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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32/73)



〈 32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당신이 이시아 씨인가요?"


참을성이 적은 건지 아니면 그만큼 그 소녀가 매력적으로 보인 건지. 이자나는 하교 시간을 알리는 마지막 종이 울리자마자 소녀의 자리로 다가갔다. 바로 근처에서 들려온 타인의 목소리에 짐을 챙기던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이자나를 쳐다보았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도, 오똑하게 선 콧대도, 새까만  눈도, 가까이서 보니까 훨씬 더 생기가 넘친다. 동성애 취향 같은 건 없는데도, 저도 모르게 끌려버릴 정도의 아름다움. 이자나는 그런 소녀를 언제나 짓곤 하는 웃음과 함께 응시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인형 같이 정교한 미소를 빚어내었다.

보통 이자나가 이 정도만 해줘도 남녀 구분 없이 곧장 그녀에게 반해버리고 말지만──

"…그런데?"


소녀는 달랐다. 본디 호의에는 호의로 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지언데, 초점이 흐려져 탁해진  눈동자에서 쏘아지는 적의는 뾰족한 가시 같았다. 굳이 이자나 같은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느낌. 혹은 귀찮게 해서 짜증난다는 느낌. 그런 모멸적인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여있었다.

그래, 모멸과 경멸 말이다. 과연  외모만큼이나 범상치 않다는 것일까. 이자나는 소녀의 적의어린 눈빛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뭐라 해도 그런 감정을 남한테서 받아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실로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다소 괴팍하긴 해도.

꼿꼿이 제 가시를 치켜세우는 소녀가 무섭지는 않았다. 미약하게 떨리는 저 동공을 보면 허세란 것쯤은 쉽게 눈치 챌 수 있으니까. 그저 귀여울 따름.

꼭 고슴도치를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왜, 있잖은가. 가시가 있는 쪽을 뒤집으면 한없이 귀여워지는 그 생물. 그렇다면 지금은 길들이는 기간이려나.


"죄송한데, 괜찮으시다면 이 학교를 안내해주실 수 있을까요? 처음이라 그런지,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어서…"

"…미안한데, 그걸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다른 애들도 있으니까. 차라리 개네들한테 가서 부탁하는 게 나을 텐데."

"그게…담임선생님께서 교내 안내를 원하거든 반장이신 시아씨를 찾아가라고 해서요. 게다가 오늘 전학 온지라 그런 부탁을 할 만한 친구도 없구요."

정말로 어쩔  모르겠다는 듯이, 누가 봐도 곤란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다. 물론 이자나는 선생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학교의 지리도 지도를   본 순간 전부 암기할 수 있었고. 전부 한낱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

그러자 입을 꾹 다문 소녀. 이자나는 잠자코 소녀의 대답을 기다리기로 했다. 동시에 그녀는 소녀의 반응을 은밀하게 관찰했다.

그녀의 제안에 짐짓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은 소녀는, 바로 옆자리에서 잠들어 있는 붉은 머리 소녀의 눈치를 계속해서 살폈다. 마치 그래도 괜찮은지 그녀에게 허락이라도 구하는 냥 말이다.


'강선아라고 했던가?'

소녀의 옆자리에 있는 만큼 얼떨결에 같이 보게 됐지만, 잠이 다소 많다는 점을 빼면 그다지 특이한 인간은 아니었다.

첫인상으로는 그냥 조용조용히, 주변의 분위기에 적당히 묻어가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뭘  눈치를 보고 그래, 시아야."

"서, 선아야…"


잠들어 있던 게 아니었는지. 나른한 목소리로 덧붙인 강선아는 쭉 숙이고 있던 얼굴을 쳐들었다.

그에 한껏 당황하는 소녀. 애매하게 들어 올린 손끝은 파르르 떨리고, 두 눈동자는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방황한다.

이자나는 돌연 안절부절 못하는 소녀의 모습을 의뭉스레 쳐다보았다. 이런 말을 사람한테 하기에는 뭐하지만, 마치 뱀 앞에 선 개구리 같은 모양새였다.


"우린 '친구'잖아. 친구 사이라면 좀 더 편하게 지내야지. 응? 그치?"

"…그래."

"알면 됐어. 아무튼 방과 후에 네가 뭘하던 나는 신경  쓸 테니까. 안낸지 뭔지를 해줘도 좋아."

강선아는 그러면서 소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자나의 눈은  한 순간 강선아의 손이 소녀의 얇은 손목을 억세게 틀어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살짝이지만 빨갛게 부어오른 소녀의 손목.


'친구라고? 흥, 웃기지도 않네.'

이자나는 내심 강선아를 비웃었다. 애초에 그녀는 친구가  없었지만, 그리고 그마저도 가식으로포장된 관계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제대로  친구 사이가 무엇인지쯤은 알고 있었다.

아직 그녀들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원래 이자나가 알기로는, 적어도 저딴 관계를 '친구 사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차라리 목줄 달린 개와  주인의 관계에 더 가까우리라. 주인이 짖으라면 짖고 앉으라면 앉는, 그런 수직적인 관계. 다른 단어로 표현하면 히스테리 쩌는 상사와 그 부하쯤?


"…그럼, 안내해줄 테니까. 따라와."

"아, 감사합니다!"

아무튼 이걸로 소녀, 이시아라는 인간에 대한 흥미는 더욱 더 깊어졌다. 대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기에 저런 난폭한 여자와 함께 다니는 건지…

할짝, 몰캉한 혀가 메마른 입술을 훑는다. 이자나는 앞서가는이시아의 등을 천진난만한 웃음과 함께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무엇보다도 순진무구했고, 그것은 마치 재미 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의 얼굴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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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어디인가요?"

