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두근두근 문예부
"후우…"
붉은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운동화를 벗으며 현관으로 들어선다. 천장에 있던 실내등이 자동으로 커지면서 노란 빛을 비춘다.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절로 뿜어져 나오는 깊은 한숨. 몸은 피곤하고 정신은 찌들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다.
어쩌다 그 사람을 폭행…한 이후 선아와는 뭉뚱그려 사정을 설명한 다음 헤어졌다. 다행이 선아는 나의 지친 얼굴을 헤아려준 것인지 꼬치꼬치 캐물어오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도 건재한 채로 남아있다. 뭐라 해도 재벌 2세의 얼굴에 원펀치 스트레이트를 꽃아 넣은 거다. 그것도 어찌나 강하게 쳤는지, 족히 몇 미터는 공중을 날아가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리 싸움을 말리기 위해서였다지만 남자의 얼굴에 틀어박힌 손등은 아직도 얼얼하다.
만약 이 세상이 여전히 게임이었더라면 '나를 때린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라는 전개를 기대라도 했었겠지. 허나 이 세계는 엄연한 현실이고, 현실에 그런 도착적인 플롯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애초에 나는 로맨스장르 속 여주인공만큼 예쁘지도 않은 걸.
문제가 완만히 풀리면 좋으련만. 경찰이라도 찾아와서 날 끌고 가면 어쩌지? 혹여 어마어마한 깽값이라도 요구해오면 어쩌지? 부자라면 병원에 몇 달 입원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거 아니야. 그럼 합의금에, 치료비에, 소송비에…상상만 해도 벌벌 떨리는 두 손. 아니 오히려 상상이기에 더 무섭다.
절로 한숨 나오는 상황이긴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어쩔 수가 있나. 이 한 몸이라도 굴려야지. 일단 잘못을 저지른 것은 나이니, 다른 가족한테까지 피해를 전가하고 싶지는 않다. 몰래 둘이서 합의라도 하길 바라야겠지.
모르긴 몰라도 돈 꽤나 깨질 테니 알바라도 열심히해야겠다. 개학 시즌은 제치더라도 방학 때는 시간이 널널하니까. 성적은 조금 떨어지겠지만, 어쩔 수 없지.
"돌아왔니?"
"…응, 다녀왔어."
날 맞이하러 나오는 언니에 의해 사고의 연속선이 끊긴다. 어색함을 숨기며 내 방으로 걸어들어간다. 지금은 언니의 얼굴을 보기가 다소 껄끄러워졌다.
[새벽 7시경, 출근한 환경미화원에 의해 직장원인 이 모 씨가 골목길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사체의 흔적으로부터 이것이 최근 기승을 부리는 연쇄살인범의 소행으로 결론짓고…]
거실에서는 어느 때와 같이 기분 나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 불유쾌한 잡음을 한 귀로 흘러들으며 지나친다.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 조금이라도 일찍 잠에 들 심산이었다.
=
"어제 사준 옷들, 꼭 입어야 돼?"
"굳이 말 안 해도 입을 거야……아마도."
"그게 뭐야!"
그렇게 밤이 가고, 해가 떴다. 험난했던 하루가 지나고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이 평온한 내일이 또 왔다.
문득 고갤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분홍빛의 벚꽃잎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시리도록 파랗다. 입으로 들이 마쉬는 공기도 마냥 맑게만 느껴진다.
귓가에 닿는 산들바람의 소리는 무언의 노래가 되었고, 은은히 퍼지는 꽃의 내음은 달큰하다. 거리에는 나와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내 옆에는 웃으며 재잘대는 선아가. 어느 아침의 그런 등굣길.
어제의 고민도 많이 가시고, 상쾌함이 허전한 가슴을 채운다. 옆에서 걸어가는 선아와 보폭을 맞추며 나보다 한 뼘 정도 작은 그녀의 머리를 버릇처럼 쓰다듬는다.
언제 보아도 부드러운 머릿결. 이제는 익숙해진 것인지 그녀는 담담하게 내 손길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평화는 얼마 안가 깨지고 말았다.
"…저기, 선아야. 교실엔 먼저 가 있을래?"
"응? 왜…아,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때 저 멀리서 시야에 포착된 누군가의 모습. 발걸음을 멈추고, 선아를 먼저 보낸다.
