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그럼…내일 또 보자!"
쾌활한 작별인사, 그리고 쪽. 볼가에 맞닿는 부드러운 감촉. 장난스런 웃음기를 머금은 붉은 머리칼의 소녀가 그렇게 가벼운 입맞춤만을 남기고서 떠나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소녀의 두 발은 경쾌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소녀였지만, 항상 이 시간만 되면 정해진 듯이 곧장 집으로돌아갔다.
노을로 인해 붉게 타는 이 거리엔 사람이 얼마 없다. 혼자 남게 된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소녀의 따스한 입술이 남기고 간 자취를 아련한 듯이 훑었다. 그러다가, 창백한 손등 위로 푸른 정맥이 서서히 돋아났다.
손가락이 굽혀지고, 볼가를 긁었다. 손톱이 찍어 누른 부분이 음푹 패였다. 맘만 같아서는 날을 세운 손톱으로 이 피부를 뜯어내고 싶었다. 피가 흐르고 고통이 신경을 덮쳐도 아랑곳 않고서, 살점 채로 송두리 뜯어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의지조차 금세 사그라들고 만다. 쇠해진 기력. 결국 그녀는 치켜들었던 팔을 힘없이 늘어트렸다.
아침에는 양호실에서, 방과 후에는 아무도 쓰지 않는 4층 여자 화장실에서. 강선아는 오늘도 역시 장소를 가리지 않고서 그녀의 몸을 미친 듯이 탐했다. 거의 짐승처럼, 오로지 욕망만을 쫓아 그녀라는 존재를 끝없이 갈구했다.
적응했기 때문인가. 처음에 느꼈던 분노는 차츰 줄어들었다. 대신 자신의 몸을 더듬던 추접스런 손길은 아직까지도 뇌리에 선명했다. 정사가 끝나고 몇 십 분이 지나고도 남아서 요동치는 잔열. 그야말로 쾌락에 찌든 몸이 공기 빠진 풍선처럼 비틀거렸다.
온몸 곳곳에 깊이 새겨진 더러움. 잠시간 그 여운을 참다가, 이내 그녀는 반대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여름인데도 차갑게 느껴지는 바람이 교복 입은 몸을 가차 없이 때렸다.
"다녀왔어."
완전히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도착한 집 앞. 열쇠로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선다. 동시에 도도도 들려오는 작은 발소리, 작은 인형이 자신의 앞에 서자,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긴 앞머리가 자연스레 흘러내리며 눈가 위로 짙은 음영을 드리운다. 탁한 빛깔의 눈동자는 검은 머리칼 사이로 희미하게 점멸했다. 초췌한 그 모습에 그녀의 작은 언니는 가녀린 어깨를 흠칫하고 떨었다.
"그, 저녁, 준비했는데…"
"…"
"모처럼 시아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차렸으니까. 와서먹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힘들다면 설거지도 내가 다 할 테니까."
아담한 체구에 맞게 아담한 얼굴이 자신을 조심스레 올려다본다. 분명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은 제 쪽인데도, 동그랗게 치뜬 두 눈은 거절이라는 불안에 격렬히 떨린다. 마치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모양새. 주방에서 요리를 하다 급하게 나온 것인지 채 벗지 못한 앞치마에는 밀가루 같은 하얀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변해버린 자신과 달리, 언니는 언제나 한결같다. 하얀 종이를 다시 한 번 더 표백한 것 같이, 그저 깨끗하고 깨끗해서 그 앞에만 서면 자신의 더러움을 무의식적으로 자각하고 만다. 치욕스러웠던 그때의 기억들이 자꾸만 소생하고 만다. 그래서인가. 그녀는 자신을 쫓는 애처로운 시선을 애써 피했다.
저절로 대조되는 자신과 언니의 모습. 초라함과 순수함,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죄를 범하는 기분이다. 자신이란 더러운 존재가 깨끗한 그녀마저도 더럽히는 느낌. 그녀는, 그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됐어."
바싹 말라비틀어진 두 입술을 혀로 훑는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밥부터 준비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녀는 욱신거리는 심장의 통증을 무시해내면서 짧은 한 마디를 힘겹게 내뱉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어낸 태연한 얼굴로자신의 언니를 지나쳤다.
그 순간, 작은 손이 삐져나와 교복 소매를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감촉에 그녀는 전신을 경직시켰다.
"며칠 동안 저녁 먹은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됐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꺄앗!"
순간적으로 휘둘러진 팔과, 그에 밀쳐져서 주저앉아버린 작은 소녀……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양 눈을크게 떴다. 두 눈을 통해 보이는 모든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무심코 그대로 주저앉아 토악질을 할 뻔 했다.
흥분 때문에 수축한 동공으로 소중한 존재를 손찌검한 자신의 손을 멍하니 들여다본다. 심장이 쿡쿡 쑤시다 못해 터질 것 같이 팽창했다.진흙 같이 질척거리는 죄악감이 목울대를 조여와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시아야…"
"미, 미안…"
굳이 이런 짓까지 해야 됐던 걸까. 그것도 항상 자신을 아껴주었던 제 누이에게.
