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화 〉두근두근 문예부 (18/73)



〈 18화 〉두근두근 문예부

"왜 날 보고선 모른 체하는 거지, 이시아양?"

꿀이라도 바른  달콤한 중저음. 적어도 연애에 대해서는 아직 남자로서의 의식이 강한 나에게도 그 목소리는 실로 고혹적이었다. 수줍게 간지럼을 타는 심장, 콩닥콩닥.

얼굴이 잘생긴 녀석들은 목소리도 잘생겼다는 건지. 이 목소리만으로 대체  명의 여자를 후리고 다녔을까. 게다가 우월한 기럭지까지, 이제는 여자의 몸인 나조차 없던 자격지심이 생겨날 정도다.

“끝까지 못 본  할 건가?”


쳇-하고,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각도에서 혀를 찬다. 하필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이런 남자와 마주쳐버리다니.

꼭 그가 게임의 등장 캐릭터라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남들이야 집안 빵빵한 학교 제일의 미남이라 여기고, 조금이라도 친분을 만들고 싶어서 환장하겠지만, 나는 그런 눈에 띠는 존재랑은 조금…순정만화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지만, 괜히 엮였다가 같은 여자애들의 질투라도 사면 어떡해. 이지메는 싫은 걸.

애초에  남자는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나를 왜 불러세웠는지 의문이다.인사도 안하고 지나가는 예의 없는 후배에게 똥군기라도 잡을 심산이려나. 아니, 역시 그것은 과한 억측이겠지. 어떻게 짜맞쳐 보아도 세간에 알려진 그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북극의 빙산처럼 고고하고 차디찬 아이스 프린스…우욱, 오글거려.

아무튼 지금 중요한  이런 게 아니지. 괜히 엮이고 싶진 않으니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고 빠져나가도록 하자.

고개를  돌리고 최대한 능청스레, 바로 내 등 뒤에 서있는 그를 보고서 놀란 얼굴을 꾸며낸다.

"어머! 김성현 선배! 매우 깜짝이야! 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습니…크흠?"

그러나 내게는 텐션이 너무 높았던 건지 그만 나버린 삑사리. 후폭풍으로 몰아치는뻘줌함에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자 한심스럽다는 시선이 뒤따라왔다.

"너 진짜 거짓말을 못하는군."

…뭐라 반박하고 싶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보다 길 가는 사람은  붙잡은 거에요.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응? 딱히 이유는 없다만?"

"뭐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건만 이유도 없이 부르다니. 이 인간이 원래 이렇게 친화력좋은 인간이었나. 살짝 놀라서 반문한다.

모르긴 몰라도 겨우 그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 그것도 여자를 부를 인종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게임 상의 정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얼음 왕자 같은 별명이 공공연히 떠도는  보면 게임과  다르지도않으리라.

"아니, 원래 나로서도 굳이 가는 사람을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네가 일부러 날 못 본 체하는 걸 보니…왠지 심술이 들어서 말이지."

진중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면 '과연, 그렇군요'라고 납득이라도 할 줄 알았냐, 이 인간아. 결국 뭣도아닌 심술 때문이었다니, 어이가 떨어지는 기분.

그 감정이 그대로 표정 위로 드러났나 보다. 날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슬며시 한쪽 입꼬리만을 올리는 그.


"재미있군."

"네?"

"너를 말하는 거다."

어디서 본 듯한 상황에, 어디서 들은 듯한 대사.  순간 느낀 그것은 명백한 기시감이었다. 그래, 데자뷰. 망치 같은 충격이 머리를 쾅 때리고 지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장인이 세공한 보석처럼 밝은 쪽빛 눈동자는 마치 고요한 바다와 같다. 사소한 파문조차 일어나지 않는, 그저 흘러갈 뿐인 유랑.

그 위로 떠오른감정이 무엇인지는 나로서도 모르겠으나, 다만 묘한 익숙함을 동반하고 있었다.

기억 회로를 최근부터 차츰 더듬어 올라가기 시작한다. 한낱우둔한 착각 따위가 아니다. 점차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 노을빛 아른거리는 공원 속에서 당황하는 얼굴의 소녀와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 이 대치는 어딘가 익숙하다. 허나 그때는 평면상의 이미지에 불과했고, 지금 내가 놓인 이 상황은 어디까지나 현실이다.


"…갑자기, 상당히 이상한 말을 던지시네요."

"왜, 두근거리기라도 했나?"

"설마요."

"흠, 하지만 나는 몹시 두근거리는 걸. 아무래도 나는 첫눈에 너에게 반한 듯하다만 어떤가? 나와 한 번 교제해보는 건."


그가 손을 뻗어 내 턱을 어루만진다. 푸른 눈동자가 지그시 내 눈을 응시한다. 서늘한 감촉이 볼가를 감싼다. 손을 뻗으면 서로의 심장이 닿을 거리, 한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난데없이 받은 고백. 그러나 두근거림은 없었다. 하다못해 간지럽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마, 사랑을 말하는 그의 눈이 지독히도 가라앉아있기 때문이겠지. 푸른 눈동자는 어디까지나 내 반응을 잠잠히 지켜볼 뿐, 그가 말한 두근거림과는 거리가 먼 감정을 담고 있었다.

