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화 〉막간 (28/73)



〈 28화 〉막간



황혼에 저물어가는 주홍빛의 하늘은 언제나의 일상이지만, 그것은 볼 때마다 매번 새로운 감상을 불러일으키고는 한다. 마치 소멸 그 자체를 지켜보는 듯, 스러져가는 모든 것들을 제 따스한 빛으로 감싸 안는 모습.

한때는 꺼지지 않을 것만 같던 찬란함도 종국에는 쇠해져 어둠이 그것을 먹어치우고, 다 먹히고 난 연후에야 새로이 잉태되어,  다른 시작을 낳는다.

그녀는 창밖으로 향한 시선을 거두고 손에 든 와인글래스를 탁자 위에 두었다. 술이 조금 들어가서일까. 시름 같은 감상이 기분을 잠기게 만들었다. 마치 다른 무언가가 자신을 조종하는 느낌이라, 그녀는  감각을 썩 불쾌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즐겼다. 어차피 인간,  몸 하나 지배하기에도 벅찬 법이니까.

"아가씨, 정말로 혼자서 한국에 가실 생각입니까."


휘황찬란한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옆에 부복하고 있던 남자가 돌연 입을 열었다. 묵직한 중저음이 화려하게 치장된 방안에 웅웅 울렸다. 각이 진 이목구비와 2미터는 족히 될 듯 거대한 신장은, 반듯하게 차려입은 정장에도 불구하고 그 압도적인 인상을 지우지 못했다.


"예,  남자 없이도 괜찮아요. 사고로 다친 사람을 무작정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정말 혼자라기엔 당신 경호팀들이 따라붙잖아요?"

"허나…"

"그 얘기는 이제 그만. 애초에 말했잖아요? 그 남자에게 그렇게까지 특별한 감정은 없다고."

그녀는 남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벌꿀 같은 금발에 비취색의 눈동자, 뚜렷하게 조각된 이목구비. 마치 동화 속 전형적인 왕자님 같은 모습. 그 글러먹은 성격만 아니었더라면, 정말 왕자님이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았을 텐데.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이국에의 장기 체제가 취소된 자신의 약혼자. 가문이 정해준 약혼자라고 해서 그를 혐오하는 것은 아니나, 단순한 호감 그 이상의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진열장의 인형을 선망하는 소녀의 마음 정도랄까. 그 남자는 외형이야말로 그녀가 꿈꾸는 동화 속 왕자님에 완벽하게 들어맞았지만, 그 경박한 성미며 바람기는 그녀가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어째서 그런 곳까지 가시려는 겁니까?"

"이곳은 영 심심하니까요."

언제까지고 으리으리한 저택 안에서 뒹구는 것도 질린다. 이곳에서의 삶은 누구나가 동경할 만큼 화려했으나, 바꿔 말하면 결국 그 뿐이니까. 그녀는 시시하다는 듯이 말했다. 무뚝뚝한 어조에서는 권태로움이 흥건히 묻어나왔다.


"…정 그러시다면, 저는 더 이상 말을 삼가겠습니다. 조금 전의 무례, 부디 용서하시길."

"괜찮아요."


전용 경호원인 남자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그녀는 고개를 틀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주황빛에 저물어가는 하늘이 보였다. 과연 그곳에서 보는 하늘도 이와 똑같을까?

뭐, 사람 사는 곳이 어디나 똑같지. 겨우겨우 허락받은 출가이지만, 그녀는 그리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딜 가고 무얼 겪던지, 결국 이 단조로움이 사라질 일은 없을 테니. 다만 새로운 즐길 거리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소소한 기대를 품은 채, 그녀는 오늘도 똑같은 하루를 그저 그렇게 흘려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