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그래서, 얼마면 되나요?"
파도처럼 굽이치는 금발이 멍하니 시선을 사로잡고, 이름 모를 향수의 자극적인 냄새가 비강을 아릿하게 간질인다. 중력보다 무거운 침묵. 불순물을 제거한 보석 같이 영롱하디 영롱한 초록빛깔 눈동자가 시아를 응시하였다. 그래, 뚫어져라 응시하였다.
서로의 심장소리가 들려올 듯 가까운 거리에서, 음악실은 점차 야리꾸리한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시아는 미련한 소처럼 두 눈을 끔뻑거렸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워낙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 오히려 자신의 고막이 의심스러워지는 상황. 아니면 이게 바로 러시아를 뛰어넘는 독일식 조크인 걸까. 솔직히 말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농담이 아니에요. 얼마까지 원하시나요? 1억? 2억? 아니면…5억?"
"…설마 돈으로 날 낚으려는 거야?"
"네, 그런데요. 왜 그러신 가요? 혹시 액수가 부족한 건가요?"
날 때부터 부자인 연놈들은 아예 사고방식 자체가 범인의 그것과는 다른 건지. 계속해서 헛도는 대화에 시아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쯤 되면 단순한 짜증을 넘어서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너 바보냐? 그깟 비밀이 뭐라고 5억을 내겠다는 거야?"
"뭐 어때요. 돈은 간직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 쓰라고 있는 거잖아요?"
"그것도 정도껏이지. 하아…"
"게다가 저는 감각이 예민한 편이거든요. 그러니까 직감적으로 느낀 거에요. 당신이 가진 그 비밀들은 충분히 그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그렇게 속삭이듯이 말한 이자나는 교태스럽게 웃어보였다. 한 쪽 입꼬리만을 비죽 올린 채, 제 나이에 맞지 않는 색기가 질척하게 배어나오는 그 얼굴을 시아는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색기라고는 조금도 배어나오지 않는 멍청한 얼굴로.
그러다 시아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 이자나를 노려보았다. 진흙더미 같은 혐오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돈, 돈, 그래 돈.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었다.
"…"
"그런데 시아씨는 의외로 반응이 얕네요. 한국인들은 돈만 보면 아주 미칠 듯이 환장한다던데……아, 역시 액수가 적은 건가. 그렇다면 10억이면 어떤가요? "
"…"
"잘 생각해보세요. 10억이에요 10억! 당신 나이에는 앵간해서 만질 수 없는 돈!
물론 이 학교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부자라고 하지만……시아씨는 다르잖아요? 장학생이라는 얘기를 얼핏 들었거든요."
"…저기"
"서민에게 있어 10억은 무척이나 큰돈이죠? 서민의 경제 감각에 둔한 저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답니다. 당신의 인생에 있어 다시는 없을 기회라구요? 빨리 선택하시는 편이 여러모로─"
"됐어."
"…넹?"
가차 없는 거절에 줄곧 여유롭기 그지없던 이자나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줄곧 써오던 정교한 가면에 처음으로 금이 간 순간이었다.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됐다고. 그보다 짜증나니까 얼른 꺼져버려."
"하, 10억으로도 성이 안 차시는 건가요. 정말로 욕심이 많으신 분이네요. 그, 그러면 15억! 아니 20억! 아 진짜, 이 이상은 저도 못 줘요! 제 통장에도 한계는 있으니까."
"아니, 돈 같은 건 됐고 더럽게 시끄러우니까. 우선 그 입부터 좀 닥쳐달라고."
"네에…?"
다소 거친 단어들이 들려왔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는 우선 욕부터 배우고보는 이자나는 단번에 그 뜻을 캐치했다. 영어로 하자면 Shut the fuck up, 그러니까 그 입 좀 닥치라는 말이었다.
방금 전의 꺼지라는 말도 포함해서, 난생 처음 들어보는 폭언의 연속에 머리가 멍해지는 것도 잠시. 이자나는 본래의 우아함을 잃고서 한껏 일그러진 표정을 재빨리 가다듬었다.
그러나 아무리 평정을 가장하더라도 격하게 뛰는 자신의심장박동은 속일 수 없었다. 백자처럼 새하얀 양 볼가 또한 어느 새 빨갛게달아올라 있었다.
