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5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45/73)



〈 45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이쪽으로 오세요.”

“멍!”

“손!”

“멍!”

“자, 아~해보세요.”

“응애”


그렇게 관람차가 땅으로 내려올 때까지 사람이 아닌 개가 되어 보낸 5분이라는 짧은 시간. 내가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지. 머리는 어서 병신짓을 그만두라 재촉하는데, 이미 헤실헤실 풀린 마음이 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성보다는 감성, 냉정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 낯선 감각에 의지하며 시간이 흐르다보니 어느 새 배를 발랑 뒤집어  채로 그녀의 무릎맡에 머리를 밴 내가 있고.

나이 처먹을 만큼 처먹고 이게 대체 뭐하는 거야.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상상하니 팔뚝에 소름이 절로 올라온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소름 돋는  난데없이 개가  이 상황을 꽤나 즐겁게 받아들이는 자신이 있다는 것. 보이지 않는 목줄이 채워진 채 멍멍, 즐겁게 멍멍. 개는 단순해서 좋다.  이상 복잡한 사고 따윈 안 해도 괜찮은 걸.

물론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진짜 개 마냥 왈왈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집 나간 정신머리를 간신히 되찾아 우겨넣는다.


"엎드려!"

"멍…이 아니라. 지금 내게무슨 짓을 한 거야."

"네? 저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그래, 내가 병신이지. 사실 나도 알고 있어."


짐짓 낯빛을 굳혀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태연스런 표정. 차라리 최면이라도 걸렸다면 이렇게 쪽팔리진 않았을 텐데, 왠지 슬프다.

"어쨌든 기분은 풀리셨죠?"

"…인정하긴 싫지만."

"그럼 됐어요."

그러면서 옆에 앉은 내 정수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 나는 애도 아니고 개도 아닌데, 엄마 같은 그 손길에 나도 모르게 고분고분 머리를 맡기고 만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스쳐지나가는 다섯 손가락, 동그란 곡선을 따라 내려와 내 귓불을 살살 어루만진다. 서늘한데 왜인지 뜨겁게 느껴지는 감촉.

이자나의 얼굴이 보고 싶은데, 화끈하게 달아오른 양 뺨 때문에 차마 고개를 쳐들 수가 없다.  3자가 되어 지금 자신의 얼굴을 본다면, 아마 상당한 꼴불견이겠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수 있는 사실. 조금 아파보이는 애. 사실 아픈 게 맞다. 몸이 아닌 머리가.

관람차 문이 드르륵 열리고, 어서 내리길 재촉하는 점원에 이자나의 손을 잡고 이끈다. 마음 한구석이 간지러운 느낌에 엉성하게 잡고 있으려니 조용히 깍지를 껴오는 이자나의 손. 화끈한 열기는 더욱 심해지고, 차마 놓을 수도 없어 갈팡질팡.

 하필이면 손을 잡았을까. 그야 나도 모르게 뻗친 내 손이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마치 원래부터 그런 형태였다는 듯이.

"…고마워."

"천만에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없이 보내왔는데, 정작 헤어질 때가 되니 싱숭생숭한 느낌. 무언가 남는 듯도, 어딘가 아쉬운 듯도, 확실한 건 지금은  옆에 있는 그녀를 빼면 다른 누구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복잡하게 엉켜있던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풀린 기분이었다.



=

"아…돌아왔구나. 몸은 괜찮니?"

고뇌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왜 아름다운 것인가? 고뇌하기에 그는 아름답다. 그러나 고뇌를 버린 인간은 더더욱 아름답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본래 이런 뜻이 아닐 지언데. 해탈한 자의 다다름. 어설픈 지혜로 지껄여보는 반야의 깨달음.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하릴없이 누워있으니, 걱정스런 얼굴로  쪽을 쳐다보는 작은 소녀. 초등학생이라 해도 믿을 만큼 정말로 작은 소녀. 요새 들어 부쩍 핼쑥해진 안색에 가슴이울렁거린다. 돌아오면 우선 무슨 말부터 건네야 할까. 계속 고민했는데, 막상 그 얼굴을 마주하니 그저 망설임 뿐. 그저 망설일 속에 무의미한 시간들이 덧없이 흘러가고, 쉴  없이 째깍대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초침.

"…괜찮아."


기분 나쁜 쇳소리가 자신의 목울대에서 흘러나온다. 내 목소리가 원래 이랬던가. 이질감. 그보다는, 미약한 두려움.

"저녁은─"

"내가 할게."

"응?"

"내가 한다고."

요리는 그다지 능숙한 편도 아닌데, 뭐라도 해주고픈 마음에 괜히 나서고 만다. 그건 좋은데, 좀 더 사근사근하게 말할 수는 없는 걸까. 요새 들어 통 말을 안하다보니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자체가 마냥 낯설기만 하다. 아니, 비단 그래서만은 아니고, 상대가 상대이기 때문이겠지. 나를 좋아하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상대에게 너무 못된 짓을 했다는 자각은, 나에게도 충분하리만치 있다.