…아아, 이 장면은 바로 게임의 이벤트 중 하나였다. 게임 내에 존재하는 세 개의 루트. 그중 김성현의 루트를 선택했을 시 거의 처음에 나오는 이벤트. 그가 주인공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이자, 지독한 얽매임의 출발점.

 계기란 별로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수많은 로맨스 장르 창작물 속에서 흔하게 쓰이는 것이지.

김성현이라는 인간은 완벽에 가까운 남자였다. 전교에서 순위권을 유지하는 성적에, 운동 신경 또한 발군이고, 재벌가의 상속자. 외모는에 관해서는 굳이  아프게 떠들 것도 없다.

뭇 여성들의 한심한 이상을 그대로 구현시킨 것이 바로 그라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는 늘 수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었다. 그와의 로맨스를 꿈꾸는 여자들, 그의 가문과 커넥션을 만들고 싶은 자들, 각자의 목적은 다양했으나 전부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그에게 접근했다는 점에선 다 똑같은 부류였다.

그들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이내 그는 지긋지긋 달라붙는 그들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소한 감정은, 이윽고 인간 전체에 대한 악감정으로 번졌다.

거기다 더해진 엄격한 가정교육이 결정적으로 작용해 본래 순수하던 그의 성질을 비틀린 것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인간의 우열을 나누기 시작했고, 특별한 극소수를 제외한 인간들 모두가 자신의 아래라고 여겼다. 그리고 자신보다 미천한 존재들을 비웃으며 엄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았다.

하지만 그 틀에 박힌 삶 속에서 어느  주인공이 나타나버렸다. 어떤 남성보다 우월한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고, 만인이 우러러보는 자신을 대놓고 기피하며, 바로정면에서부터 자신이 지니고 있던 가치관을 부정하는 존재가.

계속해서 자신을 밀어내고 자신이 올바르다 여겼던 가치들을 가감 없이 깎아내리는 주인공을 보면서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에 불과했던 감정이, 곧 열렬하게 번졌다. 즉 그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늘상 생각하는 건데 매체 속의 재벌 2세들은 다들 마조라도 되는가 보다. 나를 까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뭐 이런 건가.

나 역시 게임  주인공처럼 그를 피하긴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접점 자체를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게임 속의 공략대상이기 이전에 워낙 유명인사였으니까.  막대한 관심의 일부라도 나에게도 옮겨지는 것이 싫다.

그런데 설마 이런 식으로 절묘하게 만남이 이뤄질 줄은, 나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래봬도 진심이다만?"

"그래서 더 악질인 거에요."

진심이란 건 어디까지나 고백이 아닌, 재미있다는 그 비웃음 섞인 말이겠지.

설령 어떤 경우에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지금 여기서 고백을 받아들여봤자 그가 나를 가지고 놀다 버릴 거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저 눈, 나를 장난감 이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거든.

확실히 말하도록 하자. 이 인간, 짜증난다.

위에서부터 날 내려다보는 시선도 그렇고, 사람을 한낱 장난감처럼 취급하는 태도도 그렇고, 게임 속에서의 정보를 제외하더라도 그의 모든 것이 기분 나쁘게 느껴진다.

그래서 평소보다 목소리와 눈빛을 차갑게, 그리고 날카롭게 갈무리한다. 거대 재벌의 자제로서 사교계를 들락날락하듯  그에게 있어 별 위협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사소한 반항이나마 하고 싶다. 그로 인해 게임과 엇비슷한 루트를 걷는다 하더라도.


"저기, 선배. 저도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그게 뭐지?"


게임과 현실이 다르다고 했었지. 확실히 그건 그렇다. 나로 인해서 세계가 틀어진 건지, 아니면 세계 그 자체가 변혁을 시도한 건지는 몰라도, 확실히 이 세계는 게임과는 다르다. 나의 언니는 그에게 집착하지 않고, 선아도 최형곤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제껏 충분히 증명되어 온 사실들.

그러나 그의 뭣 같은 성격만큼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저번에는 워낙 당황했고그도 내게 별 관심이 없어서 눈치 못 챘지만, 나도 마냥 바보는 아니다.

이번 만남으로 똑똑히 알았다. 그는 나 역시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보다 아래의 인간으로 보고있었다. 처음에는 몰랐던 눈동자에 어린 감정도, 계속 보니 싫어도 눈치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마음을 희롱하기 위한 거짓 고백까지. 점점,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콤플렉스 똘똘 뭉친 그 성격. 비록 그 안에 꽁꽁 감춰진 속마음은 선하다고 하지만,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이유도 없이 남을 무시하고 깎아내리는 태도는 내가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종류의 것이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고등학생인 주제에 영 분별력이 없다. 딱 얼굴 하나만  만하지 그 외에는 못 써먹을 인간이다. 더군다나 지금 그는 내가 자신의 고백을 받아들이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정말로 터무니없는 수준의 자의식과잉이다.

나에게는 이딴 재수탱이를 개심시켜줄 의리도 의무도 없다. 그러니 그냥 지 꼴리는 대로 살라지.

…그럼에도 굳이 한 마디 해주자면,

"인성 좆나 더럽네요."

"…뭐?"

"아, 선배 말하는 거에요."

좆같은 짓을 당했으면 나도 상대를 좆같게, 상대로부터 엿을 받았으면 나도 엿을 줘야지.

냉철한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이 얼빠지게 변한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방긋 웃었다. 그야말로 도취된, 승리자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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