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흑곰, 뒷처리를 부탁해요.”
단락적인 그 말과 함께 우리는 피로 물든 음악실을 뒤로 했다. 문이 열리자 이자나는 친한 척이라도 하려는 듯이 내 팔짱을 껴왔고, 나는 그런 그녀를 어색하게 받아들였다.
고마운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왜 이렇게나와 친해지길 원하는 건지 의문이 든다. 우리 둘은 국적도 인종도 다른데, 볼품없는 나의 어디가 볼만하다고.
나도 나 자신을 혐오하게된 요즈음. 슬쩍 옆을 돌아보면, 텔레토비 엔딩에 등장하는 해님처럼 싱글벙글 웃고 있는 얼굴이 있다. 조금 전 사람의 몸에 대고 총을 사정없이 갈겨댄 인간의 얼굴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역시 그녀도 정상이 아닌 걸까?
그렇다면 그런 인간과 태연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나 역시 정상이 아니겠지. 사실, 돌아오기엔 너무 먼 강을 건너고 말았다. 정상과 비정상을 논할 자격 따위 옛적에 사라졌는지도.
“시아 씨?”
“…”
“…죄송해요. 역시 좀 과격했죠?”
“…너한테는 잘못 없어.”
그래, 이자나에게 잘못은 없다. 선아는 또라이니까. 또라이다 못해 아주 제대로 정신 나간 또라이에 성격도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아이니까. 이자나는 아무 것도 잘못한 거 없어. 그런 여자한테도 옛날 친구랍시고 손속을 두는 내가 병신이지. 무른데다, 무능력하기까지 한 병신.
그걸 알고 있는데, 잘 알고 있는데, 우중충한 기분은 도무지 개이질 않아서 그냥 입술을 달싹거린. 술이라도 한 잔 걸치면 좀 더 당당하게 서있을 수 있을까.
신은 물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고 빅토르 위고는 말했지. 와인이 물보다 더 맛있으니, 그럼 인간이 신보다 더 대단한 것인가?
“으음…기분이 영 좋지 않으신 듯하네요. 그런 시야 씨에게는…이거를 드릴게요.”
“이게 뭐야?”
그딴 걸 내가 어떻게 알아. 투덜투덜. 아는 술 이름들을 속으로 열거하며 내면의 우울함을 겉으로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내가 보기 언짢았던 건지. 이자나는 마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윽고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가운데가 볼록하게 부풀어 오른 종이봉투가 그 속에서 나타난다.
“매직 머쉬─웁스, 제가 방금 매직 머쉬룸이라고 했나요? 그냥 평범한 버섯이에요. 인디언들이 즐겨먹는. 달짝지근해서 먹으면 기분이 상당히 좋아진답니다?”
버섯? 갑자기? 주머니 속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너는 언제나 내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이자나의 얼굴에는 여전히 해맑은 미소가 걸려있다. 그러고 보니 내 앞에서는 거의 항상 저 얼굴이었지.
태양처럼 밝은 미소. 너무 흔한 수식어. 아, 나도 저렇게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고마워.'
하얀 봉투를 낚아채 주머니에 꾸겨 넣고, 기어코 데려주겠다는 이자나의 권유를 거절한 뒤 터덜터덜 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따뜻한 주홍빛에 저속되는 석양놀. 아름답기도, 질리기도. 좀 더 색다른 색을 원해.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
빨다 뱉은 연기가 내 몸 속에 쌓인다. 빨간 몽상에 잠긴 채 걷고 걷다보니 어느 새인가 현관 앞.
"…시아야? 왔니? 저녁은─"
"먹고 왔어."
또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오는 언니를 대충 밀쳐낸 뒤 방문을 쾅 닫는다. 미안한 마음이 살짝 피어오르지만, 뭐 어때. 이러는 게 처음도 아니고, 하나뿐인 동생이 생리질하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하잖아. 그래도 나는 누나를 사랑해. 아, 언니건 뭐건.
챙겨뒀던 봉투를 꺼내든다. 우악스런 손길로 종이 표지를 잡아 뜯자 쏟아져 나오는 버섯 몇 개. 버섯이라고 하더니 진짜 버섯이었네. 습기라고는 조금도 없이 말라비틀어진 모습이 상당히 안쓰럽다. 당연히 식욕은 당기지 않는다. 그래도 이자나가 준 선물이니까. 먹지 않으면. 먹지 않으면. 그냥 눈 딱 감고 한꺼번에 삼켜버렸다.
"후으응…"
동시에 짓쳐들어오는 구역질과 나른함. 분노와 침착함. 어지러움과 평화로움. 바싹 마른 혓바닥이 벌침에라도 쏘인 듯이 부풀어 오르다가, 척추뼈가 자연스레 맥도날드의 M자로 굽어진다. 혹은 경직된다.
회광반조라도 하는지 이런저런 광경들이 흐릿하게 스쳐가는 와중 남자의 어깨 너머로 얼핏 본, 피에 물든 선아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어찌나 새빨갛던지. 하교하면서도 몇 번이고 떠오른 광경.
그런데 이제는 구역질이 올라오지 않는다. 심지어 그 선아가 선배의 잘린 머리통을 선물상자에 정성스레 포장하고 있는 모습이 보여도 전혀 역겹지 않다.
"내일은 학교 못 가겠네…"
찝찝하지만, 그날 밤은 어젯밤보다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해가 뜬지 오래지만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두 눈을 부릅뜬 채로 하염없이 드러누워 있을 뿐 일어나지 않았다. 거실에서 무언가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끝끝내 일어나지 않는다.
나 홀로 남겨진 집 안에 적막이 감돈다. 우리 집이 원래 이렇게 조용한 장소였던가. 마음까지 고요로 덧칠되는 기분인데, 생각의 연쇄는 멈추지 않는다. 제방이 무너진 댐처럼, 끝없이 넘쳐흐른다.
그 순간 딩동-하고 경쾌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침만 되면 일어나는 남자의 그것처럼 벌떡 허리를 일으킨다.
"Guten Morgen! 좋은 아침이에요!"
"…"
잘 때 입었던 옷 그대로 현관문을 벌컥 여니 밝게 웃고 있는 이자나가 보인다. 햇살을 머금은 금발과 새하얀 건치가 평소보다도 눈부시게 빛난다. 갑자기 우리 집에는 왜 찾아온 거지.
"시간 남으시죠, 시아 씨? 같이 놀이공원 가요!"
"귀찮아…"
"에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