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두근두근 문예부
그렇게 옷을 사고 난 이후로도 오랫동안선아와 나는 함께 거리를 돌아다녔다. 출출해진 뱃속에 분식집에서 대강 점심을 때우고, 요즘 한창 흥행중이라는 영화를 관람하였다.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는 음반 매장에 가 서로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앨범을 사기도 했다. 옷값의 보상이라기에는 미약하지만 이번 계산은 내가 했다.
아무튼,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전이라면 혼자서 덤덤히 해냈을 일들도 친구가 곁에 있어서인지 새로운 기분. 선아 역시 돌아다니는 내내 웃음기 띤 얼굴이었으니까. 충분히 즐겼겠지. 나 혼자 즐거워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하아, 지친다."
시간은 어느덧 5시 30분. 슬슬 태양이 저물 준비를 하는 때. 그 동안 어지간히도 걸었기 때문인지. 선아는 오늘 우리가 처음 만났던 분수대에 앉아선 짧은 치맛단 아래로 드러난 맨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짓궃은 마음이 들어서 선아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는다. 그러자 불퉁스런 얼굴로 눈을 치켜뜨는 선아. 복어처럼 빵빵해진 볼가를 손가락으로 콕 찔러본다.
"여기서 좀만 기다려. 금방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올 테니까."
"응, 땡큐."
많이 지친 듯한 선아를 놔두고 근처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걷기 시작한다. 그러자 한 발짝씩 내딛을 때마다 정신없이 팔랑거리는 치맛자락. 한순간 넓적다리 사이를 슝하고 지나가는 바람에 부끄러움이 차올라서 걸음을 멈추고, 거리의 쇼 윈도우에 언뜻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니트 가디건에 크롭탑, 그리고 검은 미니 플리츠스커트. 선아가 처음에 골라준 옷이다. 선아의 안목이니 만큼 제법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마치 내가 아닌 것 같이 어색한 느낌. 그나마 훤히 드러난 맨다리가 이전보다 시원하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다. 참고로 원래 입고 왔던 옷은 이 편이 무조건 어울린다는 선아의 윽박에 쇼핑백에 집어넣었다.
"어디였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이곳에 오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가. 종종 찾아가던 가게의 위치가 헷갈린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익숙한 골목길을 발견하고서 걸음을 옮긴다.한때 자주 쓰고는 했던 인적이 드문 사이길. 당연히 이런 곳에 가게가 있을 리는 없고, 다른 블록으로 가기 위한 지름길이다.
"어이, 거기 잠깐 스톱."
그런데 골목길의 중간 지점쯤에 다다랐을 무렵, 등 뒤에서 들려오는 껄렁껄렁한 목소리. 고개를 뒤로 돌리자 거기엔 너무 탈색해서 푸석푸석해진 백금발, 입에 한 대씩 꼬나문 담배, 양아치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 없는 차림새의 남자 두 명이 느긋한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가씨, 혹시 시간 나면 우리들이랑 같이 놀지 않을래?"
"분명 재밌을 거야."
"싫은데요."
무슨 쌍팔년도도 아니고 요즘에도 이런 양아치들이 있어? 껄렁거리며 다가오는 양아치들.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그렇게 남자의 권유를 단칼에 자른 뒤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하지만 그 순간 떠나려는 내 어깨를 붙잡는 누군가의 손. 동시에 뻗쳐나가려던 주먹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또 한 번 돌아보자 아까의 그 남자들이 기분 나쁜 웃음을 지은 채 서있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게 어때?"
"험한 꼴 당하기 싫다면 말이야."
"우린 오랜만에 만나는 너 같은 년 때문에 흥분해있다고."
"자기가 세웠으면 자기가 책임을 져야지, 응? 순순히 따라오면, 상냥히 따먹어줄게."
험한 꼴? 나 원 참, 체격도 비리비리한 것들이 무슨…어이가 없어서 픽하고 실소를 지으니 쇄골 근처를 슬며시 건드리는 손길. 화끈거리는 손바닥이 민감한 부위를 더듬거리지만, 달아오르기는커녕 차게 식는 몸.
여자의 몸이라고 해서 약할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화딱지와함께 각종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러나 아직은 잔잔하게, 내 어깨 위에 놓인 남자의 손을 유하게 떼어놓으며 조곤조곤한 어조로 경고한다.
"자꾸 이러시면 경찰 부릅니다?"
"경찰? 푸하하, 짭새 무서웠으면 이딴 일 시작하지도 않았어."
"이거 쥰내 당돌한 년이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 이런 말도 못 들어봤어?"
"이 씨ㅂ…"
이 새끼들이 진짜. 어금니가 갈리고 주먹이 절로 꽉 쥐어진다. 그러나 내가 뭐라 욕이라도 씨부리기직전, 먼저 선수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법이 주먹보다 가깝다고? 그거 참 좋은 말이군. 내가 오늘 그말을 네놈들에게 똑똑히 가르쳐주마. 그 비루한 몸에 직접 말이다."
