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1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41/73)



〈 41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저…선아야."

"응? 왜?"


방과 후. 모두가 짐을 싸는 와중에 선아를 부른다. 그녀는 짐을 싸던 손길을 멈추고서 나를 바라본다.

바로 어젯밤 이 손으로 그녀를 죽이려고 했는데도, 언제나의 따뜻함을 담은 적색눈동자가 지긋이 나를 바라본다. 지금까지는 그것의 정체가 그저 우정, 혹은 일그러진 집착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뭔지 똑똑히 알 수 있다. 태양과 같이 뜨겁고도 거대한 애정. 그 아지랑이 같은 비틀림 앞에서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저 서있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목이 졸리는 것만 같았다.

"오늘 반장 일로 교무실에 가봐야 해서…먼저 가지 않을래?"

"괜찮아. 기다릴게!"

"그, 그래도 꽤나 오래 걸릴 예정이라…"

"흐음…그래도 시아랑 같이 하교하고 싶은데."

잠시 동안 턱을 괸 채로 고민하던 선아는, 이내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먼저 갈게! 아, 그래도 너무 늦게까지 학교에 있지는 마?"

"으응."

"안녕, 내일 보자!"


선아가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든다. 그에 나 또한 마주 손을 흔들어준 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물론 걸음이 향하는 끝은 교무실 따위가 아니었다.

=


"아, 오셨네요."


음악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자나는 창가에 엉덩이를 붙인 채로 쎄한 바람을 쐬고 있었다. 노을빛이 그녀의 얼굴을 주홍색으로 조명했고, 바람결에 벌꿀처럼 진한 금발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마치 파스텔톤이 지나치게강한 그림을 보는 것만 같다. 환상적이기까지  그녀가 그린 듯이 정교한 미소와 함께 날 반겨준다.

문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압박감에 심장이 짓눌려터질 것만 같았는데, 어째서일까. 이제 와서 그녀의 아름다움에 취하기라도 한 걸까. 마치 한 순간 이곳이 극장이라도 된 듯 스크린 너머의 배우를 바라보는 것처럼,  것도 아닌 그 광경은 너무도 비현실적인, 그렇기에 무엇보다 무거운 리얼리티를 품고서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입을 다문 채 침묵하는 내게로 이자나는 돌연 허리를 숙였다. 그것은 예법 같은 것은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우아한 모양새였다.

"안녕하세요, 이자나 그레제라고 합니다."

"…안녕."


꼭 오늘 처음 보는 사이인 것 같이 새삼스런 인사와 소개. 당황하면서 뒤늦게라도 답을 돌려주니 이자나는 싱긋 웃으며 이리 오라는 손짓을 한다.

유령처럼 비적비적 무거운 걸음을 뗀다. 이윽고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만큼 가까운 거리에 이를 때쯤에서야, 비로소 걸음을 멈춘다.


"도와…준다고 했었지."


한참 동안, 서로가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다가,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먼지를 삼킨 듯 텁텁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예, 그랬죠."

"그거, 정말이야?"

"물론이에요."

"하지만, 하지만…"

"시아 씨."


하염없이중얼거리는 동시에 덜덜 떨리는  손을 이자나가 붙잡는다. 그리고서 오늘 선아가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때와는 색다른 온기가 따스하게 손을 감싸 안는다. 사소하지만  상냥한 행동에 강박적으로 발작하던심장 박동도 조금은 멎어든다.

"단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아요."

"…"

"아직 서로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부디 저를 믿어주세요. 당신을 도와주고 싶다는 이 마음만큼은 진심이니까."

"…응, 말할게."

이자나의 말대로다. 그저 입을 다물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언니를 위해서, 그녀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된다. 이기적으로 그녀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에게는 내게 없는 힘이 있으니까.


"사실…"

어금니를 악 물고, 마비가 온 것 같은 혀를 서서히 움직인다.

어차피 꽉 차있던 댐.  번 제방을 푸니  이후는 무척 간단했다. 얌전히  말을 경청하는 이자나에게, 나는 선아와의 만남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녀가 스무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고, 선배마저 죽인 살인마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내가 그녀에게 협박당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내가 꺼낼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랬던…거군요."


장황했던 이야기가 끝나자 이자나가 더듬더듬 입술을 떼었다. 이야기를 꺼내기 전의 그녀와는 달리 심각해 보이는 표정. 진지하게 나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그 태도에, 오히려 구토가 올라온다. 그녀가 아닌 나 자신에게서 느끼는 역겨움.

결국 애꿎은 사람을 또 끌어들이고 말았다. 그저 진실을 말했을 뿐이란 건 어떠한 변명도 되지 않는다. 뭐가 됐건 자신의 진실이 밝혀진 이상 선아는 망설임 없이 칼을 들 테니까.

시커먼 죄악감이 가슴 속에 사무친다. 말랑한 입술을 잘근잘근 곱씹는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크게 밀려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쾌감이었다. 휘몰아치는 자책감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안도하고 마는 자신이 있었다.

