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오후 2시 반. 시끄러운 매미 소리에 전신이 나른해진다. 바깥의 열기와 함께 늘 그렇듯 따분한 수업은 계속되고 있다. 시간이 마치 멈춘 것만 같은데, 바늘촉처럼 날카로운 시계바늘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다.
오늘 역시 화창하다 못해 태양이 저주스러워질 정도로 푹푹 찌는 날씨. 조금 과도하게 온도를 낮춘 에어컨 바람이 싸하게 흐르고 있는 교실. 목재 교단 위에서는 배불뚝이 역사 선생이 일제의 잔악한 침탈에 관하여 한여름의 열기에도 지지 않을 만큼 열정적인 언변을 토해내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귀 기울일 수 없었다.
얇은 커튼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받은 금발이 화사하게 빛난다. 거무칙칙한 흑발들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눈에 띠는 그것을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그녀 또한 내 시선을 눈치 챈 것인지 이윽고 고개를 돌리고 은은한 눈웃음으로 화답해준다. 그 순간 언뜻 비친, 여름결의 나뭇잎처럼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에 담긴 것은 오로지 깨끗한 호의뿐이어서, 무심코 주저하고 만다. 저도 모르게 애꿎은 주먹을 억세게 틀어쥐고 만다.
도와달라고, 어젯밤은 술에 취한 것처럼 충동적으로 지껄였다. 그래서 망설이고 만다. 자꾸 해매이고 만다. 되풀이되는 의구심이 방향키를 마구잡이로 돌린다. 혼란이 병목 되는 나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해오는 이자나에게서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정말로 나 같은 인간과 친구가 되고 싶은 것 같지만, 아무리 좋게 변명해도 나는 그녀를──그녀가 가진 권력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저 자신의 부서진 일상을 되찾기 위해서, 설령 그것이 반대로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다. 정직하게 그런 욕을 들어도 싸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원래부터 이렇게 비열한 녀석이었으니까. 더럽고 이기적인 놈이니까. 다만 지금까지는 그 사실을 유연하게 숨겨왔을 뿐이다.
"흐음…"
옆 자리에서는 선아가 선생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내 오른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애꿎은 검지를 굽혔다 펴보기도 하고, 딱딱한 손바닥을 손톱 끝으로 살살 긁어보기도 하고, 그렇게 고양이가 장난감을 다루듯이 정신없이 꼼지락거리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순수하고 귀여운 모습이지만, 하얀 블라우스 깃 사이로 목덜미에 선명히 찍혀있는 새파란 손바닥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그 지독한 흔적에 죄악감이 있으나마나 한 양심을 바늘처럼 콕콕 찌른다. 그러나 아프다고 말할 자격조차 내게는 없다.
터럭 같은 가슴이 골을 품은 듯 깊게 패였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얼마나 새삼스러운지. 이럴 바에야 차라리 그때 선아를 죽여야만 했다. 어차피 지키지 못할 우정이라면, 착해지지 못할 거라면 그렇게 끝없이 더러워지기라도 해야 됐다. 이런 이도 저도 아닌 위선자 따위가 아니라.
어차피 지금 와서는 전부 뒤늦는 후회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하고 마는 게 바로 후회라는 감정이다. 어찌 보면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으로 짓궂다. 언니가 나대신 차에 치인 그 날, 차라리 내가 치이고 그냥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걸.
"나 잠시 화장실 다녀올게."
2시 50분이 되자마자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한창 달아오르고 있던 수업이 맥없이 끝난다. 그리고 다시금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는 교실 안. 유명한 연예인이나 가벼운 연애 상담, 따위의 시덥잖은 잡담들. 그 소음들 사이에서 돌연 선아가 가볍게 내 어깨를 툭 치고 자리를 떠난다. 이제는 자유가 된 오른손을 멍하니 바라본다. 미묘한 온기가 남아있는 손.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면, 나를 제외한 모두가 다른 누군가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모두 입고 있는 딱딱한 교복을 나 또한 차려입고 있는데, 오직 나만이 이 공간에서 동떨어진 듯 창가 쪽의 비좁은 구석자리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있다. 오직 나만이, 오직 나만이.
그래도 반장이 되고나서부터는 반 애들과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두가 내게 다가오려조차 하지 않는다. 딱히 그들이 날 왕따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들을 가차 없이 쳐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왜냐면 강선아에게 있어서 친구란 유일한 존재여야만 했으니까. 강선아의 유일한 친구가 나이듯이, 나의 유일한 친구 또한 강선아여야만 했다.
죄악에 대한 응보인가?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이제서야 겨우 제자리를 찾아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애초에 나 같은 인간한테는 이런 쓸쓸한 자리야말로 어울린다. 고독함만이 켜켜이 쌓이는 곳.
"안녕하세요, 시아 씨. 좋은 오후네요, 그죠?"
"…응."
나는 혼자여야만 하는데, 그런 내게로 이자나는 거리낌 없이 다가왔다. 립스틱을 바른 듯 살짝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달싹였다. 이윽고 그녀는 내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종례 끝나고, 저번에 얘기를 나눴던 음악실로 오세요. 도와드릴게요."
"나는…"
해바라기가 피듯 활짝 웃은 이자나가 나를 바라본다. 애써 그녀의 녹색 눈에 시선을 맞춰보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고 만다.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상냥했다. 그리고 그 점이 내게는 더 큰 죄악감을 안겨준다.
급조해낸 문장은 굳게 다물어진 입이라는 자물쇠를 끝끝내 열지 못하고 산산조각 부서진다. 하고 싶은, 그리고 해야 할 말은 많지만 결국 비겁한 침묵 뒤에 숨는다. 그러나 이 침묵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그녀도 나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자나는 그저 조용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친구가 아닌 연인의 것을 대하듯 지극히 따스한 손길이었다.
"오실…거죠?"
자기혐오. 결국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이 정말로 역겹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