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두근두근 문예부
[밤12시에, 그 공원에서 보지.]
"나 참, 왜 하필 이런 시간에 불러내는 건지, 이해가 안 되네."
가로등만이 고스란히 발광하는 밤의 거리의 거닐며 그렇게 투덜댄다. 별빛이 완전히 말소된 밤하늘의 천장에는 흐릿한 그믐달이 걸려있었다. 슬슬 열두시쯤 되었을까.
바로 어제도 갔다 온 곳이라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집에 돌아가 퍼질러 자고 싶은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다리를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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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장차 이 재계의 제왕이 되어야할 남자다. 오로지 그것만이 너의 숙명이야. 너는 남들보다 우수하니까, 충분히 잘 따라올 수 있겠지?'
남들과 달리 어린 시절에 대해서 좋은 기억은 없다. 근엄한 표정을 지은 아버지는언제나 엄격하기 그지없었고, 배 다쳐가며 나를 낳은 어머니는 나는아랑곳 않고 오직 사치와 향락에만 관심 가졌다. 게다가 제왕학의 일환이라면서 가르치는 것들은 하나같이 알 수 없는 말들 투성이라서, 늘 복잡하게 꼬여있는 머릿속, 불만이 가득 응어리진 가슴속.
그래도 처음에는 나름 건실한 성격의 아이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이내 차츰 바뀌어갔다. 어린 자식이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짓을 할 때마다 망설임 없이 날아오던 아버지의 커다란 손아귀. 아이답게 울고 불며 소리쳐보아도 멈추지 않는다. 아버지의 폭력에는 용서가 없었고, 내 삶에는 행복이 없었다.
오로지 고통뿐인 삶. 헤어 나올 수도 없는 감옥 속에 갇힌 나는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를 증오하는 감정을 격렬히 느끼게 되었다.공교롭게도 그 감정의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의 부모였다.
그럼에도 나는 최대한 본래의 나 자신을 유지하고자 했다. 내가 싫어하는 그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할 수 있는 모든노력을 동원했다. 다행이도 아이는 참을성이많았고 의지 또한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의 주변에 있었다.
머리의 피가 어느 정도 마르자 나가게 된 첫 사교회장. 가면을 쓴 채로 내게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내 뒤에 있는 아버지를 바라볼 뿐, 나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조금 상심했지만, 그 정도야 금세 괜찮다고 여겼다. 나 자신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면 금세 사그라들 문제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고, 처음으로 사귄 친구가 실은 나의 가문과 커넥션을만들기 위해 나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바보처럼 이불 속에 파묻혀 한참을 울었다.
그 이후로 나는 바뀌었다. 아니, 최대한 그렇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항상 냉혹한 미소를 띤 채, 혀 밑에 칼을 품고 다니는 아이에게 다가오는 이는 그다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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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이 근처일 텐데…"
이미 몇 번 와본 경험이 있다고 너무 자만한 것일까. 감만을 의지해서 나아가다 아무래도 어둠 탓에 길을 잃은 듯하다.
당황과 함께 주위를 휙휙 둘러본다. 어느 샌가 나는 미로 같은 골목들의 사이에 갇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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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를 깎는 노력 덕분인지. 그도 아니면 타고난 재능 덕분인지. 거의 무슨 분야에서든, 항상 최고는 나였다. 개미떼 같이 모인 아이들의 무리에서 정점에 서는 것도 언제나 나였다. 다른 아이들은 나를 따라잡지 못했고, 나는 한껏 벌어진 그들과의 격차를 바라보면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말마따나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집안, 능력, 그 모든 것을 타고난 내가 보통의 인간들과 같다면, 오히려 그거야말로 이상한 소리 아니냐고.
무심코 떠오른 그 발상을 나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고, 점차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무감각해져서 대체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키가 크고, 나이를 먹고, 그러다 보니 어느 샌가, 나는 내가 증오하는 아버지와 똑같은 남자가 되어있었다.
타인의 존재가 가소로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발밑을 기어 다니는 그들의 모습이우스웠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을 가차 없이 짓뭉개고, 열심히 노력하는 녀석을 조롱했다.
이 나라에서 한 손안에 드는 재벌가를 등에 업은 나에게 아이들은 반항하지 못했다. 집구석에서 쌓인 울화를 애먼 그들에게 풀어도, 그저 조용히 받아들일 뿐.
나는 그 안일한 태도를 한심하다 여기며 더욱 더 그들을 혐오해갔다. 그리고 그 혐오가 끝에 달했을때, 나는 그냥 그들을 무시하기로 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땅 밑을 기는 벌레들과 어울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고고함과 미천함은 자석의 양극과도 같은 상극이니까.
