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화 〉두근두근 문예부 (26/73)



〈 26화 〉두근두근 문예부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비틀비틀, 마치 유령처럼 어두운 거리를 헤쳐 나간다. 달빛이 등대가 되어, 그에 이끌리는 두 다리.

"저기, 언니."


머리는 여전히어질어질하고, 속은 메슥거리고, 시계는 희끄무레하고, 심장은 아직도 쿵쾅거리고, 밑바닥의 경계선에 반쯤 고개를 들이민 최악의 상태.

갈라진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나의 탁한 부름에 조금 앞을 나서던 작은 형체가 흠칫하고 멈춰 선다. 나도 언니를 따라 발을 멈추고, 차갑게 언 정적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쌩한 밤바람.

또 다시 흐트러질 듯한 마음에 오른손을 으스러지도록 쥔다. 투둑하고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축축한 것이 매끈한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그러니?"


언니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렇게 답했다. 허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파르르 떨리는 좁은 어깨. 왜일까. 문득 그 모습이 웃겨서 바보같이 웃는다.


"경찰서, 갔다 올게."


그리고 그 웃음에, 조금 용기가 생겨났다.

더 이상 떨리지 않는 목소리. 자신을 내서 말해보았건만, 언니는 한참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두려움은 남아있다. 그것이 설사 가루만한 소량일지언정, 한번 심어진 씨앗은 언제 다시 자라서  마음을 얽매여올지 모른다. 그러니 모처럼 각오가 선 지금 이 순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범행을 고발당한 범죄자가 보복을 한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무려 스무 명을 연달아 살해한 살인귀라면, 그럴 가능성이 더더욱 높다고 봐야겠지. 희귀한 사례이지만, 여차하면 일이 잘못 풀려서 경찰이 체포에 실패하고, 곧장 우리 집을 습격해올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을 배제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한번 세운 각오를 뒤집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이상의 피해자를 내고 싶지 않을 뿐더러, 죽음에 집어삼켜진 선배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처참히도 흉측히도 무참히도 일그러진  얼굴이. 비록 이젠 희미한 잔상이지만, 눈을 감고 어둠이 도래하면 다시금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 기억은 아마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어 나를 괴롭힐 테지. 당장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위장을 역류하는 토기. 이것은 일종의 각인이다.

선배가 죽은 것은 명백히 나 때문이었다. 나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나의 탓이었다. 괜히 내가 선배의 눈에 띄어버려서, 그가 나를  공원에 부르고, 그래서 죽어버렸다. 어설픈 변명을 둘러대 봤자 다가오는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래,  때문에 선배는 죽었다.

만일 이대로 방치하다가 또  명의 희생자가 나타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작 상상이라지만 그때가 되면 나는 도저히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  같지 않다.

아직도 비강에 생생히 남아있는 피의 잔향. 죄책감에 짓눌리는 게 위선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조금 두려울지라도, 무거운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

"…다녀오렴. 걱정 말고."

조용한 목소리로, 언니는 그렇게 말했다. 언니는, 그래, 언니는 항상 그랬다. 잘 안 보이는 곳에서조차 항상 날 지지해주고 있었다. 이 세계와 전 세계의 괴리감에 미쳐있을 때도, 거짓 같은 현실에 대한 한없는 회의에 빠졌을 때도, 해소되지 않는 향수에 신음할 때도, 그리고 지금도, 내가 위축되어있을 때마다 손을 내밀어준 것은 언제나 언니였다.

더 이상 말이 없는 등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이제 대화는 되었다. 비록 짧은 대화였지만, 충분한 용기를 받았다. 나는 천천히, 이윽고 빠르게 두 다리를 번갈아 움직였다.

"강선아…"


인정하자. 그녀는  친구였다. 그녀와 둘이 있는 시간은 즐거웠고, 가족을 제외하면 누구보다도 친밀한 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돌이킬  없는 악이다. 그 살인마는 선배를 죽이고, 그 외에도 무수한 희생자들을 낳았다. 이대로 방치할  더 많은 죽음을 부를 것이란 건 자명한사실. 마치 결말이 탄로 난 영화처럼.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그녀를 용납할 수 없다. 설령  결과가 얼마나 끔찍한 것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녀라는 끔찍한 괴물을 방치하는 것만큼은 할  없다,

마침 이 오른손에는 그녀를 몰아넣을 증거가 있다. 바닥에 손을 짚고 주저앉았을 때 묻어버린 선배의 피가, 내 증언과 결부되어 그녀의 범행을 확정지어줄 터다.

그런 확신을 품은 채 나는 이 구역의 담당 경찰소로 달려갔다.

=



"뭐, 소용은 없을 테지만."


힘차게 달려 나가는 동생의 등을 시현은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경찰이라, 정말 그런 것들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무리 주도면밀한 범죄자라도 인간인 이상 조금의 흔적은 남기 마련이다.언론과 경찰의 시선이 스폿라이트 되는 와중에 오직 자기 혼자 힘으로 스무 명을 연달아 죽이고 다녔을 가능성은 사실상 만무하다.

한국의 치안은  정도로 병신 같은 수준이 아니니까. 무엇보다, 겨우 신고 따위로  살인마가 잡힐 수 있다면 이미 옛적에 정체를 알아챈 시현이 그 살인마를 붙잡았으리라.

"그래도, 다행인가."


오늘은 이런저런 수확이 많았다. 처치곤란한 부회장도 남의 손을 빌려 없애고, 딱 좋은 타이밍에 등장해서 동생에게 더한 신뢰를 심어줄 수 있었다. 게다가  짜증나는 년도 모처럼 흠씬 두들겨 패줄  있었다. 마무리가 어설퍼 반격당하긴 했지만.

아무튼, 정말로 기분 좋은 날이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산뜻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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