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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38/73)



〈 38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어차피 잠시 동안은 여기서 나가지도 못할테니, 그럼 잠시 말이나 나누는  어때요? 마침 당신하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기도 하고."

"…나는 딱히 하고 싶은 얘기가 없는데."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이자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자나는 여전히 입에 걸린 환한 미소를 유지한 채로, 시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짙은 녹색 빛깔의 동공이 호기롭게 빛났다.

"혹시 제가 껄끄러우신 건가요?"

"그렇다고 한다면?"

"뭐어, 상관없어요. 어차피 저번 일은 명백히 제가 잘못한 거니까. 그래도…그  때문에'죄송합니다'라는 말이 하고 싶어서요."


최대한 미안한 척, 혹은 죄송스런 척. 판사 앞에 선 범죄자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면서고개를 푹 숙인다. 먼저 사과를 해올 줄은 몰랐던 것인지 시아는 어깨를 흠칫하고 떨었다.


"정말로 죄송해요. 그때는, 제가 너무 건방졌었죠?"

"야…!"

옅게 뿌린 향수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돈으로 그녀를 꾀려하는 자신, 그런 자신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그녀. 그리고 계단에서 실족하는 자신과. 그런 자신을 멋지게 받아들이는 그녀. 불과 3일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정말로 아련한, 동시에 지극히 몽환적인,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던 그 기억을 말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거칠어지는 호흡을 진정시키고, 잿빛 플래쉬백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45도쯤 내린 시선은 하염없이 지면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자나는 시아의 반응을 대강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 지금쯤 무척이나 허둥대고 있겠지. 은근슬쩍 고개를 들어보면 아니나 다를까.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귀여운 모습이 시야 안에 선명히 각인되었다. 살며시 마음속의 은꼴 폴더 안에다 저장.


"…됐어. 애초에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으니까. 오히려 나야말로, 꺼지라느니 닥치라느니 멋대로 막말해서 미안해."

"후후, 저는 괜찮답니다. 심한 말을 내뱉은 것은 저 또한 피차일반이니."

"그럼…됐고."


 손을 조신하게 무릎 위에 둔 채로 이 쪽을 힐끔거리는 모습이 미칠 듯이 귀여워서, 이자나는 그대로 달려 나가 시아를 끌어안으려는 충동을 간신히 억제했다. 맘만 같아서는 곧장 그녀를 넘어트리고 땀에 젖은 그녀의 채취를 흠뻑 들이마시고 싶었지만, 섣부른 행동은 되려 반발감만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이자나는  알고 있었다.

모름지기 모든 일에는 단계와 과정이란 게 있는 법이다. 섹스를 하기 전에는 애무부터, 애무를 하기 전에는 키스부터 하는 게 도리이다. 뭐 요즘 세상에는 다 건너뛰고 바로 섹스부터 시작하는발정 난 종자들이 넘쳐나긴 하지만, 시아는 그것들 하고는 달리 순결한존재이니까. 애완 쥐를 다루는 것처럼 만질 때는 조심스레 접해야 된다.

이자나는 고개를 다시 쳐들고 자신에게는 여러모로 이질적인, 검은 눈동자를 정면에서 마주하였다. 곧 그녀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시아 씨는 좋은 분이시네요."

"하, 내가?"

난데없는 칭찬에시아는 어이없다는 듯이 실소했다.


"네, 눈을 보면  수 있는 걸요. 시아 씨는 좋은 사람이다, 라는 걸."

나긋나긋 말하면서도 이자나는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개뿔. 이딴 멍청한 소리를 만약 진심으로 지껄이는 인간이 있다면, 그 녀석은 초능력자이거나, 남한데 뒤통수 맞기 좋은 호구새끼에지나지 않을 거다.

이자나는 적어도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시아가 호인이라는 사실을   있었던 것은 단지, 싫어하는 자신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구해주었기 때문이지. 그 놈의 엿 같은 직감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약간의 뒷조사 또한 있었고.

"잠시 옆에 앉아도 될까요?"

"…상관없어."

무심한 듯한 긍정이 툭 내뱉어지자마자 이자나는 시아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주먹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이지나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어깨에 자신의 가슴을은근히 밀착시켰다.

그러자 슬쩍 엉덩이를 떼서 조금 떨어진 데 앉는 시아. 옆에 있는 존재를 명백히 부담스러워하는 태도. 백지장 같이 새하얀 볼가가 어느 새 은은한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소녀라기보다는, 꼭 동정 애송이 같은 반응이다. 그 풋풋한 모습을 본 이자나는 즐겁다는 듯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시아, 시아, 시아, 시아야?"

