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7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37/73)



〈 37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덥다고 교실에만 짱 박혀 있으면 안 돼! 자자, 빨리 스트레칭부터 하자!"

"아이 선생님~너무 더워요~"

"엄살 부리지 마! 스트레칭 다하면 운동장 3바퀴 돈다!"

"아 진짜!"

불쾌하리만치 환히 불타오르는 태양이 이리도 밉살스러운 적이 있었을까. 요즘 따라 유난히 기승을 부리는 무더위에,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손등으로닦는다.전신이 습기에 축축하게 절여진 기분.

폭염주의보가 울린 날. 이런 날에 야외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는 분명 제정신이 아닐 테지. 아니면 더위를제대로 먹었거나. 열정도 지나치면 독 밖에 되지 않거늘.

"이런 날씨에 나가서 운동이라니, 미친 거 아냐?"

"레알…우리 체육 좀 미친 것 같아…개짜증."

바로 뒷줄에서 수군거리는 대화에 격하게 공감하는 바이나, 그래도 이런 뙤약볕에 나와서 맘에 드는 점이 딱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의 곁에 언제나 붙어 다니는 징그러운 거머리 또한  뒤져버릴 것만 같이  늘어져있다는 것이다.

"흐에에…"

"…쯧"


스트레칭이랍시고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언제나의 공포도 사그라들고 만다. 차라리 저대로 쪄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내리쬐는 태양빛이 더 강해지길 남 몰래 빌어본다. 비린내 나는 오징어찜이 되든 문어찜이 되든 저 상판떼기만 더 이상 안 볼 수 있다면 상관없으니.

이렇게나 간절히 남의 죽음을 바란 적이 있었던가. 전생에는 몇 번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 이번 생에서는 처음일 거다. 그야 그만큼 행복한 인생이었으니까. 저 망할 년을 만나기 전까지는.


"헛 둘, 셋 넷…"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생을 두 번이나 겪어보면서 깨달은 건, 대체로의 인생은 좆같다는 것이다. 다른  있다면 처음부터 좆같거나,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차츰 좆같아지거나의 차이.

무더위보다도 불쾌하게 치근덕거리는 빨간 머리에게서 신경을 끈다.  뭣 같은 대치상황이 얼마나 더 갈런지는 몰라도, 어차피 남겨진 결과는 파멸뿐이다.

=

"오늘은 남녀 나눠서 남자는 발야구, 여자는 피구를 한다. 체육부장! 창고에서 공 가져─"

"제가 대신 가져오면 안 될까요 선생님!!"


불구덩이 지옥과도 같던 운동장 뺑뺑이가 끝나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교사의 말에 이자나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손을 쳐들었다. 갑자기 큰 소리를 내는 이자나에게 반의 이목이 집중되었지만, 뻔뻔스레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뭐, 그러렴."

"저 그런데…제가 창고 위치를 몰라서 그런데, 반장하고 같이 가도 될까요?"

"그러고 보니 온지 얼마 안 된 전학생이라고 했지? 그럼 반장, 네가 안내해줘. 여기 열쇠."

"…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굳이 자신을 지목하여 끌고 가는 불가사의함에, 시아의 얼굴이 레몬껍질을 통째로 삼킨 것 마냥 일그러졌다.

물론 이자나는 이번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자애들이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건,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그녀를 보고수군거리건, 이자나는 좆도 신경 쓰지 않고서 당찬 걸음걸이를 이어갔다.

오히려 시아의 경멸 어린 그 표정과 마주하는 순간 하복부에서부터 올라오는 짜릿한 쾌감에 이자나는 가볍게 절정하고 말았다. 땀과는 다른 액체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아랫도리의 속옷.

정녕 변태란 말인가? 허나 다르다. 왜냐면 이자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늪에푹 빠진 소녀였으니까. 사랑하는 이에게서 주어지는 것이라면 혐오조차 달게받아들이리.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있는 지금, 이쪽을 죽일 듯이 쏘아보는 강선아의 시선마저도 달콤한 쾌락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축축해진속옷은 자택에 돌아가자마자 갈아치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자나는 예비 연인을 향해 언제나의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창고 위치를 모른다는 말은 당연하게도 거짓말이었다.

