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0화 〉두근두근 문예부 (20/73)



〈 20화 〉두근두근 문예부

“흐음…"

방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평소 꾸미는 데 관심이 없는 나를 위해 어머니가 사주신 전신 거울에다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본다. 먼지 한 톨 없이 매끄러운 표면 위에는 그럭저럭 봐줄만…하다고 생각되는 소녀의 상이 맺혀 있었다.

데님색의 스키니진에 새빨간 후드티, 실로 무난한 옷차림이라지만, 내 입장에서는 늘상 입던 츄리닝을 버린 것만으로도 제법 차려입은 셈이다.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아니야?"

사람들이 이상하게쳐다볼까 괜히 걱정이 들어서혼잣말을 해본다. 아무리 겉모습에 무감각한 나라도 요즘 하도 패션에 관한 지적을 받다 보니…나름 신경을 쓰려고 노력 중이다.

삐죽튀어나온  머리털을 세심히 정리하고, 내 방을 나가 바로 옆에 있는 언니의 방으로 향한다.

지긋지긋한 평일도 가고, 모처럼의 주말이니 어딜 나가든 문제는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언니한테는 나갈 거라고 미리 말해두는 편이 좋겠지.

방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동시에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소음이 고막을 자극해왔다.

"저기 언…"

"하아, 하앙…"


사흘 전에도, 그저께도, 어제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듣는 목소리가 달뜬 신음성을 계속해서 내뱉는다. 그리고 열린 문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후끈한 열기.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지만, 같은 목소리가 한  번쯤 울리고 나서야 나는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넋을 놓은 시선의 앞에는, 어째선지 자꾸만 덜컹거리는 의자 등받이.

…그러니까, 이건 그거지?

조용히, 아주 조심스레 방문을 도로 닫아놓고 살금살금 그 근처로부터 멀어진다. 언뜻 비친 살색 가득한 화면이 어디선가  듯한 공간을 담고 있는 듯도 했지만 차마 그 안으로 들어가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언니도 사람이라는 사소한 위안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최대한 조용하게 집을 빠져나온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서로의 은밀한 사생활은 존중해주도록 하자. 그것이 기본적인 에티켓이다. 자, 그럼 이만. 아디오스.



=

집으로부터 대략 10분간을 걸어서 번화가에 도착. 주말이라 그런지 각종 상점이 늘어선 거리는 사람들로 즐비하다.

휙휙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분수가의 근처에 앉아 멍한 느낌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설마 언니가 그렇고 그런 짓을할 줄이야.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충격.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응? 아아, 선아구나. 별 일 아니야."


그때 내게로 다가오는누군가. 이제는 익숙한 적갈색 머리칼에 입꼬리를 맘껏 들어 올리며 인사를건넨다.

다가오는 여름에 맞춘 것인지. 선아는 특이하게도  쪽만 민소매인 무지 반팔티와 짧은 하이웨스트 스커트를 걸치고 있었다. 일전에 본 순백의 원피스와는 꽤나 다른 느낌이지만, 말할 것도 없이 화사한 모습. 선아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리는 코디다.

"가자, 오늘은 할 일이 꽤 많으니까."

그와 함께 내밀어지는 선아의 손을 잡고서 일어난다. 그렇게 우리 둘은 상점가 중에서도 의류 브랜드가 밀집된 지역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선아와 함께 옷을 사기로 약속한 날이다. 교복 말고는 마땅히 여성스런 옷이 없는 나를 평소 불만스레 여기던 선아가 주선한 만남.

당연히 처음에는 한사코 거절하던 나였지만, 선아의 고집이 워낙 완강해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무리 예쁜 옷이라도 내가 입으면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가   뻔한데, 선아는 반드시 어울릴 거라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꺼려하는 나를 이곳까지 끌고 나왔다.

팔짱을 낀 채, 지금  순간이 즐겁다는 듯 해맑은 미소를  선아의 옆얼굴을 들키지 않게 훔쳐본다. 뭐가 됐건 웃고 있는 선아의 모습은 보기 좋다. 그래, 그럼된 거지 뭐.

"우선 여기부터 들어가자."


선아의 팔에 이끌려 어느상점의 안으로 들어간다. 문을 열기 전 위에 달린 간판을 슬쩍 올려다보자 요상한 필체로 적혀있는 상호명.

이윽고 유리문이 열리면서종소리가 짤랑거린다. 조금 인공적인 미소를 띤 점원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 오고,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다는 듯 거침없이 걸어 나간 선아는 옷걸이 몇 개를 차례차례 집어 들고서 한 개 씩  몸에다 가져다 댔다.

"응…역시 뭘 입어도 어울릴 것 같네. 저기, 시아는 검은색 좋아하지?"

"으, 으응."

"그럼 일단 이것부터 입어봐."

선아가 건네주는 옷가지를 받아들고 탈의실 안으로 들어간다. 비좁은 사각형의 공간에 틀어박혀 얼마 되지도 않아 보이는 천쪼가리들을 들쑤시자 휘릭하고 펼쳐지는 미니 플리츠 스커트에, 니트 소재의 크롭탑과 가디건 세트. 치마는 검은색이고, 상의는 하얀색. 나쁘진 않지만 나한테는 노출이 너무…

"…일단, 입어야겠지."


