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4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44/73)



〈 44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흥, 흐흥흥~"

"…"

가만 놔두면 가히 집 안까지 쳐들어올 기세에 끌려나왔지만, 사실 딱히 싫지만은않다. 비록 어제 그렇고 그런 광경을 목격하긴 했지만, 이자나 입장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는 것을 알고있으니까. 애초에 그녀에게 선아를 막아달라는 부탁을 한  나 자신이다. 투덜댈 수도, 불평할 수도 없겠지.

물론 그렇다고 딱히 좋은 건 아니야. 오후 3시 경의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늘어지는 온몸.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이부자리에 드러눕고 싶은데, 입을 이죽거리며 작게 투덜대지만 당연히 이자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햇볕은 쨍쨍하고 주변은 소란스러운데 나 혼자 우중충하게 가라앉는다. 기분 탓일까. 맑은 하늘도 괜히 먹먹해 보인다. 새 옷의 소매에 들러붙은 보폴  울이 된 기분. 한낱 먼지가 되어 흩어지고 싶다. 헌옷수거함은 이런 나라도 받아줄까.

이런 식의 자기비하는 오랜만이다. 별로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습관적으로 하는 게,  약빨이 서서히 드는 것 같다.

"저기에요 저기!"

"…"


맘만 같아서는 바로 귀가하고 싶지만, 아이처럼 순진무구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차마 뭐라 말하지를 못하겠다. 더욱이 이자나에게는 받은 은혜가 있으니까.

결국 마땅찮은 반항도 못한 채 재벌들이나 탈법한 고급 세단에 몸을 싣고  시간을 슝.

그렇게목적지에 도착하니 북적북적 대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어서 시야에 들어오는 으리으리한 흰색 성. 어린애라면 누구나 좋아할만한 환상의 나라.

어릴 때 이후로 놀이공원은 처음 와보는데, 정문에서 무슨 팜플렛을 나눠주고 있는 인형탈이 눈에 띤다. 햇볕이 꽤나 쨍쨍한데 저 안에 있는 사람은 힘들겠네.  주제에 무슨 남 걱정이람.

“얼른 가요!”


이자나의 우악스런 손길은 잠시 감상에 잠겨있을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빈 수레 마냥 질질 끌려다닌다. 잠이라도 덜  듯 머리가 아직 알딸딸한 채 눈치 채면 어, 어, 어, 어느 샌가 회전목마 위에. 이거 내가 타기엔 좀 유치하지 않아?

허나 이자나는 이런 놀이기구 자체가 처음인 듯 꺅꺅 소리를 질러댔고, 나는 다만 그런 그녀의 곁에 인형 같은 무표정으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주변에는 그런 우리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시선들. 솔직히 좀 쪽팔렸다.

그렇게 이자나한테만 즐거웠던 회전목마의 이용시간이 끝나고, 연달아 롤러코스터, 바이킹, 자이로드롭을 탔다. 그중에서 자이로드롭을 탔을 때는 속이 메슥거렸는데, 안색이 핼쑥해진 나와는 대조적으로 이자나의 미소는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이 아이는 정녕 지치지도 않는 것일까.

"이야, 예쁘네. 아가씨들 혹시 연예인?"

"괜찮으면 번호 좀─"

"…흑곰."

바로 다른 놀이기구를 타러 가는 도중, 말을 걸어오는 껄렁껄렁한 2인방. 그러나 이자나가 조용히 읊조리자, 검은 무언가가 순식간에 스쳐지나가더니 2인방 채로 사라지고 말았다. 흐리멍텅하게 떠지는 두 눈. 금붕어처럼 눈을 끔뻑이는 나를 이자나가 또 질질 이끌었다.

그 다음부터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후로도  이곳저곳 돌아본 것 같은데, 왜 치매 걸린 노인네처럼 기억이 흐릿한 것일까.

그야 되는대로 이끌릴 뿐이었으니까. 이자나는 단지 나를 옆에 앉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했고, 나는 그냥 지쳐서 하루 내내 헥헥거리고 있었다.

"이번엔 저기에 가보죠!"

놀이공원을 거의 정복하다시피 움직이니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이자나의 손에는 반쯤 파먹힌초코맛 콘아이스크림이, 나의 손에는 한 입 대고 만 초코맛 콘아이스크림이 따스한 햇볕 아래 녹아내리고 있다.

