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6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36/73)



〈 36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하아…"


고통일까, 기쁨일까. 애달픔일까, 간절함일까. 각종 고급 가구들로 화려하게 치장된 방의 내부와는 어울리지 않게, 달뜬 고뇌를 포함한 날숨이 흘러나왔다. 이자나는 창가에 둔부를 반쯤 걸친 채 아련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루 중에 가장 어두운 시간. 검은 구름 위에 허리를 걸친 그믐달, 영롱한 밤이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춤추었다.

허상일까, 잔향일까. 저 지독하리만치 검은 색깔에서, 돌연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줄곧 수면 위에 떠올라있던 것이었다. 그저 새삼스럽게 재확인한 것일 뿐.

유리창 위로는 자신의 모습이 어두운 바깥 풍경에 겹쳐서 보였다.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피부, 깊이 조각된 이목구비, 벌꿀색의 금발,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르지 않은데, 오직 눈, 달큰한 이채를 발하는 녹색 눈만이 달랐다.

자기반성, 혹은 성찰. 굳어버린 입꼬리를 억지로 추켜세워 본다. 우스꽝스러운 얼굴. 이제는 익숙한 가식조차 떨 수 없다.

이자나는 본디 특별함을 싫어했다. 물론 자신이 지닌 특수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정확히는 타인이 지닌 특별함을 싫어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특별함을 덧칠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싫었다. 헌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정말로 사소하지만 크나큰 무언가가, 확실히 달랐다.

대체 어떤 단적인 말로 이 기분을 표현해야될지. 그러니까, 그렇기에, 특별했다.

"…뜨거워?…뜨겁네."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쥐어본다. 얇은 네글리제 너머로 뭉글거리는 감촉이 손 안을 채운다. 이자나는 잠시 동안 그 따뜻함을 잠겨 들어갔다. 이 감촉이 평소보다 더욱  뜨겁게 느껴진다면, 그저 착각만은 아니겠지.

첫 사랑, 그래 첫사랑이다. 적어도 인간 대상으로는 말이다. 어릴 적의 막연한 동경보다깊은, 매직머쉬룸보다 자극적이고 엑스터시보다 짜릿한 그것이 가슴을 한껏 억죄고 있었다.

그래서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뜨겁나보다. 그래서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구역질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나 보다. 그렇고말고,  흑발의그녀가 떨어지는 자신을 받아들인 순간 느꼈던 전율은 아직까지도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고장난 심장은 지금도 쿵쾅대고 있다.

더없이 행복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없이 혼란스럽기도 하다. 사랑임에는 틀림없다. 허나나 혼란스럽다. 이불보에 오줌을 지린 꼬맹이처럼, 혹은 발정난 채로 방치된 치와와처럼 어쩔 줄을 모르겠다. 뒷목도 땡겨오고, 목구멍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마구 토하고 싶은 기분도 살짝 든다. 정말로 살짝.  더러운데, 그야 첫사랑인 걸.

그러고 보니 자신은 어째서 사랑에 빠지게 되었더라? 그녀가 위험에 빠진 자신을 구해줘서? 아니, 그건 맥락중 하나일 뿐이고 단지 본능에 이끌렸을 뿐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이, 지극히 당연한 본능에 가깝다. 시시한 원인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니까. 그리고 그렇기에야말로 그것은 운명적이리라. 영원히 변치 않고 바뀔 수도 없는 운명, 예컨대──

바로! 진정한! 사랑! 씨발!

"아아…! 흑고오오옴!"

"네,아가씨."


무심코 교태어린 비음이 흘러나왔지만, 다행이 목석같은 남자는 딱히 그것에 신경 쓰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녀의 발치 근처에서 조용히 부복할 따름이랴.

만약 그런 기색을 조금이라도 내비쳤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리라. 왜냐면 이제 자신은 임자가 있는 몸이었으니까. 보건 윤리 개념은 박혀있지 않더라도 정조 개념만큼은 제대로 박혀있는 규중처녀이니까.

"이시아에게, 아니 우리 시아 씨에게 경호원 몇 명을 붙여주세요. 전부 위장에 능한 사람들로."

원래부터 호모섹슈얼도아니었고, 처음에는 단순한 흥미 때문에 접근했다. 모두가실없는 웃음을 짓고 희희낙락하는 교실에서, 오로지 그녀만이 인생이란 좆같소, 라고 말하는  진정으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생긴 주제에  주인을 잃은 유기견처럼 보였었다.

본디 인간이란 남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길 꺼리는 생물이다. 그런데 그렇게나 대놓고 우울함을 풍겨대는 사람은 처음이라 흥미가 동해버린 거다. 혹여나 다가가보면 뭔가 재밌을 것 같다는 어린마음에, 어줍잖게 말을 걸었고,  결과 그녀의 진면목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화도 잠깐 냈지만, 어쨌든 이러쿵저러쿵해서 사랑에 빠져버렸다.

마지막 과정이 엉망진창이지만 이 이상으로 자세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왜냐면 그건 본능이니까. 그저그렇게 밖에는 설명이 안 되니까.

"미행…이라도 하시라는 겁니까?"

“뭐, 비슷하네요. 엄밀히 말하자면 사랑의 추적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알아두세요.
아, 그러고 보니 시아 씨가 학교에 있을 때, 집 안에다 카메라를 설치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욕실이랑 방에는 특히 각도를 주의해서 설치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사람을 붙이도록 하죠. 몰래카메라 설치는 내일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아, 흑곰.그런 식으로 말하면  범죄 같잖아요? 알아요? 이건 소녀의 사랑이라구요. 좀  단어 선택에 신경을 써주세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무튼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틀림없다. 의구심에 찬  아무리 곱씹어 봐도 이 감정은 사랑이 맞다. "이자나는 이시아를 사랑한다", 산출 과정이 어떻든  명제는 절대적으로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명령 또한 지극히 정상적이리라. 자신은 아직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게 쥐뿔만큼도 없으니. 그녀에 대해서 더욱알고 싶다. 이시아라는 인간을 낱낱이 파헤치고 싶다. 그녀의모든 것을, 이 눈과 머리 안에 담고 싶다.

그러네. 지극히 정상적인 욕망과 그에 따른 반응이야. 모름지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더욱 알고자하는 게 정상이 아닐 리가 없잖아? 무엇보다 사랑은 스스로의 손으로 쟁취하는것이니.

"시아 씨…아니 시아야…"


그렇게 차근차근, 그녀의 일상을 기록해 나가다보면──꽁꽁 숨겨둔 그 비밀이 뭔지, 곧 싫어도 알게 되겠지.

방문을 밀고 나가는 경호원의 등 위로 시아를 투영하며, 이자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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