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아─"
무언가가 자신을 잡고 끌어내리는 느낌이라면 대충 설명이 될까. 아련한 탄식이 나즈막히 흘러나온다. 서서히 중력에 짓눌려가는 채, 이자나는 말간 두 눈을 금붕어처럼 깜빡거렸다. 말끔한 대리석 바닥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추락은 1초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찰나일 테지만, 이자나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비정상적으로 느리게 흐른다고 느꼈다. 마치 길게 늘어트린 비디오테잎 같았다.
보통 사람은 죽기 직전에 이런 초감각을 느낀다고들 하던데, 그렇다면 자신은 여기서 이렇게 죽어버리고 마는 걸까? 하, 멍청한 얼간이. 계단에서 발을 굴러 죽다니. 실로 허무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다. 지난 세월들이 파노라마처럼 재생되는 일 따윈 없었지만 이자나는 문득 자신을 비웃고 싶어졌다. 하긴, 조로보다 강한 쿠시나도 계단이 죽였는데.
한때는 언제 내게 올까 기다리기도 했었던 죽음.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죽음이 확정되었지만, 그로 인해 특별한 감정이 샘솟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자나의 심장은 놀랍게도 평온하였다. 사소한 떨림도, 긴장도, 무엇 하나 없었다. 있는 것은 오직 고요함 뿐.
아마 그것은 그다지 아쉬울 게 없는 인생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만족했다는 뜻이 아니라, 무얼 하건 부족한 인생이었다는 뜻. 풍족한 주변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자나의 인생은 언제나 중요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마치 베이스가 빠진 밴드 연주처럼, 존재감 없는 듯 보이면서도 결정적인 무언가가.
그 결핍이 무엇인지 이자나는 아직까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감정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만큼 커다란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오늘 하루를 그저 그렇게 보낼 뿐.
언뜻 거창해 보이지만 단지 조금 힘이 빠질 뿐인, 작은 탈력감에 불과하다. 불행한 게 아니라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도 기왕이면 죽을 때마저도 우아하고 싶었는데, 떨어져도 하필이면 머리부터 떨어질 줄이야. 이윽고 깨진 수박처럼 터져나갈 자신의 머리통이 연상되자 이자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우울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밤이 오면 알싸한 가루약을 코로 들이마시곤 하지만, 이자나도 소녀였다.
뭐, 뻔하고 뻔한넋두리. 슬슬 느려진 시간의 끝자락에 닿아가는 것을 느낀 이자나는 슬며시 두 눈을 감았다. 뭔 의미가 있나 싶지만 적어도 눈을 부릅뜬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
자신이 죽고 나면 장례식은 어떤 식으로 치러질까. 부모님은 돈이 많으니 화장은 아닐 테고, 아마도 땅에 묻히겠지. 당연히 식은 큰 성당에서 주관할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다. 한낱 가정부부터 시작하여, 영국 최고의 가십거리인 왕자님까지.
어떤 사람은 엄숙한 얼굴을 가장할 테고, 어떤 사람은 억지로 눈물방울을 쥐어짜낼지도 모른다. 다만 부모님만큼은 진심으로 펑펑 울겠지. 보기와 달리 가정사정이 그렇게 막장인 편은 아니다.
그리고 약혼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썩 좋아하지 않는 그 남자는……그래도 나름 슬퍼하긴 슬퍼할 것 같다. 아름다운 백합 한 송이가 져물었다면서 상심하겠지. 그래봤자 금세 다른 여자를 찾아 나설 테지만.
"…"
솔직히 말해서 영 맘에 드는 광경은 아니었다. 이자나는 질질 짜는 아이가 지독하리만치 싫었으니까. 하물며 어른이 그런다면 오죽할까. 쓸데없이 엄숙한 분위기 역시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이자나가 원하는 형태의 장례식은 오히려…그래, 우선 대형 스피커와 프로젝터를 갖다놓은 뒤 RHCP의 전곡을 재생할 거다. 그리고 작고 귀여운 소녀들을 불러 식이 끝날 때까지 활짝 웃고 있으라 시킨 뒤, 그녀들의 앙증맞은 정수리 위에는 화려한 티아라를 하나씩 얹어줄 것이다.
꺼림칙한 방부제 대신 프로작으로 시체를 덮고, 또 그 위를 하얀 국화보단 새파란 장미로 치장했으면 좋겠다. 그 모든 것들을 마치고나면 검은 목관이 기어코 소리칠 것이다. '새 집에 온 걸 환영해!' 빌어먹을, 기왕이면 프레디 머큐리도 함께 초대해주었으면.
그리고 또, 또……그런데 왜 아직까지 의식이 남아있는 거지?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쳐드는 위화감. 이자나는 재빠르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아야야…"
탁 트인 시야 안으로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한껏 찌푸려진 얼굴이었다. 그것도 상아로 빚은 듯 하얗디 하얀 소녀의 얼굴. 라넌 큘러스를 닮은 연분홍빛 입술을 꽉 깨문 그소녀는 아직도 얼떨떨해하는 이자나를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어…시아 씨?"
꼼짝없이 죽거나, 못해도 크게 다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이자나는 그녀답지 않은, 즉, 얼간이 같은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까놓고 말해서 이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소녀는, 시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이자나는 어째선지 그녀의 품에 안겨있었다.
"돈이 많으면 시각 기관도 퇴화하나 보지? 아니라면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니는 게 어때."
"아, 네…"
차갑게 쏘아붙인 소녀는 말투와는 다르게 조심스레 이자나를 내려놓았고, 이내 살짝 부어오른 제 팔을 주물럭거렸다.
"문제없지? 그럼 난 간다."