자신이 힘들다는 것은 어떠한 변명도 되지 못한다. 언니 또한 이런 자신 때문에 힘든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어쩔 수가 없었다. 치가 떨려 어금니를 악 깨문다.
결국, 그녀는 간절하디 간절한 부름을 뒤로 하고서 도망치듯 그 자리를 황급히 빠져나왔다.
"하아…하아…"
등 뒤에서 쿵, 하고 닫히는 방문.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이 어둡다. 문고리를 한 바퀴 돌려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댄 채로힘없이 주저앉았다. 전력 질주라도 한 것 마냥 거친 숨을 몰아쉬자 힘 빠진 몸이 해파리처럼 축 늘어졌다.
무력하게 주저앉은 채, 그녀는 양 무릎을 그러모았다. 그리고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리 생각했다. 강선아의 추잡한 욕망도, 자신이란 존재를 틀어막는 관계의 쇠창살도, 이제는 마냥 달관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믿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정말로 익숙해진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상처와 마주보길 포기했을 뿐이다. 연약한 마음은 그대로인데, 다만 회피하는 방법을 배웠을 뿐이다. 좁디좁은 마음의 한 구석에 틀어박힌 자신은 자신조차 모르도록 숨죽이며 울고 있었다.
그래도 버틸 수만 있다면, 그거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입게 될 상처 따위, 방법따위 아무래도 좋은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언니를 마주할 때마다, 오직 자신에 대한 걱정밖에 담겨져 있지 않은 그 눈동자가 자신을 향할 때마다 깨닫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어릴 때와 같다. 언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그 시절의 자신처럼 기대고 싶어진다. 그녀라는 편안한 버팀목에 의지하고 싶다. 결국 그때로부터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고, 그녀는 자조했다.
언니가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목 밑에 칼이 닥쳤던 그때도 언니는 멋지게 나타나서 위기에 빠진 자신을 구해주었으니까.
하지만 자기 같이 매끄러운 볼가를 스치고 지나간 한 줄기 혈선.찰나에 불과하지만 그때 느낀 공포와 절망감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장면은 문신처럼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그 여자, 강선아는 짐승이다. 단순히 강하다거나 그런 문제를 떠나서, 그 눈에 담긴 광기는 정상의 영역을 아득히 일탈해 있다.
그것 앞에서 위험한 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아무리 자신보다 훨씬 강한 언니라고 해도 쉽사리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누구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어찌 위험의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을까.
"하하…"
폐 안에 고인 담배 연기를 내뿜듯 그녀는 나른하게 웃었다. 현실 같지도 않은 현실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내일 뜨는 태양이 무엇보다도 무섭게 느껴졌다.
결국, 결국 그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왜냐면 약했기에, 그저 참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의 재확인. 괜시레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치고 지쳐서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
"흐응…"
방바닥에 여전히 주저앉은채로, 그녀는 빨갛게 부어오른 자신의 손목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그러다 다른 손으로 그 부위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흠칫하고 떨리는 작은 몸. 슬금슬금 한쪽 입꼬리가 올라갈듯 말듯 요동쳤다. 끝내 그녀의 입가에는 어린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요염한 미소가 걸쳐졌다. 건드릴 때마다올라오는 아릿한 통증이 거슬리긴 했지만, 이것마저도 여동생의 손길이라 생각하면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사랑하고 아끼는 그녀의 여동생은, 실의에 빠져 약해진 모습마저도 실로 절망적일 만큼 매혹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녀석에게 조금은 고마워해야할지도…"
어릴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태양같이 밝고활기찬 자신의 여동생이었으니까. 기존의 모습이 질린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색다른 매력을 품고 있었다. 나름대로 지켜보는 맛이 있다고나 할까. 그래도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역시 그 아이에게는 밝은 모습이 어울린다.
히어로는 항상 극적인 타이밍에 나타나, 위기에 처해있던 히로인을 구해낸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쓰이는 클리셰. 그런데도 계속 쓰이는 이유는, 역시 그 편이 히로인에게나 독자에게나 좀 더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제 슬슬 한계, 느려터진 전개를 이 이상 질질 끌 수는 없다. 구경이 아무리 재밌다 한들 이 이상은 소중한 여동생이 진짜 망가져버릴 수도 있으니까. 아무 반응도 없는 인형을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취미가 아니었다. 물론 단순한 껍데기에 불과하더라도 외형만 같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만은.
아무튼, 그 더러운 녀석이 그 아이에게 더러운 손을 댈 때마다 몇 번이고 끊길 뻔한 이성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지금껏 기다려왔다. 수면 아래에 잠긴 악어처럼, 사냥감을 확실히 포획할 수 있는순간을 기다리면서.