"여기는 양호실, 그리고 여기서 좀만  가면…"

1층과 2층의 필요한 부분을 다 둘러볼 때까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아는 어디까지나 사무적인 말투로 이자나 그레제를 안내했고, 그녀는 딱딱한 안내를 순순히 따라가 주었다.

처음 오는 학교의 안내, 정말 그 외에는 정말 아무런 목적도 없었던 걸까. 시아는 문득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자리를 차지한 이자나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알아챈 듯 산뜻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치 발바닥에 꽂힌 바늘처럼 콕콕 쑤시는 기분. 어딘가 불편한데, 어디가 불편한 지를 도무지  수가 없다. 마치 자로 대고 그린 듯한 그 미소를 포함하여, 시아는 이자나라는 존재가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녀, 이자나 그레제가 특별히 나쁜 인간이라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원작에서 등장하는 그녀도 다소 특이하긴 하나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거의 유일하다시피 여주인공에게 호감을 내비치는 여자 캐릭터가 바로 그녀였다.

가까워지기 쉬운 인간. 그렇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꺼려질 수밖에 없다. 지금 자신의 곁에는 그 괴물이 맘껏 활보하고 있으니까. 자신이 미처 막지 못한, 상대가 누구건 가리지 않고 잡아먹는 그 괴물이말이다.

그래, 괴물.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썼을 뿐인 괴물에 불과하다.

"시아씨? 어쩐지 표정이 안 좋은데, 몸 상태가 안 좋으신 건가요?"

"…별일 아니니까 신경 꺼."


막연하고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은목이 잘린 시체의 모습. 그때 맡은 죽음의 냄새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몸에 배어있었다. 그야, 지금이라도 곧 바로 떠올릴 수 있는 걸.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 입는 것은 싫다. 죽는 것은 더더욱 싫다. 이제 그런 건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끔찍하다. 정말로, 정말로 끔찍하다.

시아는 자연스레 굳어버린 얼굴을 애써 누그러트리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돈을 덕지덕지 처바른 학교 부지는 지나칠 정도로 넓었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두 다리를 움직이니 얼마 안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이 그때쯤에는 역겨운 기분도 많이 가셔있었다.

"여기가 바로 급식실이야. 점심시간마다 와서 밥을 먹는 곳."

"와우! 그러니까, 여기가 돼지를 기르는 우리라고요? 돼지우리치고는 상당히 고급진데요."

"아니, 굳이 따지자면 사람 우리인데."

"끔찍한!"

만담 같지도 않은 만담을 나누며 시아는 손목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학교가 워낙 넓어서 그런지 몇 군데 둘러보지도 않았는데 어느덧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아무튼 둘러봐야 할 곳은 대강 다 둘러봤고, 이제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곳은 음악실 하나. 그곳만 갖다오면 더 이상 이 여자와 함께 있을 필요도 없겠지.

안내 따위 얼른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시아는 걸음을 한층 더 빨리 했다. 한편 이자나는 그런 시아를 다급히 따라갔다.

그리고 5분 후.

"헥, 헤엑, 여, 여기느은?"

"…음악실이야. 그보다 얼마나 걸었다고 벌써 지친 거야?"

"당신 걸음이 너무 빨라서 그렇잖아욧!"

급식실하고 음악실 사이는 별로 멀지도 않은데 말이지. 쯧하고 혀를 찬 시아는 음악실의 문을 열었다. 대충 내부의 풍경을 한번 보여만 주고 교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허나 이쯤에서 돌아가자고 말하려 고개를 돌렸을 때, 줄곧 병아리처럼 그녀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자나의 모습은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우와, 이건 피아노네요."

"뭘 멋대로 만지고 있는 거야…그만둬."

"저희 집에 있는 것보단 훨씬 구리지만, 그래도 꽤나 좋은 물건이네요. 한국말로는 짝퉁?"

"싸구려겠지."

어느 샌가 이자나는 음악실에 놓인 피아노의 앞에 앉아있었다. 새하얀 검지손가락이 마찬가지로 새하얀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자, 맑은 소리가 정적을 깨트리고서 울려퍼졌다. 그 별것도 아닌 일에 이자나는 열살배기 아이처럼 꺄르르 웃었다.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돌아가지 그─"

보다 못해 제지하려는 순간, 관객이 한 명 뿐인 연주가 갑작스레 시작되었다. 시아는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고, 곧 경쾌한 선율이 그녀의 귓가를 감미롭게 감싸 안았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 곡조. 바흐…아니, 아마 모짜르트의 곡이었던가? 시아는 들려오는 멜로디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곁에서 푼수처럼 헤프게 떠들던 이자나가 생각나지 않을 만큼 무척이나 아름다운 연주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아름다운 것은, 바로 연주자인 그녀 자체였다.

창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석양빛에 반사되어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머리칼과, 대리석 같은 상아색 피부. 그리고 연주에 열중하기 위함인지 지그시 감은 두 눈, 가느다란 허리를 꼿꼿이  곧은 자세.

그녀가 입은 교복이 마치 드레스처럼 보인다면, 역시 과장일까. 그러나 비단 과장뿐인 말은 아니다. 어느 새부터인가, 시아는 넋을 잃은  이자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표현은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지금의 그녀는 마치 동화 속 공주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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