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1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31/73)



〈 31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우와-그럼 이자나는 독일 어디에서 온 거야?"

"수도인 베를린에서 왔어요."


어리게 보이고 싶었는지 목덜미 부근에서 자른 단발머리가 살랑거린다. 자신과 같은 교복을 입은 동양인 여자의 물음에 이자나는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서 대답해주었다.

도톰한 입술이 부드럽게 휘면서 그리는 고운 호선. 그 모습은 이자나가 원래 가지고 있던 가련함이 더해져 마치 후광이 비치는 듯 자애롭기 그지없었다. 차마 여자애들 대화에는 끼지 못하고멀리서 그녀를 몰래몰래 지켜보던 남학생들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그나저나 한국어 엄청 잘하는데, 어디서 배운 거야?"

"예? 그건…"

'…담임선생이란 작자가 나가자마자 쉴 새 없이 조잘조잘, 입이 아프지도 않은 걸까?'

본래 전학생이 왔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국적인 이자나의 외모와 배경 때문일까.  질문에 대한 대답이 끝나면 곧 바로 새로 들어오는 질문. 조금 지칠 정도였지만 여전히 친절한 웃음을 머금은 채, 이자나는 속으로만 불만을 토했다.

성녀 같은 겉모습과 달리 이자나는 별로 친절한성격은 아니었다. 단지 어릴 때부터 줄곧 해온 착한 척이 몸에 배었을 뿐, 그들의 지나친 관심 또한 그저 귀찮게만 느껴졌다.

한국인들은 쓸데없는 오지랖이 심하다고 얼핏 들었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극동의 소국은 좀 더 조용할 줄로만 알았던 이자나로서는 전혀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같은 귀족끼리의 모임도 아니고,  평범한 동양인들 앞에서까지 연기를 지속할 필요는 없지만, 이자나는 일단 성실하고 친절한 이미지를 계속 밀어붙이기로 했다. 완전히 풀어지는 것보다는 연기를 통해 약간이나마 긴장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기도 하고, 수 천 번도 더 지었던 미소를 억지로 짜내는 것쯤, 그다지 번거로운 일도 아니다.

무슨 심문하듯 영양가 없는 수다를 끝까지 이어가던 그들은, 선생으로 보이는 작자가 교실로 들어오고 나서야 뿔뿔이 흩어져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제서야 그녀는 고단함에서 우러나온 한숨을 푹 내쉴  있었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길고 나른하게 늘어졌다.


"크흠, 오늘 수업은 영조부터 정조까지 진도를 나가겠다. 모두교과서 120 페이지를 펼치도록."

'벌써 질리는데…'

국사 선생의 첫 마디에 이자나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이 나라의 역사 따위, 알게 뭐란 말인가. 첫마디부터 흥미가  떨어지는 느낌이라 이자나는 턱을 괴고서 교사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다소 품위가 떨어져 보이는 모습이지만,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고 이 정도 쯤이야괜찮겠지. 이자나는 멋대로 단정을 내려버렸다. 사실은 이 조촐한 수업부터 시작해서  나라의 모든 것이 지겨워서 참을  없을 지경,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스스로가 장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녀의 흥미가 떨어지건 말건 교단에 선 배불뚝이 선생은 아무렇지 않게 수업을 진행해나갔다. 녹색 칠판 위의 분필이 기계적으로 또각또각 움직였다. 마치 정해진 루틴대로 움직이는 자동차 공장의 조립기계 같다고, 이자나는 문득 생각했다.

서로 같은 두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당연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풍경.

'이곳도, 결국은 마찬가지구나.'

본래 간단한 여행 겸 자신의 약혼자와 친목을 다지기 위해 오기로 했던 이국. 화려하지만 틀에 박힌 본국에서의 생활은 무척이나 질리고 질려서, 혹시 이곳은 다르지 않을까──라는 미약한 기대를 품고서 상경했다. 그러나 실상은 겉만 다를 뿐, 결국 삶이란 것의 내용은 어딜 가나 똑같다며 이자나는 멍청했던 자신을 비웃었다. 아무리 신분이 바뀌고 대하는 사람이 바뀌어도, 차오르는 기시감을 차마 지워 내릴 수는 없었다.

흥미를 가지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 무리도, 그 속에 은근슬쩍 섞여있는 질투의 감정들도, 자신을 흘깃거리며 흠모의 시선을 보내오는 남자 무리도, 전부 다 본국에서도보았던 것들. 이자나에게는 지독히 익숙한 광경이었다.

이제는 그 잘난 얼굴 빼고는 볼 것 하나 없는 자신의 약혼자가 다 그리워질지경이었다. 아무 여자에게나 헬렐레하여 제 아랫도리 하나 간수 못하는 그 한심한 남자가 말이다.

적어도  남자는, 까다로운 이자나의심미안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동화 속 왕자님과 같이 살짝 느끼한 듯하면서도 선이 굵은 그의 외모는 의외로메르헨틱한 이자나의 취향에 정말로 적격이었다.

그만큼 외모 하나는 누구보다도 봐줄만한 남자다. 그것도 무지하게. 어느 정도냐면,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자신이 동화  공주님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하고 착각하는 정도.

하지만 그는 이번 여행 직전 갑자기 일어난 교통사고 때문에 여행에 동참하지 못했다. 그 사고의 결과가 외딴 이들의 무리 속에 홀로 남아있는 이자나, 그녀 자신.

꼭 필요할 때만 없는 남자라고 이자나는 생각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 오기로 추진했던 이 여행이 못내 후회스럽게 느껴졌다.


'아니…아직 그렇게 단정하기엔 너무 이른가.'

교실을 빙 둘러보던 시선이 어느  지점에서 정지했다. 이자나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군청색 교복을 껴입은 소녀가 그녀처럼 턱을 괸 채 앉아있었다.

반대편에 앉아멍하니 창가를 들여다보는 소녀. 자연스레 시선이 고정되었다.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폭의 명화처럼,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빛에 얼굴을 적시고 있는 소녀는 절세의 미녀라 평가받는 이자나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수척한 얼굴색과 시름이 깃든 표정마저도 차마 그녀의 미모를 깎아내리진 못할 정도였다.

그래도 조금만 더 가꾸고 밝은 표정을 짓는다면, 아마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하지 않을까. 그녀는 지겹고 내용 없는 수업을 듣는 대신 그 아름다운 소녀를 관찰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환한 광채를 발하는 푸른 눈이 소녀와, 그 옆에서쿨쿨 자고 있는 붉은 머리의 여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단지 소녀가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처음으로 교실 안에 발을 내딛었을 때 우연찮게 보았던 소녀의 얼굴. 그때 이자나가 본 그것은, 어째선지 경악과 충격이란 두 개의 감정이 복잡하게 혼재해있었다. 나라 표현으로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마냥.

언제 한  마주친 적이라도 있나? 그렇게 생각해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저렇게나 인상적인 외모를 잊어먹을 리가 없다. 하지만 소녀는 이자나라는 존재를이미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분명히 초면일 터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조금은 재미있어질지도…"

"응? 방금 뭐라고 했어?"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새어나왔나 보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옆자리의 동급생에게 싱긋 웃으며 사과한 이자나는,  이후로도 수업 시간 내내 소녀를 빤히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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