아직도 체력이 쌩쌩한 이자나가 번쩍 팔을 치켜든다. 새하얀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느릿하게 시선을 옮기자, 그곳에는 빨간 색 관람차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빙글빙글. 빙글빙글. 내 눈동자도 따라 돌아간다.


"상관없어."

"후후, 그럼 얼른 가죠!"


인기가 별로인 건지 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지친 듯한 표정의 알바에게 티켓을 보여준 우리는, 관람차의 작은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살짝 덜컹이는 정도의 충격이 일어나고,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하는 관람차.

"저…시아 씨."

먼지  창틀 너머로 붉은 노을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뭔지 모를 우수에 젖어 계속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맞은편에 앉은 이자나가 넌지시 말을 건네 온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 역시 작게 떨리는 눈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흐려진 미소, 흐려진 표정. 그런 얼굴은 보기 싫은데.

"그…어쩐지 저만 즐긴 것 같아서 죄송해요. 사실은 시아 씨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어졌으면 해서 온 건데."

"괜찮아."

"정말로요?"

"괜찮아."


허나 믿지 않는다. 빤히 나의 얼굴을 쳐다보는 시선. 이자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투박한 손이 오른쪽 뺨을 간지럽히듯이 쓰다듬는다. 손톱 끝이 보드라운 살결에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가까운 거리. 서로의 시선이 은밀하게 교차한다.

그러자 가까워지는 새하얀 얼굴. 오똑한 콧대, 길쭉한 속눈썹, 이국적인 녹색 눈동자. 그 모든 게 점점 더 가까워진다.


"내가 보는시아 씨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

"무언가 힘드신 일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뭐라 해도 시아 씨는 제 친구니까."

친구, 그래 친구지. 비록   이용해 먹었지만 말이야.

애초에 친구라고 부를만한 관계성이 우리에게 있는지가 의문이다. 그녀의 후의를 입은 몸이긴 하지만, 친구가 비지니스 관계도 아니고 기브앤테이크만으로 이루어질 리가 없잖은가.

거기다가…첫 만남은 그야말로 최악이었지. 나는 그녀를 욕했었고, 그녀 또한 나를 욕했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가 가까워질 일은, 앞으로 영영 없을 거라 여겼었는데.

그리고 지금 이자나는 내 얼굴을 아련하게 어루만지고 있다. 어딘가 애처로움이 담긴 손길. 마치 구애하는 공작새의 몸짓. 착각이겠지. 착각일 거야. 이제 사랑 따위는 지겹다.

왜 너는 날 그리 위해주는 걸까.  너는 날 좋아해주는 걸까. 그러고 보면 선아도 날 좋아한다 말했지. 우정이라기 보단 성애에 가깝지만. 그 난데없는 고백만 아니었더라면 나는 내 손으로 직접 그녀를죽여줄 수 있었을까. 내 손아귀 안에서 분리수거통에 담긴 페트병처럼 짜부러지는 가는 목. 난데없는 고백에 이은 난데없는 망상.


"…모르겠어."

"뭐가요?"

"그냥, 이것저것. 하필이면 이 학교에 입학한 것도, 강선아를 만난 것도, 선배와 어울린 것도, 최근 언니에게 매몰차게 대한 것도, 너를 끌어들인 것도. 모든 것이 올바른 것이었는지. 나는 또 멍청한 짓을 저질러버린  아닌가."


회한은 몰아친다. 폭풍처럼 거듭해서 몰아치고, 자꾸 머리를 괴롭혀. 괴롭기만 한 정신머리가 더욱 더 병신 같이 되고, 머저리. 인간은 꼭 중요한 걸 잃고 나서야 반성을 하지. 그리고 그 반성은 대게 3일 정도 이어지다 말끔히 사라지기 마련이다.

사뭇 심각해진 이자나의 눈빛. 조금 비뚤어진 부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아이는 착하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러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살인귀 앞에 데려다놓고, 그녀가 친히 그 살인귀를 총으로 쏘게 만들었다. 질척한 핏물이 그녀의 얼굴에 덕지덕지 묻었고, 바닥에도 흘러내렸다. 붉은 호수가 그녀의 신발창을 적셨다. 그리고 내 신발창도. 습습한 늡지에 발이 푹 꺼지는 느낌.