“응?”
퍽하고, 입술을 이죽이던 양아치 한 놈의 옆얼굴에 틀어박히는 커다란 주먹.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아무리 불의의 기습이었다고는 하나 일순간 나조차 놓친 그 일격에 얼을 타자 주먹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우뚝 선 콧날과 날카로운 눈매, 새하얀 피부에 얄상한 입술, 찰랑거리는 흑발. 남자 주제에 섬세한 미가 돋보이는 그 얼굴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것.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서, 선배?”
"뭐, 뭐야 이 새끼!"
처음의 한 방을 맞은 녀석은 그대로 기절해버리고, 혼자 남은 다른 녀석은, 그가 손뼈를 우두둑 꺾으면서 서서히 다가가자 악을 지르며 무작정 달려들었다. 물론 결과는 보나마나. 쏜살 같이 내질러진 그의 주먹이 양아치 녀석의 복부에 정통으로 꽂혔다. 격투기 초심자로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깔끔한 어퍼.
“어흑…”
뭣도 모른 채 얻어맞은녀석은 조금 전 녀석처럼 기절하지는 않았다. 대신 바닥에 엎어진 채 배를 부여잡고선 군침을 꺽꺽 토해댔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으며 쓰러진 양아치 녀석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셔츠 깃이 감겨 올라가며 목을 죄이자 숨이 막힌 듯 켁켁 거리는 양아치.
"별로 널 도와준 것은 아니니, 착각은 하지마라."
…아 예. 그러시군요.
차게 식은 눈길로 그의 무심한 표정을 쳐본다. 말마따나 그라는 인간이 귀찮음을 무릅써가며 남을 도와줄 족속은 아닐 텐데, 그럼 어째서 난입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나가는 널 우연히 보고서, 조금 시험해보고 싶은 게 생겨서 말이지."
시험? 뜻 모를 단어에 돌연 서릿발 같은 오한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으극, 아우욱…야 이 새끼야, 이거 안 놔!? 경찰 부른다!!"
"하아?"
“이, 이제 그만하세요, 선배…”
목이 졸리고 있는 남자가 힘겹게 입을 연다. 조금 전에는 짭새 따윈 무섭지도 않다며?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는 그 태도가 못내 한심스러우나,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큰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싸움이더 커지기 전에 말리고자 목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서지만, 오히려 그는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멱살을 더욱 꽉 틀어쥐었다. 차가운 빛의 눈동자는 평소의 그에게서 찾을 수 없는, 묘한 고조에 휩싸여 있었다.
"방금은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깝다고 하지 않았나."
"이익…!"
"좋은 사실을 하나 알려주지. 법, 주먹, 그딴 것들의 위에 서는 게 뭔 줄 아나? 바로 돈이다.
그리고 나는 돈이 많지. 그 말은 즉슨, 내가 너 까짓 놈을 하나 여기서 묻는다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다는 거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주먹이 움직이면서 둔탁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다음 순간, 남자의 콧구멍에서 콸콸 흘러내리는 핏물. 워낙 잽싸게 벌어진 일이라 채 비명도 못 지른 남자의 동공이 알딸딸하게 풀렸다.
"이만하면 됐잖아요. 진짜 경찰이라도 부르면…"
“상관없어. 어차피 빵에 가는건 이 녀석일 테니까.”
그렇게 그를 만류해보지만, 꽈악 틀어진 멱살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하이얀 손등 위로 돋아나는 몇 개의 핏줄.
그의 고개가 끼기긱 돌아가며 나에게로 향하는 시선. 평소의 냉정함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먹잇감을바라보는 독사와 같은 눈초리에 순간 몸이 굳어버리고 만다.
“그 전에 먼저 너한테 물어볼게 있다. 너는 나에게,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했지. 그럼 너는 이 '쓰레기'가 너나 나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말할 수 있나?"
"우선 멱살부터 놓고 말하세요. 좀만 더 하면 정말로 죽을 것 같은…"
"걱정마라. 어디 한 군데 후유증이 남을 수는 있어도, 죽이진 않는다. 그보다 나는 너에게 묻고 있다만?"
뜬금없이 난입해서 던지는 뜬금없는 물음. 도대체 체육창고에서 나눴던 그 얘기가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됐지만, 지금은 잔뜩 흥분해 있는 이 인간이 정말로 선을 넘기 전에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다. 딱딱하게 굳은 머리를 억지로 굴려가며 아무 말이나 쥐어짜낸다.
"그건…어디까지나 본질적인 차원의 이야기였어요."
"본질? 그런 알 수도 없는 개념을 논제에 끌어들이지 마. 그야말로 현실 도피가 아닌가?"