"아, 저, 저기, 잠, 아, 아니…안녕히 가세요…"
볼일은 다 끝났다는 듯 무심히 자리를 뜨는 시아를 앞에 두고, 이자나는 꼭 저능아처럼 말을 더듬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어째선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정확히는 자신의 그런 모습에 신경 쓸겨를이 없었다.
이자나는 점점 더 멀어져가는 시아의 등에 초점을 맞췄다. 보기 드문 이채를 띤 녹안이 가랑비에 젖듯이 먹먹해졌다.
"아아…"
시아는 정말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떠나버렸다. 마치 이자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지만, 이자나는 그것이 특별히 거슬리진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이사카 파울 라인드리히'가 마치 길가에 널린 조약돌처럼 취급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니, 불쾌하기는커녕 오히려 황홀한 기분이 이자나의 전신을 감쌌다.
그래, 마치 무언가가 자신의 빈 부분을 끝없이 채워나가는 듯한 느낌. 비아그라 한 통을 통째로 삼킨 듯 달뜨게 날아오른다. 잊어버린 첫사랑을 다시 만난 듯 애달프게 요동치는 심장.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이 실로 몽환적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이윽고 그림자 속에서 스르르 나타나는 검은 정장. 곰 같은 체구에 험악한 인상을 지닌 라틴계 남자는 재빨리 이자나의 앞에 부복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발을 헛디디는 걸 본 순간 곧 바로 뛰어들었지만 아무래도 학교 밖에서 경호를 실시하다보니─"
어릴 때부터 줄곧 이자나를 지켜왔던 남자가 필사적인 모습으로 사죄해왔지만 이자나는 그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지배하는 이 뜨거운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데 여념이 없었으니까. 대신 그녀는 자신의 머릿속을 거의 압수수색하듯이 뒤졌다.
곧 이자나는 무언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풋풋한 추억, 그것은 어릴 때의 아주 작은 기억이었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채 일곱 살도 되지 않을 무렵, 어린 소녀는 동화 속의 왕자님과 사랑에 빠졌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이로 인해 아가씨께서 내리시는 벌이라면 어떠한 것이라도 달게 받을─"
"흑곰, 좀 닥쳐 봐요."
"…"
아직 초경도 오지 않은 나이에 사랑이라니 우스꽝스러운 일이지. 그러나 단순히 귀엽다고 웃으며 넘길만한 일은 아니었다. 비록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캐릭터를 향한 막연한 감정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어린 이자나는 그 왕자님을 열렬히 사랑했었다. 그리고 자신이 동화 속 공주님이 되어 그와 맺어지기를 바랬다.
제 아랫도리조차 간수 못하는 경박한 남자를 약혼자로 고른 것도 오직 그것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는 외모뿐이라면 누구보다도 '왕자님'다웠으니까. 그러니까, 나만의 달콤한 왕자님.
그때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미묘한 동경과 아직은 어설픈 정열. 그런데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그때의 그것과 똑같았다. 아니, 가상이 실제가 된 만큼 그보다도 훨씬 뜨거웠다. 가슴 언저리에 손을 얹어보면,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던 온기가 아직도 아른거린다.
물론 시아의 외모는 동화 속 왕자님과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닮지 않았다. 그야 그녀는 겉보기에는 한없이 가녀린 외양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시아는 이자나가 되길 소망했던 동화 속 공주님과, 구체적으로는 백설공주와 닮아있었다.
하지만 이자나는 자신을 공예품처럼 조심스레 떠받치던 시아의 손길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 몸의 안위보다도 이자나의 안위를 중시하던 그녀의 헌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히로인이 핀치에 빠진 순간, 갑작스레 나타나 제 몸을 불사르며 히로인을 구해주다니──이건 완전히 동화 속 왕자님한테나 가능한 행동이 아닌가! 이자나는 흥분 때문에 달아오른 날숨을 씩씩 내뿜었다.
말투와 성격이 다소 네가지 없긴 하지만, 겉멋만 잔뜩 든 그 얼간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자신을 품에 안은 시아가 무심하지만 은연중에 걱정이 배어나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본 순간 이미, 줄곧 공허하던 마음 한 켠은 그녀라는 존재로 가득 차버렸다. 심지어 살짝 삐뚤어진 그 성격마저도 이제는 한없이 매혹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흑곰."
"네, 아가씨."
이자나는 이제서야 자신이 이 머나먼 극동의 소국에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얼핏 별거 없어 보이는 그것은 사실 운명의 인도였다. 그녀의 약혼자가 어쩌다 이 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부터 시작하여, 아름다운 소녀가 계단에서 떨어지는 자신을 구해주기까지.
그 사이의 모든 자잘한 과정들이 실은 진정한 사랑에 이르기 위한 인도였던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절묘한 우연의 연속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운명, 그래 운명이다. 이보다도 더 본능적인 느낌이 과연 존재할까? 자각하고 나니 분수처럼 샘솟는 부끄러움에 이자나는 벽난로처럼 화끈하게 달아오른 양 뺨을 비교적서늘한 손바닥으로 덮었다.
실로 흥분되고 만족스런 기분. 혹시 어느 새 LSD라도 빨은 게 아닐까 싶어 창밖을 쳐다보아도, 그렇게 쳐다본 하늘은 선명한 주홍빛이었다. 일전에 봤던 것처럼 코랄핑크빛이 아니라. 선명하디 선명한 태양이 아지랑이만을 남기면서 힘차게 타오르고 있었다.
틀림없는 현실의 풍경에 콩닥콩닥 뛰어대던 심장이 조금은 진정된다. 얼마 안가 이자나는 작은 미소 하나를 지어보였다. 이번엔 거짓 한 점 섞이지 않은 순수한 미소를.
"저, 드디어 제 운명을 찾은 것 같아요."
"…예?"
사랑의 시작은 즉, 고독함의 종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