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두근두근 문예부
"…"
고요하면서도 칼날같이 매서운 침묵이 흐른다. 시원한 바람이 유독 차갑게 느껴지는 지금.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 선아는 동그랗게 뜬 두 눈을 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이 자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가만히 서있으면서도 비틀거리는 그녀는, 그녀인지를 쉽사리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붉게물들어 있었다.
“아아…안녕.”
새빨갛게 물든 선아의 입술이 고운 호선을 그린다. 그 장면을 머리의 한구석으로 밀어 넣으면서 나 또한 애써 웃어 보인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조금 장난이 심하지 않아?"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 손을 짚어가며 뒤로 엉금엉금 물러난다. 추한 몰골이라는 것은 나도 알지만, 힘이 빠져 차마 일어날 수가 없다. 아무리 끔찍한 광경이라지만 겨우 장난에 지나지 않는데? 왜?
곳곳에 튄 고기조각들과 사방에 만연한 피 냄새가 지독하리만치 그로테스크하지만, 그래봤자 소품에 불과하다. 그래봤자 그냥 공을 좀 지나치게 들인 장난.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부여잡고서 미소를 유지한다.
그렇게 선아의 얼굴을 바라본다. 언제나처럼 해맑은 웃음을 띤 그녀의 얼굴이 그나마 내게 안심을 주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잔인한 선고.
"장난? 아직도그렇게 믿고 있는 거니? 불쌍하네. 원래 여기서 드러낼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면 너에게 현실을 보여줄게."
선아의 입꼬리가 찢어질 정도로 올라간다. 예쁜 색조의 눈동자를 흉악하게 번뜩이면서, 단정하던 얼굴이 엉망이 되도록 일그러진다. 이윽고 짧지만 강도 있는 변신을 마친 그것은 인간이라기 보단 괴물에 가까웠다. 단지 표정과 분위기가 조금 뒤바뀐 것만으로도.
익숙하게 말을 나누던 얼굴. 오늘도 함께 웃었던 얼굴인데, 떨림이 멎질 않는다. 평소의 그녀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습에, 분위기에, 냄새에 작은 신음소리조차 새어나오지 않는다. 고장이 나버린 심장과 가빠지는 호흡.
다시금 뒤로 엉금엉금, 살이 까지는 것 따위는 아랑곳 않고서 기어간다. 그런 내 한심한 모습이 즐거운 듯 그녀는 순진한 꼬마아이처럼 꺄르르 웃었다. 그리고서 피웅덩이의 속을 맨손으로 거칠게 헤집었다.
좁은 골목 안에 늘어나는 붉은 자국. 신경질적인 손길에 질척한 핏방울이 사방으로 흩날린다.이내 원하는 것을찾아낸 듯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찾았다."
그녀가 웃는다. 소녀답게 청명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고양이 같은 눈매가 유혹하는 창녀처럼 샐쭉하게 휘어진다.
아직도 일어서지 못한 나를 돌아본 선아의손아귀에는 익숙한 얼굴, 아니 머리가 들려있었다. 밤하늘을 흡수한 듯 새까만 흑발은 붉은 액체를 잔뜩 빨아들인 후라 평소보다 더욱 새까매보였다.
굳이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알아차리고 말았다. 남자임에도 요염한 기가충만한 미모, 그러나 지금은 절규하는 듯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의 앞면 역시 붉게 점철되어 있었지만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그야 당연하다. 아무리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내가 바보 같다 하더라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바로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나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던 사람을.
"어때, 익숙한 얼굴이지? 응? 어디서 본 것 같지?……원래 이런 걸 챙겨두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너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번만큼은 온전히 남겨놨어. 대체 무슨 재수가 붙은 건지, 어쩌다 여기서 바로 보여주게 되었지만 말이야."
"우,우…"
"그래도 모처럼 정체를 밝히는 거니까. 짜자잔! 이라고 해야 할까? 항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살인범의 정체가 이렇게나 가녀린 소녀라니. 조금 뻔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두근두근한 전개지?"
"…우웨에엑!"
속이 쓰리고 시야가 가물가물하다. 위액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그래서 무심코 토악질을 해버렸다. 지금까지 꿍쳐둔 역겨움이 식도를 타고시원하게 역류했다.
목이 막힌 듯 한참을 켁켁거리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움켜잡고, 고개를 쳐들어 앞을 본다. 그녀는 이 끔찍한 지옥을 만든 장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환한 미소를 띤 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동시에 등줄기 위로 달리는 오싹한 소름. 쓰디쓴 위액을 꿀꺽 삼키고, 굳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간신히 움직인다.
"그, 그만해…장난이 너무 심하잖아. 게다가 살인범이라니, 장난이라도 그런 말은…"
"설마 했지만 아직도 부정하는 거야? 바보 같네. 그래도 귀여워."
그녀의한손에 들려있는 머리통이 방울처럼 딸랑딸랑 흔들린다. 그에 따라 열렸다가 닫혔다가 하는 입가, 푸르게 변색된 혀가 툭 튀어나온다. 그녀는 장난스런 손길로 그 혀를 쭉 잡아당겼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는 그만하라니까!……마, 만약 그렇다고 해도 어째, 어째서……이런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어째서라니, 오히려 이 쪽이 묻고 싶은데, 그런 싸구려 질문은 어째서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 이유 같은 게 꼭 필요하니?