나는 끝까지 내가 그렇게 만든 결과물을, 피에 젖은 이자나를 보지 않았다. 아니,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서로 눈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도 이렇게 떨리는 걸. 다만 이런 인간이라도 최소한의 염치는 있기에 고개를 돌리지는 않는 것일 뿐.


"절 끌어들이신 걸, 후회하고 계신가요?"

"응."

"저로 하여금 강선아를 상처 입힌 걸 후회하고 계신가요?"

"응."

고개를  번 끄덕였다. 이자나는 고민에 빠진 듯 손가락으로 턱 끝을 짚었다. 석양빛에 젖은 그녀의 왼쪽 얼굴이 주홍색으로 물들었다.

"시아 씨의 고민……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시아 씨의 도움이 되고 싶어 자진해서 뛰어들긴 했지만, 제가 아는 건 어디까지나 시아 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뿐이니까.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겠죠."

“…”

"그런데 굳이 그렇게까지 고민하며 살 필요가 있나요? 어차피 인간은 올바르게 사는 생물이 아니라, 제 좋을 대로 살아가는 생물인데. 왜 시아 씨가  모든 일에 하나하나 죄책감을 느끼는 거에요?"

"하지만…내 잘못이잖아. 나도 맘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없었더라면, 선배는 토막이 나 죽지 않았겠지. 내가 없었더라면, 강선아도 살인마가 아닌 원작의  평범하고 소심한 소녀와 같은 인생을 살았을지도 몰라.

어쩌면 내가 모든  망쳐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때 언니가 날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이딴 고민 따위 안 해도 됐을 텐데. 그냥 쓰레기가 되어 죽던가, 그냥 쓰레기처럼 살던가. 선택지라고 놓인 게 단 두개뿐이라 슬프다.

이럴 때만 위선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착한 척 행세를 하지. 그저 양심없는 인간이었더라면 이자나를 끌어들이는 데도 아무런 망설임 없었을 텐데. 하지만 내게도 그 정도 양심은 남아있나 보다. 그 하잘것없는 의무감이 나의 도주를 용납지 않는다.

"…그렇다면 제 애완동물이 되어보는 건 어때요? 애완동물은 책임 따위 지지 않잖아요?"

"뭐?"

"제 애완동물이 되면 시아 씨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 아니에요? 올바른지 아닌지는, 전부 제가 판단할 테니까. 시아 씨는 그딴 고민일랑 버리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제 말만 따르면 되는 거에요."


갑자기  쌩뚱 맞은 소리냐는 뜻을 담아 이자나를 바라보지만, 그러나 마냥 농담은 아닌 것 같다. 반달처럼 곱게 접힌 눈가는 나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순수한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지만 끝끝내 자신의 말을 철회하지는 않는다.

은근슬쩍 이자나는 내 이마에 그녀의 이마를 갖다 댄다. 피부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그녀의 따스함. 매끄럽게 흐트러지는 금발이  이마를 간지럽힌다. 그녀의 얼굴이 보다 확대되어 보인다. 아까처럼 석양노을을 머금었지만, 뻔한 석양 따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얼굴. 꼭 온기가 서린 조각상 같다. 금방이라도 서로의 입술이 맞닿을 것 같아, 심장이 요란스럽게 쿵쾅댄다.

"제가 생각했지만 정말 명안 아닌가요~? 자, 한번 '멍'이라고 해보세요♪"


할 리가 없잖아. 요즘 들어 좀 모자라 보이긴 하지만 나는 어엿한 인간이라고, 멀쩡한 인간한테 개 울음소리를 흉내 내게 해서 어쩌자는 거야. 내게 동갑 여자애를 주인으로 삼는 변태적인 취미는 없으니까. 아니, 전생 전의 나이까지 합치면 동갑도 뭣도 아닌가. 애초에 그런 편한 선택이 가능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지도 않았을 테지.

그러니까 '멍'이 뭐냐고 '멍'이. 아무리 네가 내게 호의를 베풀어준다 하더라도 말이야. 그리고 친구라 해주더라도 말이야. 정도가 있는 법이야. 원래부터 머리가 좀 이상한 아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나한테  흉내 따위를 시켜서 대체  얻겠다고──


"─멍!"

"꺄아, 귀여워요 시아 씨!"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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