 앞에서 버티고 있을 선아를 생각하면 고민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고개를 내저으며 천천히 입고 있는 옷들을 벗어 내린다. 이윽고 드러나는 꾸밈없이 밋밋한 속옷. 탈의실 안이라지만 바깥에서 속옷차림이 되니 왠지 기분이 멜랑꼴리하다.

벗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천천히 선아가 골라준 옷들을차려입고, 한쪽 벽면을 차지한 거울로 자신의모습을 비춰본다. 짧은 길이의 크롭티 아래로 배꼽이 살짝 엿보이고, 역시나 짧은 치맛단 아래로 딱히  것도 없는 허벅지가 거의  가까이 드러나 있는 모습.

급속도로 민망해지는 기분에 애꿎은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린다. 다행이 살집이 있는 몸은 아니라지만, 선아도 아닌 내가 이러고 밖으로 나가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 같은데.

"아직도 다 못 입었어?"

"막 다 입었어. 나갈게."

부끄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고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역시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 갈아입은 나를 보자마자 입술을 꾹 다무는 선아.

그, 그러게 왜 이런 걸 입히는 거야.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침묵 뒤에 과연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그저 무섭기만 하였다.


"여, 역시 좀 그런─"

"어엄청 잘 어울려!!"

"에?"

"어서 다음 것도 입어봐!"


선이는 그렇게 소리치며 다시금 탈의실 안으로 내 몸을 떠밀었다. 영문도 모른 채 처박혀서 옷을 갈아입는 나. 이번에도 노출이 꽤 있는 코디. 그러나 선아는 이번에도 어울린다며 호들갑을 떨더니, 내 등을 소리 나게 두들겼다. 생각보다 매서운 손길에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무려 두 시간이나 갈아입고 벗기를 반복했다. 핑크핑크한 원피스를 마지막으로 드디어 끝난것인지 선아는 더 이상 새로운 옷을 가져오지 않았고, 완전히 기진맥진해진 나는 마치 좀비처럼 탈의실에서 기어 나왔다.

그런 나는 아랑곳 않은 채, 두툼한  무더기를 들고서 계산대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선아. 오늘 막 만났을 때보다 환해진 얼굴이 눈부시다.

"항상 생각했던 거지만, 역시 시아는  입어도 잘 어울리는구나. 쇼핑  왔다, 그치?"

활기 가득한 선아의 물음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해보려 하지만, 이미 한껏 지쳐버린 몸.

조금 전의 선아는 보기 드물게 하이텐션이었다. 평소의 조용조용하던 그 아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 색다른 모습이 나쁜  아니지만, 덕분에 질질 끌려 다닌 나는 상당히 피곤해져서……마냥 좋다고도 할  없겠다.

"저기, 계산 좀…"

"내가 계산할게."

뭐라 해도 옷을 골라준 마당에 계산까지 시킬 수는 없지. 지갑을 꺼내는 선아를 만류하고, 지친 몸을 이끌어 앞으로 나선다.

이럴 줄 알고현금을 두둑이 챙겨왔으니 조금 무리하게 지출을 해도 상관없으리라. 그 무수했던 시착이 끝나자 한결 가벼워진 마음과 손길. 망설임 없이 지갑을 열어제낀다.

그러나 이내 점원이 가격을 말한 순간, 지갑을 뒤적거리던 나의 손은 정지 버튼을 누른 비디오테잎처럼 딱 멈추고 말았다.

"지금 행사기간이니까…할인 적용해서…총 682000원입니다."

“육십…뭐요?”

"682000원입니다, 손님."

“오, 싸당.”

변함없이 알랑거리는 미소를 띤 점원을 경직된 얼굴로 쳐다본다. 이 와중에 내 마음도 모르고서 상쾌하게 말하는 선아.

어디 보자. 68만원이면, 응, 일주일에 한  먹기 힘든 후라이드 치킨을 대략 16000원이라 쳤을 때, 무려  40마리의 값에 육박한다. 족히 두 달은 질리도록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양. 최저 시급으로 계산하면 80시간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

여자 옷이 비싸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래도 30만원 안팎으로 정리되리라 어림잡고 있었는데, 지금 그 어리숙한예상이 산산조각 무너져 내렸다.

어떡하지. 점점 차게 식어가는 점원의 눈빛에 손이 덜덜 떨리지만, 저는 지금 27만원 밖에없단 말이에요.

아니, 잠깐, 관점을 바꿔보자. 꼭 내가 68만원이라는 거금을 지불해야 될 필요가 있을까. 애초에 이 옷들을 전부 사야하는 마땅한 이유가 있을까. 아니, 있을 리가 없지. 귀찮아서 언니가 사준 옷들도 잘 안 입는 나인데, 큰돈을 써서 사봤자 허망한 과소비가 될 뿐이다. 그러니 아깝지 않게 이것저것 빼서 대충 조정하면…


"저기, 다른 거  빼고 요거 2개만 계산…"

"…그냥 내가 전부 계산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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