이런 걸 바로 아드레날린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흥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 섬세하게 관리해온 머리털 한 올 한 올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쭈뼛쭈뼛 서는 것 같다. 그것은 평소의 이자나, 아니 이사카 파울 라이드리히에게서 도저히 찾아볼 수 없던 혼돈이었다.
"아니다. 그냥 내가 꺼져줄게. 그 편이 너한테도, 나한테도 낫겠지?"
"자, 잠깐만 기다려 봐요! 당신 말을 빌리자면 그깟 비밀 따위에 20억이라구요? 당신에게 있어서 분명 좋은 거래일게 분명한데, 대체 뭐가 맘에 안 들어서 이러는 거에요!"
이자나는 빠르게 음악실을 떠나는 시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마치 떠나는 남자를 붙잡는 여자처럼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는, 막상 붙잡은 본인조차 왜 그런 행동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내 서서히 드러나는 무표정, 그리고 차갑게 가라앉아있는 새까만 눈과 마주친 순간 이자나는 붙잡은 손목을 바로 놓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경멸과 모멸이 담긴 그 눈빛은, 이번에는 한낱 연기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짜증난다는 거야."
짧디 짧은 말과 함께 시아는 정말로 떠나버렸다.
어째선지 그 매정한 등을 목전에 두면서도 이자나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분한 듯이 연분홍빛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것 외에는.
"저,정말로 무례한 샹…여자네! 뭐? 내가 짜증이 나?"
이윽고 기척이 사라지자마자 이자나는 그 여자, 이시아에 대한 분노를 토해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남들이 보기엔 꽤나 추잡스런 것이었으나……어차피 지금 이곳에는 자신뿐이니까. 이자나는 맘 놓고 분노했다. 분노 때문에 울그락불그락 해진 얼굴이 마치 잘 익은 토마토 같았다.
"…안 되겠어."
흥분 속에서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조용해진 음악실을 이자나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빠져 나왔다. 물론 그 잰걸음의 끝에는 그녀의 권유를 헌신짝처럼 걷어 차버린 그 빌어먹을 여자가 있었다.
어차피 알건 말건 별로 상관은 없는 비밀. 굳이 구차하게 매달릴 필요 같은 건 어디에도 없지만, 금이 간 자존심이 문제였다.
그러니까 이것이 정진정명 최후의 제안. 정말 마지막으로 권유해보고, 그래도 안 된다고 하면 강제로라도 입을 열게 할 심산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자나에게는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실제로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재력과 권력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이자나가 싫어하는 과격한 방식이었지만,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왜냐면 그렇게나 감싸고도는 비밀이 대체 뭔지 이제는 궁금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으니까! 이자나는 버릇처럼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고요한 복도 안을 성큼성큼 거닐었다.
"멈추세요!"
"하아?"
씩씩대며 걷고 있으니, 다행이 얼마 안가 중앙 계단에서 하교 중인 이시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벌써 교실까지 다녀온 듯 등에 무거워 보이는 책가방이 매달고 있었다.
"그 강선아랑 무슨 관계인지 순순히 밝히도록 하세요! 마지막으로 제안하는 거에요! 이번에도 거절하면 진짜 큰 코 다칠 걸요!"
한 층계 위에서 이자나는 이시아를 깔보면서 말했다. 아니 외쳤다. 빳빳이 치켜 올린 턱과 내려 보는 시선. 존경과 배려라는, 처음에 보여준 그런 가식일랑 진즉에 집어 치운 태도였다.
"풋─"
희박한 참을성을 어찌어찌 끌어 모아가며 마지막으로 권유(협박)해주었건만, 그러나 상대의 답변은 조소어린 코웃음이었다. 한쪽 입꼬리만을 삐딱하게 쳐올린 그 얼굴은 무척이나 건방져보였다. 맘만 같아서는 샷건의 개머리판으로 정수리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을 정도.
아니나 다를까. 그 미소를 본 동시에, 이자나의 머릿속 퓨즈는 뚝하고 끊겼다.
"이, 이 무례하고 천박한……씨발년이!!"
이성의 자리를 밀어내고 대신 머릿속을 점거한 분노. 이자나는 그것을 가감 없이 내뱉으면서 왼발을 앞으로 내딛었고──그 순간 거하게 발을 헛딛었다.
'어…?'
다음 순간. 중력에 따라 기울어가는 몸과, 어째선지 점점 더 가까워져오는 대리석 바닥.
난생 처음 겪어보는 추락에 이자나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