내 대답에 영 맘에 들지 않았는지 조금 전의 일격보다 한층 무겁게 울려 퍼지는 타격음. 입술을 얻어맞은 남자의 강냉이 몇 알이 허공에 비산한다.
그러면서 점점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그의 주먹. 저도 모르게 인상을 와락 찌푸리자, 그는 오히려 그런 나를 보면서 기분 좋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삐뚜스름하게 치켜 올렸다.
"그만하시라구요!"
"싫다만? 네가 내 물음에 제대로 답하기 전까지, 이 녀석을 때릴 거다.
왜, 질문을 잊었나? 그럼 다시 묻도록 하지. 정녕 이런 쓰레기라도 우리 같은 존재와 평등하다는 거냐?"
"…확실히 그 양아치는 선배보다 못한 존재일 지도 몰라요. 하지만, 자신보다 못하다고 해서 선배가 그를 괴롭힐 권리는 어디에도 없잖아요."
"틀렸어!"
그의 주먹이 또 한 번 매섭게 바람을 가른다. 사방으로 핏물이 튀면서 내 운동화에도 자국이 묻는다. 양아치의 얼굴이 점점 압축 캔처럼 찌그러진다.
…나서야 될까? 말아야 될까?
고민은 잠시, 잔뜩 성이 난 그의 팔을 강하게 붙잡는다. 그러나 팔에 달라붙은 벌레를 떨치듯 아무렇지 않게 나를 떨쳐내는 그. 예상치 못하게 밀쳐진 바람에 쿵하고 벽과 부딪힌 등이 아릿하게 시려온다.
쓰라린 등을 부여잡으면서 그를 노려본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걸린 조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열등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죄악이다. 내가 이 녀석을 때리는 것도, 마땅히 옳은 행위란 말이다."
그는 그러고선 양아치의 멱살을 풀고, 배를 발로 차 넘어트렸다. 우아하게 들어 올린 구두 밑창이 쓰러진 양아치의 얼굴을 잘근잘근 짓밟았다.
섬뜩한 모습. 나를 몰아세우는 그의 의구심은 집착에 가까워 보였다. 웃고 있지만 어째선지 초조해 보이는 그의 표정을 자세히 뜯어본다.
떠오르는 것은 어제 체육창고에서 나누었던 대화. 지금껏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던 세계를 내가 정면에서 부정했으니, 아마 충격이 어지간히도 컸겠지. 그 충격에서 벗어나려면 나의 논리를 어떻게든 꺾어야했을 테고, 그것이 그를 이런 과격한 행동으로 이끈 셈이다.
그런 그가 평소의 냉정함을 완전히 잃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내가 아무런 말도 않자, 그는 바닥에 드러누운 양아치의 몸 위에 올라탄 뒤, 있는 힘껏 주먹을 위로 쳐들었다.
무자비한 그 손속에는 일절의 망설임도 없었다. 폭력적인 타격음과, 그 속에 파묻힌 비명소리가 잇달아 울려 퍼진다.
"그만─"
"할 말은 그걸로 끝인가?"
"그만하─"
"미안하지만, 잘 들리지가 않는군."
이미 반쯤 죽은 듯한 양아치 녀석을 지켜보며 두 주먹을 꽉 움켜쥔다. 의구심이고 나발이고, 도대체 왜 이런 잔인한 짓을 하는 거야. 자기 가치관을 위해서라면 사람 한 명 병신 만드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건가? 머리가 차가워지자 슬슬 당혹감이 사라지고, 대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하는 분노.
아무리 날 겁탈하려던 쓰레기라 하더라도 그게 곧 길바닥에서 때려죽여도 된다는 건 아니다. 계속 두들기면 진짜 죽을 지도 모르니 그만하라고 대체 몇 번을 말했는데 아직도 못 알아 처먹는 거야, 이 바보는…!
"뭐냐, 이제 할 말이 없는 거냐? 시시하─"
"그만하라고 이 새끼야!"
──퍽! 기나긴 인내 끝에 드디어 호쾌하게 뻗어진 주먹. 확실한 감촉, 짜릿하게 전신을 자극하는 통쾌함에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 웃음.
겨우 한 방인데, 겨우 한 방일 뿐인데, 겨우 연약한 소녀의 주먹 한 방일 뿐인데! 긴 시간 동안 공중을 부유하다가이윽고 저 멀리 나가떨어지는 그의 몸뚱아리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너무 세게 때렸다.
"시아야? 거기서 뭐…응? 저 사람 학생회 부회장…"
"미안!"
"꺄, 꺄악!?"
내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인지. 갑자기 마주친 선아의 모습에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고 냅다 달리기 시작한다. 갑작스런 뜀박질에 선아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지만, 지금은 한 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