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막간
황혼에 저물어가는 주홍빛의 하늘은 언제나의 일상이지만, 그것은 볼 때마다 매번 새로운 감상을 불러일으키고는 한다. 마치 소멸 그 자체를 지켜보는 듯, 스러져가는 모든 것들을 제 따스한 빛으로 감싸 안는 모습.
한때는 꺼지지 않을 것만 같던 찬란함도 종국에는 쇠해져 어둠이 그것을 먹어치우고, 다 먹히고 난 연후에야 새로이 잉태되어, 또 다른 시작을 낳는다.
그녀는 창밖으로 향한 시선을 거두고 손에 든 와인글래스를 탁자 위에 두었다. 술이 조금 들어가서일까. 시름 같은 감상이 기분을 잠기게 만들었다. 마치 다른 무언가가 자신을 조종하는 느낌이라, 그녀는 그 감각을 썩 불쾌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즐겼다. 어차피 인간, 제 몸 하나 지배하기에도 벅찬 법이니까.
"아가씨, 정말로 혼자서 한국에 가실 생각입니까."
휘황찬란한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옆에 부복하고 있던 남자가 돌연 입을 열었다. 묵직한 중저음이 화려하게 치장된 방안에 웅웅 울렸다. 각이 진 이목구비와 2미터는 족히 될 듯 거대한 신장은, 반듯하게 차려입은 정장에도 불구하고 그 압도적인 인상을 지우지 못했다.
"예, 그 남자 없이도 괜찮아요. 사고로 다친 사람을 무작정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정말 혼자라기엔 당신 경호팀들이 따라붙잖아요?"
"허나…"
"그 얘기는 이제 그만. 애초에 말했잖아요? 그 남자에게 그렇게까지 특별한 감정은 없다고."
그녀는 남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벌꿀 같은 금발에 비취색의 눈동자, 뚜렷하게 조각된 이목구비. 마치 동화 속 전형적인 왕자님 같은 모습. 그 글러먹은 성격만 아니었더라면, 정말 왕자님이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았을 텐데.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이국에의 장기 체제가 취소된 자신의 약혼자. 가문이 정해준 약혼자라고 해서 그를 혐오하는 것은 아니나, 단순한 호감 그 이상의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진열장의 인형을 선망하는 소녀의 마음 정도랄까. 그 남자는 외형이야말로 그녀가 꿈꾸는 동화 속 왕자님에 완벽하게 들어맞았지만, 그 경박한 성미며 바람기는 그녀가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어째서 그런 곳까지 가시려는 겁니까?"
"이곳은 영 심심하니까요."
언제까지고 으리으리한 저택 안에서 뒹구는 것도 질린다. 이곳에서의 삶은 누구나가 동경할 만큼 화려했으나, 바꿔 말하면 결국 그 뿐이니까. 그녀는 시시하다는 듯이 말했다. 무뚝뚝한 어조에서는 권태로움이 흥건히 묻어나왔다.
"…정 그러시다면, 저는 더 이상 말을 삼가겠습니다. 조금 전의 무례, 부디 용서하시길."
"괜찮아요."
전용 경호원인 남자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그녀는 고개를 틀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주황빛에 저물어가는 하늘이 보였다. 과연 그곳에서 보는 하늘도 이와 똑같을까?
뭐, 사람 사는 곳이 어디나 똑같지. 겨우겨우 허락받은 출가이지만, 그녀는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딜 가고 무얼 겪던지, 결국 이 단조로움이 사라질 일은 없을 테니. 다만 새로운 즐길 거리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소소한 기대를 품은 채, 그녀는 오늘도 똑같은 하루를 그저 그렇게 흘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