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9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39/73)



〈 39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오늘 무지 더웠지 않아? 그런데도 야외 수업이라니, 역시 우리 체육은 좀 맛탱이가 갔다니깐. 자기도  뻘뻘 흘려댔으면서. 열정 넘치는 건 좋지만 가끔 보면 변태 같은 게 아닐까 싶어."

"…"


선연한 주홍의 노을빛이 아스팔트 바닥을 색다르게 조명하는 하굣길. 바로 앞에서 걸음을 옮기며 시끄럽게 조잘대는 강선아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는다. 듣고 있진 않지만 어차피 쓸모없는 얘기일 게 뻔하다. 애당초, 지금  머릿속은 무언가를 들을 여유조차 없이 다른 것으로 가득 차있으니까.

'그런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먼지로 텁텁한 창고 속에서 뚜렷이 울려 퍼지던, 그 생생한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맴돈다. 귀를 틀어막고 잊으려 해봐도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귓바퀴를 일주하여, 고막에 틀어박힌다. 마치 약물을 들이키고 느끼는 지독한 환청과도 같다.

친구라. 좋은 말이라고는 생각한다. 비록 눈앞에 있는 살인범이 그 단어의 의미를 심하게 변질시키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새로운 친구를 사귈 생각에 못내 가슴이 부풀기도 했었고, 실제로 몇몇 사람들과는 정말로 친구가 될 수도 있었다. 단지 강선아만 없었더라면, 아니, 그녀가 살인마란 진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의 시간은 꽤나 즐거웠으니까. 빈 말이 아니라 정말로, 즐거웠다.

그래, 우리 둘은 친구였었다. 가끔은 차라리 아무 것도 몰랐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할 정도로, 절친했던 친구.

그렇지만 피와 시체, 그리고 죽음──각인처럼 박힌 그 끔찍한 기억들은 결코 지워 내리지 못한다. 그  이후로 우리 둘은 더 이상 단순한 친구 사이로 남을  없었다. 내게 일그러진 관계를 억지로 강요하는 그녀 또한 아마  알고 있는 사실.

이전의 관계가 그립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녀를 명백한 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이렇게 같이 있노라면, 그때를 꿈꾸고는 하는데, 우습지도 않지.

나는 어쩌면, 아직도 강선아를 친구라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녀는 내 주변 사람을 죽이고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갔지만, 만약 그녀가 지금이라도 제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구한다면,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용서해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답이 없는 얼간이에, 멍청이니까.

화창한 봄날의  학기부터 지금까지, 여러 일들이 있었고, 그 대부분은 강선아와 관련된 것들이다. 살며시 눈을 감아보면 그녀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순간들이 비눗방울처럼 새록새록 떠오른다. 몇 달 지나지도 않았건만 무척이나 아련하게 느껴지는 추억들이다. 아주 오래 된 것처럼 느껴지는 향수.

 수만 있다면, 그 때로 되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은 참,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쓸데없는 희망 한 조각을 소중한 듯이 품고 만다. 바보처럼, 덧없게도.

"그러고 보니 그거 알아? 역 앞에 있는 올영있잖아. 이번 주말에 거기서 행사한데! 괜찮으면 나랑같이─"

"선아야."

"응, 왜?"


옅은 샴푸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앞서가면서 조잘거리던 선아가 뒤를, 그러니까 내가 있는 쪽을돌아보며 방긋 미소 짓는다. 그녀가 선배를 잔인하게 죽이기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않은, 마치 그린 것 같이 순수하고 깨끗한 미소. 지금 이 순간이 정말로 소중하다는 듯이 행복해 보인다. 그런 모습에 조금은 안심한다.


"시아야?"

그러나 이 뒤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다시금 슬퍼진다. 발을 멈춘 채 석상처럼 가만히 서있으니 선아가 얼굴을 굳히면서 내게 다가온다. 내 모든 것을 뺏어간 주제에 정말로 걱정스럽다는 얼굴이다.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못내 역겹게 느껴져서, 더욱 슬프기 짝이 없다.

어째서 나와 그녀는 이렇게, 이런 엉터리 방식으로 맺어진 걸까. 단순한 비애, 혹은 퀘퀘 묶은 회한.나는 다만 충동적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목을 향해 양손을 내뻗었다.

"─큭!"


손바닥으로 선아의 하얀 목덜미를 스윽 감싼다. 움푹 들어가 있는 목울대를 꽉 쥐고 누르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지면서 꽥꽥거리는 신음을 내뱉는다.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다.

가늘다. 그리고 약하다. 그렇게나 괴물 같던 여자의 목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스무 명이나 넘는 사람을 잔혹하게 살해한 살인마의 목숨줄이 지금은 온전히  손아귀에 달려있다. 어째서 저항을 하지 않는 건지 의문이 들지만 동시에 깨닫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거. 그저 앞으로 한 발짝만 더 내딛으면 된다.


"칵, 카학…!"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너는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으니까. 그 대신, 나도 곧 따라갈 테니까..."