이질적이다. 아직 아무 것도 바뀐 게 없건만 그렇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나니까, 알코올에 취한 듯 달콤한 기분이 먹먹하던 가슴을 달랜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쭉 고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고통을 분담하는 일을, 그리고그로부터 심심한 위로라도 받는 일을. 다가오는 남들을 매섭게 쳐내면서도 내심 그들이 내게 다시 한 번  다가와 주었으면 했다. 나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때때로 보여준 호의에 혹하지 않았다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바로 지금 이렇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가와준 이자나에게 결국 마음을 열었지 않은가.


"많이, 힘들었겠네요."


별 다른 말은 없었다. 고즈넉한 목소리로 단지 그 한 마디 뿐.

겨우 그 한 마디뿐인데, 어째선지 눈가가 시큰해지고, 눈앞에 있는 소녀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여 와서──정신을 차렸을 땐, 이자나의 품안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의 앞섬은 어느 샌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정말로 도와줄 거야?"

"예, 도와드릴게요."

"하지만…위험할 수도…"


아무리 양가집 딸이라고 해도 상대는 경찰도 잡지 못한 연쇄 살인마. 그에 반해 이자나는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이겠지. 무서울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그래서 줄곧 입을 열지 못한 것이다. 내가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보다도, 모든 사정을 알게  그들이 내게서 등을 돌릴까봐. 그게 무서워서 지금껏 굳게 입을 잠그고 있었다. 누구도 찾을  없는 열쇠를 닫힌 마음 안에 고이 간직한 채 자물쇠를 걸어잠갔다.

"괜찮아요."

거친 불안에 떠는 나를 두고 이자나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성모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띠운 그 소녀가 내 수척한 뺨을 아련한 듯이 매만졌다.


"곤란에 처한 친구를 돕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설령 시아 씨가 부정하더라도, 이미 시아 씨는, 아니 시아는 내 친구니까."

"어째서…"

날 안심시키려는 듯이 나긋나긋한 목소리, 차마 숨길 수 없는 애정을띤, 상냥한 시선.

그녀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말할  있는 걸까. 내가  짓이라고는 고작 계단에서 떨어지는 그녀를 받쳐준 것뿐인데, 어째서 이토록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걸까.

눈덩이마냥 부푸는 의구심. 갈데없는 의문이 메아리친다. 나는 뚫어져라 이자나의 얼굴을 쳐다봤지만, 그 얼굴에 어린 감정은 일렁거림 하나 없이 건재했다.


"친구라고? 누구 마음대로?"


그 순간, 거칠게 열리는 문짝. 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그러나 평소와 달리 날이 서있는 목소리. 흉흉한 적갈색 머리칼에 나는 신음하듯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 선아야."

"안녕 시아야! 교무실에 간다더니 공교롭게도 여기서 보네? 친구한테 거짓말을 하다니, 벌을 줘야겠지만──일단 그건 뒤로 미루도록 하고."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것일까? 잔뜩 독이 오른 얼굴을 한 선아의 손에는 짧지만 예리한 단도가 들려있었다. 어쩐지 그 푸르스름한 광채에 불그스름함이 섞여있는  같다.

평온함에 잠겨있던 음악실에 스산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공포, 플래쉬백. 목이 잘린 채 절규하는 선배의 환영이 보이고, 끔찍한 상상이 뇌리를 엄습한다. 피로 물든 살가죽과 한없이 치켜뜬 백안. 저절로 몸이 겨울날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린다. 그런 나를 이자나가 꽉 붙잡았다.

"도망쳐, 빨리!"

그제서야 이자나의 존재를 깨닫고 다급하게 외쳐보지만 그녀는 내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자나는 내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정면만을직시했다. 어디까지나 덜덜 떨고 있을 뿐인 나와 달리 그녀는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그  얼른 떼지 그래? 죽여버리기 전에."

"안 떼도 당신의 비밀을 들은 이상 죽일 생각이잖아요? 그럼 그냥 이대로 있을래요. "

"이 년이…"

사소한 말다툼. 그 후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선아가 칼날을 수평으로 치켜든다. 대치하듯이 마주한 이자나는 다만 조용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곧 그녀의 손보다 좀 더 커다란 'ㄱ'자 모양의 물건이 드러났다.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에 의해 은빛 총신이 예쁘게 반짝거린다. 아름답다 못해 예술적이기까지 한  형태, 색채, 은은히 풍겨오는 비릿한 쇠냄새.

…이윽고 완전히 드러난 그것의 모습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것은 비단 선아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한껏 당황한 얼굴로 입을 크게 벌렸다.

"미,미친 거 아니야 너? 학교에 총을 가져온다고?"

"예, 전 미쳐있답니다. 그게 어때서요? 사랑에 빠져있는 여자는 모두 미쳐있는 법이잖아요?"

철컥. 능글맞게 웃은 이자나가 여유롭게 안전장치를 해제한다. 기품 있는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복싱 선수처럼 투박한 손이 매끄러운 그립을 우아하게 쥔다. 그것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폭력과 미학이 침대 위에서 한데 뒤섞인 듯한 결정체였다.

"하…그런다고 맞출 수 있을 거나 같아? 너 따위가?"

"네, 왜냐면 전 이퀼리브리엄을 30번이나 돌려봤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냥 얌전히 맞고 죽어요!"

"잠─"

탁!

자신에 찬 외침과 함께 이자나가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소음기에 짓눌린 총성이 음악실 안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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