그냥 기분 좋으니까 죽이는 것뿐이야…라고는 해도, 이 녀석만큼은 좀 특별해. 왜냐면 줄곧 눈에 거슬렸거든. 짜증나니까──그래서 죽여버렸어."
실로 명쾌한 답변에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입은 물론이고 머리까지 굳어버려서, 한순간 '과연, 그런 거였구나.'하고 무심코 납득해버린다.
이게 정말로 현실이라고? 이딴 쓰레기 같은 것이 바로 진실이라고?
머리가 어지럽다. 다시 한 번 토악질을 뱉을 것 같다. 이게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이 모든 것이 장난이었으면 좋겠다. 언제나처럼 활짝 웃으면서 장난이 좀 지나쳤다고, 모든 건 그저 나를 놀리기 위한 장난이었다고, 그렇다면 화는 나도, 지금처럼, 지금처럼…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희망의 끝을 붙잡고 버틴다. 그야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현실을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뭐가 됐건 간에 이미 부질없는 짓거리.
예정된 절망에 지나지 않았던 희망은, 이윽고 그녀가 지은 비틀린 웃음에 산산조각 부서졌다.
"어때? 나의 취미 생활을 처음으로 보게 된 감상은?"
"…꺼져! 꺼져버리라고!!"
표류하는 광기가, 농후한 죽음의 농도가, 정신을 돌게 한다. 반쯤 미쳐서 크게 소리를 지르고 악을 쓴다.그녀 또한 이렇게나 격렬한 반발을 예측하지 못했는지 큼직한 두 눈이 토끼처럼 치떠졌다.
"우린 친구 아니었어? 친구한테 그런 심한 말을 하면 안 되지, 시아야."
"네가 그런 녀석인 걸 알았더라면 애초부터 친구가 되지도 않았어! 됐으니까 얼른 꺼지라고 시발!"
"흠…"
있는 힘껏 목청을 써보지만 아랑곳 않는다. 오히려 서서히 좁혀드는 거리. 어떻게든 도망치고자 몸을 일으켜보지만, 이미 힘이 풀린 다리로는 일어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술에라도 취한 듯 제멋대로 비틀거리는 두 다리.
"겨우 알아채줬구나, 라고 생각해서 기뻤는데, 그럼 어쩔 수 없네."
태평한 어조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동시에 눈앞에서 하얀 섬광이 번뜩였다.
"─!!"
다음 순간, 팔뚝을 뚫고 뼈마디에 박히는 날카로운 무언가. 단순히 무언가를 던지는 그 행동을 시인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인식은 뒤늦었고, 고통은 빨랐다.
찢겨진 상처를 통해서 핏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린다. 고개를 내려보니, 나의 살을 찢은 것은 어디에서나 볼 법한 주방용 식칼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순간, 입가를 뚫고 새어나오는 짐승 같은 절규. 꿈틀거리는 동맥을 건드린 건지 핏물이 분수처럼 치솟고, 새하얗게표백되는 머릿속.
어째선지 머리가 멍하다. 다리의 힘이 완전히 풀려서 골목의 벽에 등을 기댄 채 스르르 주저앉는다. 흐릿하게 물든 시야를 통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그녀가보인다. 한 손에는 새로 꺼낸 식칼이 쥐어져있다.
"친구가 아니라고?──죽여버릴 거야. 한 번만 더 그렇게 말한다면, 아무리 너라도 진짜 죽여버릴 거니까."
고통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한심스럽게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서서히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과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린다.
그러자 고요한 어둠이 찾아오고, 뚜벅이는 발소리가 더욱 커진다. 하지만 이내 그 발소리마저 뚝 끊긴다.
그러자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사람의 기척,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간질이는 숨결. 몸서리가 쳐진다.
"저기, 우리는 친구 맞지? 우린 친구잖아, 그렇지?응?"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누가 너 따위하고…"
그 부정의 말은 대체 어디에서 우러나온 용기였을까.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고 머릿속은 공포에 잠식당해버렸건만, 눈앞이 잔뜩 흐려져 가는 와중에도, 당돌하게 움직이는 혓바닥.
그 말이 끝나자마자 큿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오고…아, 이번에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대기를 가르며 다가오는 바람소리, 그것은 분명히 내 반대편 팔을 노리고 짓쳐들고 있었다.
몸 속의 시계가 뚝딱뚝딱 울린다. 끝을 알리는 궤종은 웅장한 소리를 낸다. 그렇게 내 생명의 임계선은,침착하면서도 선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판결은, 아마도 죽음.
"─커헉!"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부웅하고 무언가가 휘둘러지는 소리, 이어서 울리는 둔탁한 타격음.
이내고통에 찬 비명이 내 귓가를 때렸을 때, 나는 겨우 눈을 떴고 내 앞에 우뚝 서있는 작은 등을쳐다볼 수 있었다.
"뭘 멋대로 죽이겠다는 거니? 역겨운 쓰레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