그렇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진 히로인을 구출해봤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때마침 그 녀석을 몰아넣기 위한 소재도 수중에 넣었고, 이제는 직접 행동에 나서야할 차례였다.
"아무리 철두철미한 연쇄살인마 씨라도, 역시 집안에서는 경계를 푼다는 걸까?"
그녀는 작고 보드라운 손에 들린 사진 몇 장을 보며 태양보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 같이 알몸으로 교접하는 남녀의 사진. 며칠 동안 여동생의 감시를 포기하면서까지 겨우 얻어낸 것들이었다.
살인을 저지를 때만큼은 철두철미하게 자신을 숨기는 강선아. 아쉽게도 이것들은 강선아의 범죄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까지는 못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녀석을 학교에서 내쫓기엔 충분하리라. 그리고 그녀석의 뒤를 봐주고 있는 그 남자 또한 그 녀석과 함께 매장해버릴 수 있다.
우수하기 그지없는 자신으로서도 어찌 공략해야하나 난감했던 그 빌어먹을 갈보년을 한순간에 나락까지 몰아세울 수 있다는 말이다. 마냥 순진무구하게만 보이는 그녀의 미소가 음흉하게 짙어졌다.
그렇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만으로는 찍힌 자들의 얼굴이 잘 특정되지 않는다. 그러니 한 일주일 정도, 좀만 더 유예를 두고 자료가 더 모인다면. 그때까지는 그녀도 강선아를 방치할 생각이었다.
그리고……아아, 여동생은,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시아는 끝내 자신의 품에 돌아오겠지. 그리고 이전보다 더한 사랑을 자신에게 퍼부으며, 맹목적으로 자신만을 의존하기 시작하는 거다. 자신에게 매달릴 여동생의 모습을 그리며 그녀는 기쁘게 웃었다.
그러나 이때의 그녀는 미처 몰랐었다.
설마 강선아말고도 또 다른 미친년이 갑자기 나타나 여동생을 채갈 줄은, 아무리 똑똑한 그녀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언제나처럼 다소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이뤄지는 조례시간. 구름에 가려진 해 때문에 아침치고는 하늘이 어둡다.
길다란 흑발이 부시시하게 흘러내렸다. 맨 뒷자리에 앉은 그녀는 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바로 옆자리에선 선아가 그녀의 오른손을 붙잡고서 장난스레 꼼지락거리고 있었지만, 그 정도 스킨쉽 쯤이야 가볍게 무시했다.
"자자, 이제 그만 떠들고, 오랜만에 전학생이 왔으니까 반갑게 맞이해주렴. 외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신경 많이 써주고."
전학생? 담임이 조례 중에 뱉은 그 말을 그녀는 조용히 뇌까렸다. 하지만 이내,까만 동공에 어린 호기심이란 불꽃은 단번에 사그라들었다.
어차피 전학생이라 한들 친해지는 것은 무리이니까. 아니,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지금 그녀의 옆에서 실실 쪼개고 있는 한 여자에 의해서.
독점욕도 강한 여자는 그녀가 다른 친구를 사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의 친구가 그녀 하나뿐이니, 그녀의 친구 또한 자신 하나뿐이어야 한다는 걸까. 그것 참 이기적인 사고방식.
어차피 연쇄살인범과 친구를 먹은 마당에 다른 사람과 멀쩡하게 사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는 전학생에 대한 관심의 불을 일찍이 꺼트렸다. 무심한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한 채.
이윽고 드르륵 소리를 내면서 교실 앞문이 열린다.
그리고──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그녀는 입술을 살짝 벌렸다.
"안녕하세요."
소리 없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뿐사뿐한 걸음걸이. 곧게 편 등과 한 치의 삐뚤어짐도 없는 어깨. 그리고 뭔지 모를 달콤한 향을 흩뿌리는 웨이브진 금발. 외국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백자 같이 하얀 피부와 영롱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이색적인 광채를 발했다.
우아함이라는 개념을 표본화한 것 같은자세와 보는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외모. 그러나 정작 그녀가 놀란 이유는 전학생의 아름다움에 혹해서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모습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기시감은 경악이란 파도가 되어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의 옆에 있는 선아조차 집중하지 않는 이상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나이는 여러분들과 같은 16…아니, 17세입니다. 독일에서 막 온지라 한국 문화에 대해선 모르는 것이 많으니, 실례가 안 된다면 종종 가르침을 부탁드릴게요."
"말도 안 돼…"
"아, 그리고 저의 이름은 이자나 그레제.“
허나 그 이름은 어디까지나 가명일 뿐이다. 본명은 이사카 파울 하이드리히. 제약 업계에서유명한 하이드리히 가문 출신의 영애.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글쎄.
우아하게 지은 미소가 눈부신 그녀는, 이 세계의 바탕이 된 게임의 히로인들 중 한 명, 아직까지도 등장하지 않았던 '세 번째 히로인'이었다.
"──부디 이자나라고, 부담 없이 불러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