어제 대강이나마 사정을 설명했기 때문에,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본 후 군말 없이 앞서나가는 선아. 나는 잠시 동안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멈춰서 있다가, 이내 그 인형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
검지만 칙칙하기는커녕 윤기 나는 흑발에, 잘 조각된 대리석 같은 이목구비. 셔츠에 마이 한 장만을 걸친 몸은 체격도 비율도 이상적이다. 벤치에 앉아 등을 기대고 있을 뿐인 모습조차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하지만 그 완벽에 가까운 미모에도 흠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새파랗게 변색되어 있는 오른쪽 볼가.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상처자국을 보자 아프게 찔리는 내 양심. 누군가 저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는지 그는 읽고 있던 책을 탁 소리 나게 접었다.
"하루만이군. 어제 일은…"
"죄송합니다아!"
처음엔 무슨 말로 운을 뗄까, 그러나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닿자마자 영업사원처럼 깍듯이 허리를 숙인다. 비록 영업 경험은 없었지만 본능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시야 가득히 흙바닥이 들어찬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한껏 당황한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짓거리지?"
"어제 무심코 선배를 때린 일, 정말로 죄송합니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멍청했으니 부디 경찰에 신고만은 말아주십쇼! 합의라면 학교가 끝나고 둘이 조용한 곳에서…"
"이게, 무슨 짓거린지, 물었다."
노기어린 그의 음성에 숙였던 허리를 쳐든다. 예상대로 분노에 차 일그러진 그의 얼굴.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변명한다.
"그러니까, 그…사죄를 드리고자…"
"하,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도 날 때린 거냐? 그 뻣뻣한 허리를 숙여가면서?"
"그건 그…예."
"어이가 없군."
그리 말하며 허탈하게 웃는 그.이윽고 벤치에서 일어난 그는 나의 눈앞까지 다가와 내 눈동자를 직시했다. 호수처럼 푸른 눈동자가 눈앞에서 잔물결처럼 일렁거렸다. 실로 불안정하고 실로 매혹적인 울림이었다.
"그냥 생각이 짧거나 겁이 없는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군. 만일 내가 두둑한 합의금이라도 요구하면 어쩔 요량이지?"
"…벌어서, 갚아야죠."
"어째서 네가 그래야하는 것이지? 너는 그 쓰레기들을 위해서 날 때린 것이 아닌가."
"그래도, 그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단 거, 선배도 잘 아시잖아요."
물론 그때 그를 방관했더라도 그 양아치들이 죽는 일은 없었겠지. 아무리 이 사람이 막장이라도 그렇게까지 미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때의 그를 가만 놔뒀더라면 이후 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사람에게 입혔으리란 건 자명한 사실이다. 어설픈 내가 보기에도 그가 행하던 폭력의 수위는 지나쳤으니까.
어디까지나 선을 넘으려는 그를 말리기 위해서 휘두른 주먹.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동정심에 호소할 생각일랑 없다. 뭔가 지고 들어가는 것 같아 싫은 것도 있지만, 좀만 더 살살 칠걸…이라는생각은 들어도, 지금도 나는 때린다는 그 선택 자체를 후회하진 않는다. 눈이 돌아간 그때의 그를 말릴 길이라곤 그러한 충격 요법밖에 없었으니까. 만일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내 선택은 변함없었겠지.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분명 내 생각에 비추었을 때는 옳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그와 나의 생각은 다르겠지. 어찌 됐건 나로 인해 피해를 입은 그에게는 제대로 책임을 지고 싶다. 그러니 피하지도 숨지도 않는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한다. 그러자 푸른 눈동자의 한가운데 생긴 파문이 더욱 짙어진다.
"아니,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체 그런 쓰레기들을 네가 직접 피해를 입으면서까지 구해야할 이유가 뭐지? 설마 너한테 구함 받았다고 그 녀석들의 성질이 바뀌리라 생각하는 거냐? 그 녀석들은 살아남을 가치가 없는 족속들이야. 문자 그대로 쓰레기란 말이다. 사회에 해악만 끼칠 뿐인 존재를 쭉 방관해봐야,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 총명한 너라면 충분히 알지 않나."