바로 그때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나의 프라이드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간단히 짓밟은 작은 소녀가.
1학기가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치뤄진 중간고사. 교문에 걸린 순위표를 보고서 나는 경악했다. 언제나와 다르게, 맨 위쪽에 적힌 것은 나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 대신 적혀있던 것은 웬 모르는 여자애의 이름, 이시현이라는 낯선 세 글자.
그것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러 올랐다. 분노가 이성을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분명 그녀가 무언가 비겁한 수를 썼을 거라 생각했다. 인생 처음의 2등. 그렇지 않고서야 도저히 이 사태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의 반으로 찾아가 그녀에게 역정을 냈다. 대체 무슨 개수작을 부린 거냐고. 그러자 그녀는 곤란하다는 듯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음…그냥 네가 부족했던 게 아닐까?'
예리한 비수가 위축된 프라이드를 가차 없이 도려내었다. 그 가벼이 던진 문장은 분노하던 나를 망연하게 만들었다. 결국 아무런 말도 더하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나고, 나는 그녀를 멀리서 관찰하기 시작했다.
비단 학업뿐만이 아니었다. 운동, 커뮤니케이션, 교우 관계, 그녀는 집안이라는 요소를 빼면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나의 앞을내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엄연한 사실이자 내가 처음으로 맞닥트린 벽이었다.
허나 나보다 우수한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된다.
최고의 자리에 대한 갈망은 내 안에서 이미 집착이, 강박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라는 존재. 현실에서 눈을 돌려도, 멋대로 떠오른 공상이 그녀를 떠올리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녀만큼은 예외로 두자. 나보다 더 뛰어난 인간이 있을 리 없어. 저것은 단순히 사람 모습을 한 비정상이다. 인간도 아닌 비정상을 인정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따라서 예외인 그녀를 제외하면 나야말로 최고라고, 과부하가 된 머리는 그런 최악의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갈등하던 사이, 어느덧 나는 2학년이 되었고, 곧 그녀의 여동생과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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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키는 대로 걸음을 옮기다 깨닫고 보니, 나는 어딘가 익숙한 블록 타일 위에 서있었다. 일전에 아이스크림을 사러갈 때 그 양아치들과 만났던 곳이다.
"그러고 보니…"
이 쪽에서 좀만 더 걸어가면 선배와 만나기로 한 공원이 나오지. 원래 이런 음습한 길로 올 예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살았다. 한결 개운해진 마음으로 재차 다리를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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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은 도서관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때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냥 선반 위쪽의 책을 깨내려 애쓰는 모습에 변덕이 들어 조금 도움의 손길을 건넸던 것뿐이다. 공원에서 이루어진 두 번째의 만남에서부터 나는 그녀에게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놀의 공원. 나는 우연찮게 그녀를 보았고, 그녀도 벤치에 앉은 나를 보았다. 그러나 어째선지 그녀는 나를 못 본 체 하며 뻣뻣한 걸음걸이로 나를 지나쳐갔다. 의구심이 든 나는 떠나가는 그녀의 등을 불러세웠다. 가녀린 어깨가 움찔하고 흔들렸다.
'어머! 김성현 선배! 아이 매우 깜짝이야! 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습니…크흠?'
뭐지 이 녀석, 묘하게 반응이 어색하다. 혹시 이 녀석도 나를 좋아하는 여자애들중하나인 걸까? 그렇다면 시시하다고 밖엔 할 수 없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학생회장의 여동생이었지.
재미있는 기획이 번뜩하고 떠올랐다. 언제나 완벽한 학생회장이었지만 자신의 여동생에게 만큼은 지나칠정도로 달았다. 시도 때도 없이 여동생 얘기를 하는 걸 보면 뻔했다. 심지어 핸드폰 배경화면마저 여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런 소중한 여동생을 좀 갖고 놀다가 망가트린 다음, 학생회장에게 보여주면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어쩌면 그 온화한 표정에 드디어 금이 갈지도 모른다.
나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인성 존나 더럽네요.'
'…뭐?'
'아,선배 말하는 거에요.'
의외였다. 이 녀석,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었구나. 생각보다 훨씬 완고한 거절에 나는 한순간 숨을 삼켰다. 그리고 그녀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친구가 없나보군.'
'이, 있거든요! 그러는 선배야말로 친구 없지 않나요!?'
세 번째의 만남역시 기묘한 우연 아래 이루어졌다. 어쩌다 체육창고에 갇히게 된 우리. 무거운 침묵을 차마 참을 수 없었던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고, 이후 이루어진 대화 속에서 그녀는 지독하기까지 한 정론으로 나를 철저히 부정했다.
