌린다. 장난이 성공한 아이 같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선아.
과연, 노을 말고 자기에게나 신경 쓰란 걸까. 눈이 마주치자 팔을 억죄인 힘이 더욱 강해졌다.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지. 단단히 묶인 팔짱을 푸는 것을 포기하고 슬렁슬렁 걷기 시작한다. 그동안 선아는 마냥 여리여리한 줄로만 알았는데, 제법 힘이 세다.
그러고 보니 가끔 아버지가 경찰 쪽 관계자라고 했던가. 오늘 대화중에 언뜻 들은 사실이었다.
"시아~, 시아아~, 시아아아~"
"…부끄러우니까 그만해."
괴상한 노랫말과 함께 선아의 안내를 받으며 근처의 공원까지 함께 간다. 바로 이 앞의 아파트가 자기 집이라고 하는 선아. 공원 입구에 들어서고 어느 정도가 더 지나자, 기분 좋지만 묘하게 부끄러운 팔짱을 드디어 풀어 내린다.
"바로 여기야. 바래다줘서 고마워."
뻗어진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꺾어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높이 세워진 건물을 올려다본다. 웬만한 고층 건물을 방불케 하는 높이와 사이즈가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다.
선아에 대해서 새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뭐, 부자 학교의 학생인 만큼 오히려 부자인 게 당연하겠지만, 그동안 선아가 너무 스스럼없이 접근해 와서 잠시 잊었나보다.
"…선아님?"
"존대해도 떨어지는 콩고물은 없어."
"쳇"
이 기회에 재벌가의 하녀나 돼볼까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매몰찬 거절에 혀를 찬다.
"그럼 내일 또 봐."
"잘 가."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선아에게 나 역시 마주 손을 흔들어준다. 잠시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선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적갈색 단발, 평균보다 다소 짧은 주름치마, 내가 건넨 외투. 익숙한 형체는 점차 멀어지더니 이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진다. 그제서야 나도 등을 돌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집에 돌아가면 바로 이불 덮고 잠이나 자야지. 선아와 노는 것은 즐거웠지만 그만큼 많이 지쳤다. 여자라서 그런가, 수다를 뭘 그리 길게 하는지. 그래도 즐거운 듯 떠들어대는 선아의 모습은 퍽 보기 좋던 것이라 무심코 웃음을 흘린다.
다음에 시간이 되면 또 다시 선아를 집으로 부르자. 하지만 다음엔 그저 노는 것만이 아니고, 언니를 소개시켜주고 싶다. 둘 다 웬만큼 착한 사람들이니까 만나면 친한 선후배 사이쯤은 될 수 있겠지.
"…"
그 순간 흠칫하고 걸음을 멈춘다. 대체 저 사람이왜 여기서, 그것도 한가로이 벤치에 앉아 독서중인 거지. 예상치 못한 일에 맞닥트린 사고가 얼어붙는다.
그렇게 잠시 얼을 타다가, 멈춰있던 걸음을 재빨리 재개한다. 어차피 친한 사이도 아니니, 그냥 못 본 척을 하면 저 사람 역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리라.
여자들이 보듬어주고 싶어 하는 꽃미남, 게다가 집안 빵빵한 재벌 2세. 아니, 그런 게임 속의 사실을 배제하더라도 저런 눈에띠는 존재와 얽히고 싶지 않다. 그래, 정말로, 격렬하게 말이다.
고개를 숙인 채로 발소리를 죽이며 걷고 있으니, 돌연 아득하게 들려오는남자의 목소리.
"왜 날 보고선 모른 체 하는 거지, 이시아 양?"
어머나, 들켜버렸네.
=
"흥, 흐흥흥♪"
여러모로 기분이 상쾌해지는 하루였다. 어느 정도냐고 묻는다면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올 정도. 들뜬 기분은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자연스레 경쾌해지는 발걸음.
오해 아닌 오해도 풀고, 오로지 둘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무엇보다 하루 내내 어느 곳에서나 그녀와 함께 있었다. 다시금 이런 행복한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수 시간 비를 쫄딱 맞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 좋은 하루.
아무도 없는 공원을 혼자서 산뜻하게 거닌다. 이미 말한 거지만 오늘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다. 그래, 저 멀리서부터 서서히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작은 인형에도 불구하고, 이 상쾌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너, 진짜 끈질기구나."
감정 자체를 잃고 살의만이 남은 듯 서늘한 목소리가 불쾌하다. 그녀도 아닌 주제에 어정쩡하게 그녀를 닮은 생김새도 불쾌하다. 마치 불쾌함의 극치적인 존재. 하지만 지금 이렇게 기분 좋은 상태에서 마주하면 유쾌한 부분이 마냥 없는 것도 아니다.
저도 모르게 짓고 마는 잔망스런 눈웃음. 자신에게 향해지는 질투의 감정이란, 생각보다 유쾌한 것이었다.
"너는 정말로 짜증나는 녀석이야."
"동감."
처음이자 어쩌면 최후로 서로의 의견이 일치했구나. 평소의 냉정을 잃고 바득바득 다그치는 모습이 안절부절 못하는 강아지 같다. 그것이 꼴사납다고 생각하며 환희에 찬 표정을 짓는다. 항상 위에서 자신을 깔보던 상대가 알아서 자멸해나가는 그 광경은, 몹시도 유쾌해서 실로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그 아이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해도, 너는 듣지 않겠지. 어차피 너는 잃을게 없는 녀석이니까."
"…"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게 가능할 거라곤 생각하지 마. 곧, 곧이야. 내가 모든 수를 써서 너를 나가떨어지게 만들테니까. 그러니 그때까지라도 맘껏 즐기도록 해."
알게 뭐람. 촉을 세운 살기가 자신을 노리고 짓쳐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먼저 자리를 뜬다.
서로가 맞부디치게 될 그 순간은, 첫 만남부터 예견되어 있던 것. 이제 와서 동요할 이유란 뭣도 없으리라. 게다가 그딴 귀여운 방식으로 으름장을 놔봤자 그저 가여울 뿐이다.
고작해야 조금 걸리적거리는 방 안의 쓰레기를치우는 정도의 기분. 지금의 유쾌함을 지워 내릴 정도는 아니야. 그렇게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입가에 띤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