"후아, 뜨겁네요."

"…"


가뜩이나 햇볕이 잘 드는 교사 뒤편에 위치한 체육창고는 완전히 밀폐되어 있는지라 찌다 못해 타죽을 것 같은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녹슨 문을 거리낌 없이 열고 안으로 들어간 이자나는 순식간에 화끈해진 얼굴을 손부채로 식혔다. 사슴처럼 가는 목덜미를 타고 끈덕진 땀줄기가 길쭉하게 늘어졌다.


"…공이나 빨리 찾고 돌아가자."

어느  창고 안으로 들어와서, 그렇게 말하는 시아의 얼굴은 그야말로 껄끄러움으로 가득 차있었다. 덤으로 죄의식 비스무리한 것도 티스푼 정도.

설마 더위 때문은 아닐 테고, 아마 아직도 엇저번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겠지. 정작 이자나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다를거다. 그녀는 무척이나 상냥하고……또 쓸데없이 상냥하니까. 애초부터 그런 사람이니만큼, 자신이 내뱉었던 유치한 폭언이 신경 쓰여 어쩔 수가 없는 거다.

다소 약은 편인 자신과는 안 맞을지언정, 이자나는 시아의 그런 무른 점까지도 좋아했다. 물론 이자나가 싫어하는 시아의 부분은 하나도 없었지만.

묵묵히 앞으로 나서서 창고 안을 둘러보는 시아. 그 모습을 눈여겨보면서 이자나는 주머니 속에 숨겨두었던 무전기를 조용히 꺼내들었다.

'흑곰, 지금이에요! 문을 잠가욧!‘

"응? 지금 뭐라고 말했어?"

"아, 아무 것도 아니랍니다!"

-철컥

"이 소리는…"


이자나가 당황해서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 사이 무언가 걸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이자나를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흑곰이 밖에서 문을 잠그는데 성공한 모양이다. 만약  알아듣고 얼이라도 탔으면 바로 할복하라고 명했을 텐데, 살짝 아쉬운 기분.

"이거 완전히 잠겼네……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잠겼다는 소리를  번도 못 들어봤는데, 어째서 매번 내가  때만 이러는 걸까."

끼익끼익. 걸쇠가 문틈에 부딪히며 나는 불쾌한 소음. 단단하게 고정된 문을  번 밀어보던 시아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로 미루어보건대 아마 전에도 체육창고에 갇힌 적이 있나보다.


"아앗, 완전히 잠긴 건가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다른 사람이 찾으러와줄 때까지 기다리죠."

어차피 공이 없으면 수업도 시작 안 될 테니, 곧 다른 사람이 상태를 확인하러 올 것이다. 그럼  사람한테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면 되겠지.

이자나는 그렇게 설득하면서 먼지 낀 농구공이 가득 들어가 있는 박스 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시아도 그 근처에서 적당한 곳을 찾아 허리를 내렸다. 이자나는 하필이면 맞은편에 앉은 그녀의 몸매를 위아래로 재빠르게 훑었다.


'시아 씨는 다리가  이쁘네요…'


머리도 성격도 발랑 까진 변태 아저씨가 아닌 이상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언제까지고 우아한 아가씨여야 하는데, 눈부신 다리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짧은 반바지 형태인 체육복 아래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각선미. 건강한 살구색 피부가 눈부실 만큼 뽀얗다. 그 위를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투명한 땀 한 방울을 게걸스럽게 핥아 먹고 싶다. 그 대신 이자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어차피 잠시 동안은 여기서 나가지도 못  테니, 그럼 잠시 말이나 나누는 건 어때요? 마침 당신하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기도 하고."

"이야기?"


─오, 안 돼, 지금은 안 돼. 어차피 언젠가 따먹을 건데 왜 지금은 안되냐구? 그야 지금은 때가 아닌 걸.

2차방정식도 못 뗐는데 미적분을? 선생님, 진도가 너무 빠르다는 이야기. 누구나가 마음의 철창 속에서 기르고 있는, 슬슬 지랄발광을 시작하려는 발정난 치와와 한 마리. 이자나는 애써 그것을 억누르며 일견 여유로워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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