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어째서 제가 피아노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아시나요?"
영원할 것만 같던 연주도 어느덧 끝나고, 무심한 듯 툭 내뱉어지는 말. 이자나는 건반에서 손을 떼고, 살짝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시아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다 꺼져가는 저녁놀을 배경삼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금발의 소녀. 어째선지 그녀에게 압도당하는 기분. 잠깐의 공백 뒤, 시아는 더듬더듬 입을 뗐다.
"…그걸 내가 알 리가 없잖아."
"10살 때, 아니 이곳 식으로는 11살 때였던가. 우연히 부모님을 따라 연주회에 갔던 적이 있어요. 원래 고전 음악은 고리타분해서 싫어하는 편이었는데, 그때 들은 피아노 독주가 너무나 감미로웠던 거 있죠. 아마 그때가 처음으로 피아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순간일 거에요."
"그럼 그때부터 음악을 시작하게 된 거야?"
"아니요."
시아의 물음을 단칼에 부정한 이자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전히 시선을 시아에게 고정한 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처음에는 연주를 선보인 피아니스트를 사달라고 부모님께 졸랐어요. 하지만부모님은 사람은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거절했죠. 어린 제가 울고 불며 매달렸는데도 말이에요.
아, 이건 여담이지만 그때의 저는 무척이나 귀여웠답니다? 아마 냉정한 시아 씨라도 보는 순간 곧 바로 소아성애자가 되지 않았을까요?"
"…"
"아무튼, 부모님께서는 한사코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포기할 수 없었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떠올리게 된 거에요. 피아니스트를 살 수 없다면, 내 손으로 직접 그 아름다운 선율을 재현하면 되지 않을까하고."
또각또각, 구둣발소리가 나즈막히 울려 퍼진다. 점점 가까워지는 이자나의 얼굴에 시아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럼에도 영롱하게 빛나는 진녹색 눈동자는 오롯이 그녀만을 진득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그걸 떠올린 순간부터 바로 피아노를 연습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 손가락은 너무 짧았던 거 있죠. 짧은 데다 유연성까지 없었죠. 한 마디로 절망적일 만큼 피아노에 재능이 없던 거에요."
"얼마나 짧았길래?"
"혹시 단지증이라고 아시나요? 거의 병 수준이었답니다. 완벽하기 그지없는 제게 있어 유일한 흠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거울 같은 벽안은 어느 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자나는 어디까지나 발랄한 목소리로 남의 얘기를 하듯이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그래도, 어린 저는 포기할 순 없었어요. 그래서 짧은 손가락들을 하나씩 붙잡고, 일부러 뼈를 비틀었죠. 보다 피아노를 치기 쉬운 형태로 뚝! 하고 말이에요."
"…"
"물론 나중에 그 모습을 본 부모님께선 노발대발하셨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서 저는 피아노를 잘 칠 수 있게 되었고…얼마 안가 지금처럼 능숙해질 수 있었답니다!
대단하죠? 노력은 언제나 결실을 맺는 법이니까요. 뭐, 그러고 나서 금방 그만두긴 했지만."
"…그래서 뭐 어쩌란 건데? 이딴 이야기를 나한테 들려주는 목적이 뭐야?"
방금 전의 감미로웠던 연주가 머릿속에서 싹 지워져버릴 만큼 기분 나쁜 이야기. 어째선지 자꾸만 위축되는 느낌에 시아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동시에 얼핏 훔쳐본 이자나의 손가락은 골격이 기괴하게 뒤틀려있었다. 보통 피아니스트들의 손은 섬세하고 우아한 느낌이 강하건만. 그것은 피아니스트의 손이라기보다는, 격투가의 손에 가까웠다.
…일부로 뼈를 비틀었단 말은, 이런 뜻인 걸까. 시아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별 다른 의도는 없었어요. 단지 알려주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애초에 욕구라든지 욕망이 거의 없는 저이지만, 무언가 가지고 싶은 게 생길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고 만다는걸.
…그래서 말인데요. 시아 씨, 제가 지금 가장 갖고 싶은 게 뭔지 아시나요?"
이미 충분히 가까운 거리였지만, 이자나는 굳이 한 발짝을 더 내딛었다. 금방이라도 서로의 심장박동이 들릴 법한 거리. 자연스레,이자나의 입꼬리는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것은 평소와 같이 온화한 미소였지만, 동시에 평소보다 더 짙은 미소였다.
반면 시아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는 있지만, 이 거리에서는 그 예쁜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빤히 보이니까.
시아의 두 눈동자는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자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 새카만 바다 속으로 퐁당 뛰어들었다.
"제가 갖고 싶은 건, 당신의 비밀이에요."
"나의 비밀이라고?"
"그래요. 당신이 숨기고 있는, 당신의 비밀들…"
말끝을 흐리면서 딱 보기 좋을 만큼 봉긋이 솟아있는 가슴께를 검지로 툭 친다. 갑작스런 성추행에 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고, 이자나는 소리 내어 키득키득 웃었다. 조신함과는 거리가 먼 모양새였지만 차마 웃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어째서 나를 처음 봤을 때 꼭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 마냥 놀랐는지, 그리고……강선아와의 관계."
"──미안한데 말이지. 내가 왜 그걸 알려줘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첫 번째 비밀을 말할 때는 그저 놀라기만 하다가, 강선아라는 이름 세 글자를 언급하자마자 급격히 달라지는 분위기.
꾹 다문 입술은 분노에가득 차 파르르 떨리고, 이자나를 향해 쏘아지는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다. 누가보아도 영락없이 화난 모습이었지만, 이자나는 어째선지 그녀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꼭 천적에 조우한 개처럼,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까진 그녀는 무엇이고, 또 강선아는 무엇인지 잡힐 듯 말듯 흐릿하기만 하다. 다만 이걸로 보다 확실해진 것은, 둘이 단순한 친구관계가 아니라는 것. 뭐, 어차피 뻔한 사실이긴 했지만.
"어머, 정말로 뭐가 있긴 있나 보네요. 그냥 찔러본 건데 그렇게 정색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것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나보네. 나는 이제 간다. 너도 가든지 말든지."
"잠깐, 물론 공짜로 알려달라는 소리는 아니에요. 당신이 만약 제게 당신의 비밀들을 알려주신다면, 저는 그 보답으로서 돈을 드릴게요. 물론 현찰로요."
그대로 떠나가려는 매정한 등에다 대고, 이자나는말을 걸었다.
뜬금없는 돈 얘기에 시아는 얼빠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뭐?"
"그래서, 얼마면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