"확실히 그럴지도 몰라요. 아무리 뭐라 떠들어댄들 인간이라는 생물은 영 바뀌지 않으니까요. 선배의 폭력도, 어느 정도 정당방위란 생각은 들어요.
그렇지만, 그때 선배가 행한 폭력은 충분히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나쁜 일을 당했다고 해서, 똑같이 나쁜 방식으로 되갚아준다면 선배도 마찬가지로 쓰레기가 되는 것 아닌가요?"
"…"
"게다가, 어차피 변하지 않을 인성이라며 갱생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건 너무하잖아요."
어젯밤 잠을 설치면서 많이 고민해보았다. 과연 그가 전적으로 틀린 것인가 하고.처음에 나는 그를 무조건적으로 부정했었다. 다름 아닌 그가 멋대로 나란 인간을 깔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 역시 그를 게임의 지식을 잣대로 폄하하고 기피한 것은 마찬가지다. 물론 그라는 존재가 내게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게임 속 이미지에 바탕한 편견이 아예 없었느냐고 물으면……역시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
"죄송해요, 선배."
"…뭐냐, 또."
다시 한 번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그렇게 말한다. 당혹감이 어린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때린 거 말고요. 처음에 선배를 의식적으로 피한 거요."
"흥, 알긴 아는군."
"대신 선배도 확실히 저한테 사과하세요. 먼저 불순한 의도를 품고서 접근한건 선배잖아요."
"뭐? 그게 어째서…!"
흥, 역시 반발하는 건가. 그렇다면 이 쪽도 어쩔 수 없지.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로 흥분한 그의 얼굴을 아래서부터 치켜본다. 동시에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자, 그의 말이 멈춘다. 살짝 능글맞아진 목소리로 끊긴 대화를 이어붙인다.
"우와, 선배는 의외로 속이 좁은 인간이군요."
"자,잠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참고로 저는 속이 좁은 인간을 매우 싫어합니다."
"크윽…!"
사춘기 남자인데도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이 꽈악 짓눌린다. 그가 갈등하는 모습이 너무 뻔해보여서 작은 웃음을 흘린다.
이내 그는 매우 힘겨운 듯이 입을 열었다. 이 상황이 익숙지 않은 듯 조금 더듬거리긴 했으나,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알았다. 사과하지. 내가 잘못했다."
"헤헤, 잘 하셨어요."
"…흥"
그제서야 굽혔던 허리를 펴면서 활짝 웃는다. 내 웃음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살짝 홍조 띤 얼굴을 휙 소리 나게 돌리는 그. 그래도 더 이상 싫은 말은 하지 않는 것이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귀엽다.
솔직하지 않은 모습. 이런 게 바로 리얼 츤데레라는 건가. 실물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럼, 나는 간다."
본의 아니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줘서일까? 갑자기 등을 돌린 그가 길쭉한 두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라, 이렇게 되면 예의 합의의 건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이대로 그냥 넘어가주는 건가?
"잠깐, 오늘 시간은 남는가?"
"예? 그런데요…"
"그렇다면 오늘 중에 따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후에 문자를 보낼 테니 확인하도록."
"예?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이래봬도 부 학생회장이다.모든 학급 반장들의 연락처는 가지고 있다."
나중에 이야기를 따로 하자라, 역시 병원비는 청구할 생각이구나……의외로 쪼잔한 금수저네. 살짝 삐진 나는 쿨하게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원망스레 쫒았다.
=
"응? 뭐하고 있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우리 시아 핸드폰에 뭐 이상한 거 없나 해서. 가령 도촬 사진이라든지…"
"하아?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마지막 7교시가 끝나고 잠깐 쉬는 시간. 화장실에서 돌아오니 내 핸드폰을 마음대로 다루고 있는 선아의 손을 찰싹 때린다. 그러자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면서 순순히 핸드폰을 건네는 선아.
정말, 왜 남의 핸드폰을 멋대로 들여다보는 거야. 조금 화가 난 채로 새로운 메일이라도 왔는지 확인해보자 화면 위에 떠있는 빨간 ‘1’ 표시.
"밤 12시, 그 공원인가…"
"뭐라고?"
"아니, 아무 것도."
애가 오늘진짜 왜 이러지. 선아는 돌연 알 수 없는 말을 던지고선 아까보다 더 진득하게 웃었다. 어쩐지 이질적인 그녀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