만일 그녀의 말이 옳다면, 내가 믿고 있던 것들, 지금까지의 내 인생, 그 모든 것들이 그릇되었다는 건가? 그런 일,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만 냉정을 잊고서 흥분해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게 지지 않고 정면에서부터 당당히 대항해왔다.
모두가 내 앞에 조아리고 있을뿐인데, 그런 사람을 만난 건 학생회장 이후로 무척이나 오랜만이라서, 말문이 턱하고 막혀버렸다.
누군가의 도움을 창고를 빠져나온 뒤, 상황을 천천히 곱씹어보자 분노가 일었다. 대체 뭐라고 그깟 존재가 나를 부정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동시에 의문 또한 들었다. 과연 그녀가 어디까지 날 부정할 수 있는지, 그 한도가 궁금해져서, 평소의 나답지 않은 과격한 방식을 사용했다.
마침 그녀에게 추근대던 양아치를 붙잡고 정당방위라기에는 과도할 정도로 주먹질을 했다. 당연히 그녀는 나를 말렸고, 나는 그 절박한 외침에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뭐냐, 이제 할 말이 없는 거냐? 시시하─’
'그만하라고 이 새끼야!'
정통으로 얻어맞은 오른쪽 뺨이 아팠다. 아니, 과장이 아니고 정말로 아팠다.
어찌 됐건 나보다 훨씬 작은 여자의 한 방에 쓰러진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빨갛게 부은 볼가에는 고통의 잔재만이 가득한데도,어째선지 마음에는 저 푸른 하늘같은 상쾌함의 한 조각이 남아있었다.
아아,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줄곧 이런 사람이 나타나길 바라고 있었다고. 누구라도 좋으니 아무나, 점점 엉망이 되가는 나를 멈춰줄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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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돌연 비강에 와닿는 비릿한 냄새에 걸음을 멈춘다. 누가 근처에 음식물 쓰레기를 무단 투기한 것인지. 어디서부터 오는 냄새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역한 비린내.
저쪽 골목에서부터 풍겨져오는 것일까? 잠시 멈춰 서서 그곳을 바라본다.
뭐, 아주 잠깐이라면 괜찮겠지. 괜한 호기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어서 나는 냄새의 진원지로 향했다.
=
'죄송합니다아!'
다음날, 다시 만난 그녀는 나를 때린 일을 솔직하게 사과해왔다. 솔직히 그때는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항상 턱을 뻣뻣이 치켜들고 자신에게 대들던 여자가 이리도 쉽게 허리를 숙이다니.
어지간히도 때린 것이미안했는지 그녀는 지난번보다 훨씬 유해져있었다. 어린아이 같은 나의 응석을 받아주고, 이런 나라도 옳은점은 있다고 말해주었다. 서로 대화를 나누고서, 생애 처음으로 허리를 숙여 사과란 것도 해보았다. 그녀의 능글맞은 웃음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썩 불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친구란 대등한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지. 그렇다면 내가 그녀와 대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부디 친구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하면 우리들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녀의 얼굴을 훔쳐볼 때마다 두근거리는 이 심장. 이 감정이 연애 감정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그것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추억의 조각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와 같이 기분 좋은 설렘이었다.
그래, 그녀는 순수하던 나의 어린 시절과 닮아있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지나치게 올곧은 점이, 마치 과거의 아련한 기억을 비디오로 돌려보는 것 같았다.
지금 여기서 친구가 되자고 말해볼까? 그렇지만 역시 부끄러운 것은 부끄럽다. 뭐, 굳이 여기서 말할 이유는 없겠지.
부끄러우니 밤에 따로 그녀를 불러내어서, 따로 얘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오밤중에 약속을 잡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것도 같지만 혹 다른 사람이 볼까 무서웠다.
그러니까 그때가 되면, 부디 나와 친구가 되어달라 부탁하자.
그리고 언제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 흘러가고, 밤이 되어 나는 그녀와 만나기로 한 공원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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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길을 올라가 커브를 돈다. 조금 전부터 계속 풍겨오던 비린내는 더욱 강해지고,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
그 순간, 경직되는 몸.
"아…아?"
얼빠진 소리가잇달아 입 밖으로 나온다.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만다. 차갑게 식은 아스팔트가 엉덩이를 간지럽힌다.
희미한 달빛 아래, 좁은 골목길의 한중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붉게 물들어서, 한낱 고깃덩이가 되어버린 살점을 껴안은 채 밤바람에 흔들리듯 위태로이 서있는 소녀의 모습.
그것은,
"선아…야?"
"안녕? 좋은밤이네. 그치?"
익숙한 모습을 띤,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