아무리 증거인멸을 깨끗이 한다 해도, 그렇게나 많은 사람을 죽여가면서 경찰의 수사망을 벗어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마도 뒤를 봐주는 사람이, 그것도 경찰청 내부에 있는 것이겠지. 그러니 경찰에게는 기댈  없다. 나보다 훨씬 똑똑한 언니라면 어떻게든 그녀를 멈출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언니에게만큼은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직접 그녀를 멈춘다면, 그녀를 이 손으로 죽인다면 그걸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녀의 손에 의해 또 다른 누군가가 상처입지 않을까 걱정하며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고, 나의 가족 또한 안전해진다.  이상 내가 괴로워할 일도 없을 테고, 그녀 또한 나에게 괜히 집착하며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그래, 내가 그녀를 멈추기만 한다면, 아니, 죽이기만 한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어쩌면 조금 더 좋은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에 나는 너무 지쳐있었고, 한때는 가장 소중했던 나의 친구를 너무나 증오하고 있었다.  몸을 추잡하게 더듬어대는 손길보다도, 나를 억압하는 그녀의 시선보다도, 자신 안에 있는 그 감정이 무엇보다도 버겁게 느껴졌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그녀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가 저지른 죄는 너무 컸다.

이런저런 이유를 늘어놓아도 결국, 나는 내가 힘들고 지치니까 그녀를 죽이는 것이다. 사소하지만 겨우 그것뿐이다. 애초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 있어 그렇게거창한 이유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꽈악

목을 억세게 쥔 채로 팔을 높이 들어 올리니  밑의 몸이 저절로 딸려온다. 짧은 교복 치마 아래로 늘씬한  다리가  길을 잃은 채 버둥거린다. 색스럽다기보다는 뭍에 막 올라와 팔딱거리는 금붕어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다. 비실거리면서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 그런데 눈가는 축축하다. 직접 보진 못하지만 반드시 기분 나쁜 얼굴이겠지.

그렇게 불쾌한 환희에 감싸이면서 죽어가는 친구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처음 봤을 때 반했던, 그 예쁘장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더러운 군침을 줄줄 흘려대면서,


"하하…"


어째선지, 기분 좋은듯이 웃고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아, 아아…!"


그 순간 자신에 대한, 하수도에 고인 오물을 맨손으로 만지작거리는 것보다 더한, 참을  없는 역함이 뇌리를 엄습한다. 얼른 손아귀의 힘을 풀고서 선아로부터 멀어진다. 엉덩이부터 바닥에 떨어진 선아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면서 푸른 멍이 번진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달려가서 어루만져주고 싶어질 정도로 애처롭고 안타까운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차마 그런 선아에게로 다가갈  없었다. 분명 목을 조른 것은 나인데도 되려 내가 졸린 것 같이 눈물보가 터져 나왔다.

"으, 흐윽…"

"울지 마, 시아야."

미약하게 들뜨던 고양감은 사라진지 오래, 대신 불안감이  빈 자리를 차지한다. 삐걱거리는 머릿속의 톱니바퀴. 수전증을 앓고 있는 것도 아닌데 선아를 죽이려한 손끝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아무리 되뇌여 봐도, 손의 떨림은 멎지 않는다. 변함없이 새하얀 손바닥이 그  밤의 그녀처럼 피로 얼룩져 보인다.

힘없이 주저앉은 내게, 선아는 목소리가 좀 쉰 걸 제외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말을 걸면서 다가왔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냐니. 그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아가 날 직접 죽여주는 거잖아. 조금 아프긴 해도, 무척이나 기쁜 일인 걸."

어느 새 코앞까지 다가온 선아가, 부드럽게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나 같은 놈이라도 처음 죽인 인간의 얼굴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걸. 나보다 훨씬 상냥한 시아라면 분명히 그걸 평생 잊을 리 없을 테고, 그렇게나마 나를 영원히 기억해준다면, 나는 그걸로 됐어.
물론 내가 죽은 이후에 다른 녀석들이 너에게 들러붙을  생각하면 배알이 꼴리지만, 어차피 죽고 나면 더 이상 질투하지도 못 할 테니까. 그러니까, 그거면 됐어."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강간한 주제에, 반항하면 내 주변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한 주제에, 이제 와서 순수해 보이는 얼굴로, 착해 보이는 얼굴로, 이전과 같이──뭘 지껄이고 있는 거야?

어지럽게 헝클어지는 머릿속.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혼란스러워하는 날 보면서 선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정말로 부드럽고 따뜻하게, 마치 언니가 날 바라볼 때처럼.

"너,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어, 진심으로."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선아는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그 속에 광기라고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다소 일그러졌긴 해도, 어디까지나 순수한 애정.

어두운 갈색의 동공에서 그 감정을 엿본 순간 본능적으로 알  있었다. 내가 그녀를 아무리 증오하고 미워하더라도, 나는 그녀를 죽일 수가 없다는 걸. 나만으로는 절대로 그녀를 멈추게  수 없다는 걸.

비겁하게라도, 남의 손을 빌려야한다는 걸.


'하지만 저는…당신을…시아 씨를 도와주고 싶은 걸요.'

다음 순간 떠오른 것은 친구도 뭣도 아닌 타인의 절박한  마디. 얄궂기도 하고 얍삽하기도 하다. 어쩐지 그런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스럽게 느껴져서, 무심코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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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정이 지난 어두운 밤, 막 이불을 덮은 이자나는 요란스럽게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얼른 집어 들어 귓가에 댔다. 곧, 요 사이 들어 지나칠 정도로 익숙해진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나즈막히 울려 퍼졌다.

"…도와줘."


단  글자. 그렇지만 정말로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갛게 달아오른 두 뺨으로, 이자나는 만면의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예상보다 다소 빠르긴 했지만, 애초부터 정해진 답은 하나였다.

"예, 기꺼이."

지금은 그저 행복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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