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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29/73)



〈 29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수업 시간. 칠판 위로 분필이 또각또각 움직이는 소리 말고는 거의 적막에 찬 교실. 창가의 맨 끝 자리에서, 그녀는 옆의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푸른 기운이 만연한 하늘에 솜사탕 같은 구름이 듬성듬성 나있다.

어제는 장대비가 그리도 퍼붓더니 오늘은 날씨가 좋다. 따사롭게 내려쬐는 햇빛에, 그녀는 살짝 턱을 치켜들었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흑발이 햇빛을 흡수하여 은은하게 빛났다. 붉고 도톰한 입술은 엄지를 약하게 깨물고 있었고, 구슬처럼 투명한 동공은 흘러가는 구름을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채, 오늘의 날씨만큼이나 평온하기 그지없는 두 눈동자.

마치 물조차 담겨있지 않은 유리병을 보는 것 같다.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금방이라도 깨질 듯이 불안하다.

꿈, 금세 산산조각 날 걸 알면서도 빠져들게 된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자체였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선아는 픽하고 실소를 지었다.

그런 망상이나 하는 자신을 실없다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괜찮은 비유라는 생각이 든다. 선아는 교과서 귀퉁이를 살짝 찢고서, 그 위로 볼펜을 대충 휘갈겼다. 날씬한 고양이처럼 상큼한 매력이 있는 외모와는 다르게 선아는 지독한 악필이었다.


"알지?"

"…"

급조한 메모를 그녀에게 전달한다. 어깨가 툭툭 쳐지자 그녀는, 메마른 눈으로 옆자리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선아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선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잠시 동안 그렇게 정지 버튼을 누른 듯 굳어있던 그녀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뒤로 밀린 의자가 바닥에 쓸렸다.


"저기, 선생님…"

"왜 그러니?"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런데, 보건실에서 잠깐만 쉬다 오면 안 될까요."

"그러렴. 대신 보건실에서는 다다음수업 시작하기 전까지만 쉴 수 있는  알지? 너무 아프면 조퇴하고."

"선생님, 왜 반장은 되고 저는 안 되는 건가요─"

"으이구, 네가 반장만큼 성적을 잘 받으면 내가 말을 안 한다. 꾀병부릴 생각 말고공부나 해!"

학년 제일의 모범생이라는 평판 덕분일까. 변변찮은 변명이었지만, 젊은 여담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정작 그녀에게 있어서는 결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선아가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에 그녀는 어떠한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다.

"시아 정말로 아픈 것 같은데…제가 같이 가줘도 될까요? 선생님."


피처럼 새빨간 머리카락.  아래의 새하얀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걱정하는 감정을 드러낸 가면에 덮어씌워져 있다. 허나  아래의 진면목을 눈치  수 있던 건 그녀 뿐. 간절하게까지 보이는 요청에 담임은 별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선아는 재빠르게 그녀의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뾰족한 손톱 끝이 하얀 손등을 은근히 짓눌렀다. 미약한 고통이 차고 올라왔지만, 그녀는 끝끝내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가자, 시아야."

"…"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서, 단지 앞장서는 소녀의 손에 질질 이끌려갔다.


=

"계세요~?"

평소보다 한결 높아진 목소리가 말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전무. 잠시 멈춰 서서 보건실 안을 둘러본 선아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억세게 틀어잡은 채로 척척 발걸음을 옮겼다.

보통이라면 선생이 한 명쯤 지키고 있을 테지만, 지금의 보건실에는 아무도 없다. 양호 선생은 이 맘 때가 되면 담배를 땡기러 교사용 휴게실에 틀어박히니까.

아무튼 진짜 아파서 온 것도 아니고, 그 사실을 알기에 기껏 꾀병을 부려가면서까지 여기  것이다. 정말로 아무도 없는 건지 선아는 텅 비어있는 내부를 다시 한  훑고서, 아까 전부터 가만히 끌려오고 있을 뿐인 그녀를 보건실 한구석에 마련된 침대로 이끌고 갔다.

"크흣…!"

-끼익

거친 손놀림으로 그녀를 내던진다. 실이 풀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녀는 풀썩하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비교적 가벼운 그녀였지만, 낡아빠진 침대의 쿠션은 어김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검고 윤나는 소녀의 머리카락이 비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드넓게 흐트러진다. 그것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면서, 선아는 침대 주위에 간이로 설치된 커튼을 닫았다. 그러자 다소 어둑한데다가 비좁기는 하지만, 한순간에 둘만의 공간이 형성되었다.

다음 순간, 선아의 몸 역시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개의 여체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포개졌다

"…"

그리고는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왜냐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직 거칠고 달뜬 짐승의 숨소리만이 커튼으로 둘려쳐진 좁은 공간을 메꿨다. 소녀는 그녀에게 굶주린 짐승처럼 달려들었고, 그녀는 강간과도 같은 그것을 익숙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하아…치, 친구, 우린 친구 맞지? 응? 시아야? 이시아?…"

하얀 와이셔츠를 풀어헤치고, 똑같이 새하얀 살결을 더듬거린다. 한 손으로 잡기 버거울 정도로 봉긋한 가슴께. 밋밋한 흰색의 속옷 안으로 손을 넣어 말랑한 살점을 맘껏 주무른다. 다른  손은 그녀를 치맛자락 사이로, 부드러운 넓적다리 위를 기어 다니는 다섯 손가락.

그렇게 그녀를 탐하는 손놀림은 무척이나 능숙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건지, 갓 고등학교에 입학한 여고생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선아, 아니 여자는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달아오르게 하고 자신 또한 달아오를 수 있는지, 훤히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포르노랑은 달라서, 발정제라도 먹지 않는 이상 강하게 혐오하는 상대에게서 쾌락 따위를 느낄 리가 없다. 기분 나쁜 중지손가락이 어느  팬티를 옆으로 젖혔지만, 그녀는 평온한 얼굴로 두 눈을 살며시 감았다. 끝까지 저항할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저항이 무의미하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어차피 이제는 익숙해진 참. 그녀는 밀어닥치는 파도를 그저 고요하게 받아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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