"뭐."

"헤헤, 이러니까 꼭 친구가 된 기분이에요. 아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진짜 친구가 되지 않을래요? 저, 요전번에 휴대폰이란 것도 샀답니다! 아직 연락처에는 아무도 없지만."

'친구'라는 단어에 반사적으로 어금니를 꽉 깨문다. 미간을 한껏 좁힌 그 얼굴은 그러나 이자나의 말에 화났다기보다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 보였다.

시아는 살짝 창백해진 낯빛으로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애써 떨어트렸다.


"…미안한데, 그 제안은 거절할게. 그리고 이 이상 내게 다가오지 말아줘."

"네? 왜요?"

"이유는 몰라도 돼. 아무튼 더 이상 나한테 말 걸지 마. 괜히 친한 척도 하지 말고. 친구 같은 거, 그저 귀찮을 뿐이니까."

"하지만 저는 정말로 당신과 친구가─"

"됐으니까 다가오지 말라고!"


하아, 하아. 한 순간에 격정을 토해낸 시아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자나는 그런 시아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알겠어? 좆같으니까 나한테서 꺼지라고, 응? 제발 부탁이니까 씨발!"

"왜죠?역시 강선아 때문인가요?"

"…너, 그걸 어떻게."

돌연 튀어나온,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이름에 급속도로 냉각되는 분위기. 이제 시아의 얼굴색은 창백한 단계를 넘어서 핼쑥해지기 시작했다. 지나칠 정도로 알기 쉬운 반응이었다.


"당신이 교실에서 그 여자한테 빌빌대는 모습을 본다면 아마 누구라도   있을 걸요? 당신이 그 여자한테 쩔쩔맨다는 사실쯤은."

"너 따위가 뭘 안다고…!"

짝.

비좁은 창고 안에 울려 퍼지는 선명한 마찰음. 이자나는 순식간에 자신의 뺨을 때리고, 멱살을 휘어잡은 시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분노와 공포와 절망이 한데 뒤섞인 채로 공존하는  위에서, 살벌한 안광이 자신을 죽일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싸대기를 얻어맞은 이자나의 왼쪽 뺨은 서서히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따갑고도 뜨거운 느낌. 이게 바로 고통이라는 걸까. 당연히 처음 느껴보는 것은 아니지만,역시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고통마저 사랑하는 그녀가 준 것이라 생각하면, 기분은 썩 나쁘지 않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시아 씨를 도와주고 싶은 걸요."

"하, 왜? 내가 계단에서 떨어지는 네 몸뚱아리를 받아줘서 그러는 거야? 그거에 대한 보상이라면 필요 없어. 그러니─"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하아? 널 욕한 사람하고 친구가 되고 싶다고? 정신 나간 거 아냐?"

"네, 그래요! 왜냐면 당신이 절 매도해준 덕분에 제가 바뀔  있었으니까!다소 거칠긴 해도, 오직 당신만이 내게 진심어린 말들을 해주었으니까!
그런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대체 뭐가 잘못됐다는 거죠!?"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자나는 자신을 매도하는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 만큼 유들유들한 신경을 지니고 있지 않았고, 매저키스트는 더더욱 아니었다.

자신을 거스르는 인간에게 어느 누가 좋은 감정을안을까. 상대가 누구건 자신을 욕보인다면 철저하게 짓밟고 박살낼 뿐이지. 이자나는 지금껏 그렇게교육받아왔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 자신의 삶에 후회가 있냐고 묻는다면, 굳이 대답할 가치조차 없겠지.

물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라면 겨우 매도 정도가 아니라, 진심 어린 저주마저도 기쁘게 받아줄 자신이 있지만, 그녀가 이시아를 사랑하게 된 건 어디까지나 그 후였으니까. 엄밀히 말해서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이유와는 다르다. 그것은 그저 운명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 자체는 진심에 한없이 가까웠다. 수없이 많은 거짓으로 치장된 이자나 그레제, 혹은 이사카 파울 라이드리히라도, 이시아를 사랑한다는것만큼은 누구도 부정 못할 뚜렷한 진실이었다.

그렇기에 이자나는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단순히 만들어졌을 뿐인 투명한 액체가 아닌, 진짜배기 슬픔을.


"흑, 흐윽…"

"…너 정말로."


설마  줄이야 몰랐겠지. 점차 물기가 번지기 시작하는 이자나의 얼굴에, 시아는 당황하면서 입을 닫았다.

그렇게 시작된 정적은, 이윽고 사라진 그녀들을 찾으러 온 교사가 창고의 문을 거칠게 열어제낄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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