"그…괜찮겠어?"

"그 정도로 요리를 못하진 않는데."

"아, 그, 그 뜻이 아니라!"

"나도 알아."


 눈치를 보는 건지 안절부절 못하는 소녀의 머리를 한 차례 거칠게 쓰다듬어주고 주방으로 향한다. 냉장고를 뒤져 베이컨  조각과 식빵봉지, 그리고 계란 두 알을 꺼내고, 미리 버너 위에 올려져있는 후라이팬에 베이컨을 굽는다.

스멀스멀 열기가 올라오자 지글지글 끓는 돼지기름. 그 위로 식빵과 날계란을 한꺼번에 올리니 치이익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난다. 동시에 함께 마실 커피를 탄다.

바싹 구운 베이컨, 보기 좋게 익은 반숙 계란과, 취향대로 한쪽만 구운 토스트. 지금은 저녁이건만, 전형적인 뉴욕식 아침식사를 팬에서 꺼내 커다란 그릇에 담는다. 그녀의 것과 나의 것을 하나씩.

양손에 그릇을 든  다시 식탁으로 돌아오면 멍한 얼굴로 의자에 등을 기댄 소녀가, 언니가 있었다.

"언니?"

"어,시아도 같이 먹는 거야?"

"응."

"그렇구나…"


기쁜 듯이 작게 미소 짓는 언니를 보면서 나의 가슴 속에도 기쁨이 차오르는 한편, 죄악감이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나를 정녕 잊었냐는 듯이. 설마, 그럴 리가, 잊을 리가 없지.

하고 싶은 말들이 밤하늘의 별무리처럼 이것저것 있는데, 막상 식사가 시작되니 대화가  끊긴다. 언니는  작은 입을 열심히 움직였고, 나는 그런 언니를 보면서 미지근하게 식어가는 베이컨을 깨작였다.

맛이 없지는 않지만, 이자나와 다니면서 잔뜩 군것질을 한지라 그다지 식욕이 동하질 않는다. 그냥 이렇게, 언니와의 시간을 누리고 싶어서 의무적으로 포크를 움직일 뿐. 오래간만의 평화로운 풍경, 한때 익숙하던 것이, 괜히 어색하게 느껴진다. 누군가 장난이라도 치는 듯 가슴 속이 간지러운데, 그 위는 평온하기 그지없다. 행복과 우울감의 불협화음.

식사가 끝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치우러 가지만, 기어코 자기가 설거지를하겠다고 나서는 언니. 결국 못 이긴 채 이빨을 닦고 내 방으로 향한다. 커피를 들이켰는데도 어째선지 자꾸 눈이 감긴다. 하긴 아침부터 그렇게 빨빨빨 돌아다녔으니.

푹신한 침대위에 몸을 던지고 무늬 없는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본다. 하얀 배색 위로  또한 퐁당 빠져들고, 울타리 지는 멍울들. 우윳빛 강에서 수영을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한참을 그렇게 잠겨있자 돌연 끼익하는 소리가 문 쪽에서 들려온다.

"옆에 앉아도 될까?"

"상관없어."


두 눈은 여전히 천장을 주시하고 있지만, 누가 들어왔는지는 뻔한 얘기다. 머리맡에 내려앉는 옅은 무게감. 사실 재미없는 천장보다는 언니의 귀여운 얼굴이 좀  보고 싶지만,왠지 모르게 시선을 마주하기가 어색하다. 반대로 지금 언니는 날 내려다보고 있을까.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나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산들바람이라도 은은하게 불어오면 더 좋을지도. 매정히 쳐낼 때를 잊은 듯이  안락함에 안주하고 마는 자신이 역겹다.

어찌 됐건 해야 할 말은 해야 하기에,

"…미안해."

"으응,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 분명힘든 일이 있었을 텐데,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하고…"

"그래도, 미안해."

누운 채로 허리를 돌려 언니의 작은 몸을 껴안는다. 포근하게 나를 감싸 안는 온기, 새근새근 뛰어대는 심장.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같은 느낌이 들어. 학교가 끝나면 매번 들르던 곳인데, 어째서일까. 기나긴 여행길,머나먼 겨우내 동안 길을 돌고 돌아 돌아온 곳. 과연 나에게도, 행복해질  있는 자격이 있을까.


"이대로, 좀만 더 있어도 될까?"

"응…"

마음의 빈 자리를 채우는 따스함. 역시 나에게는 언니가 필요하다. 그동안 언니를 멀리한 것도, 결국은 언니를 잃고 싶지 않아서였으니까. 만약 언니가 없어진다면 나는──억지로 끊어내는 공상의 갈래.


"좋아해…언니."

"…나도, 시아를 좋아해."

나는 언니가 좋아. 그런데 언니가 나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어. 설령 언니가 나를 싫어한다 하더라도 나는 계속 언니를 좋아할 테지만.

자신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어주는 사람을 살면서 단  명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내게 있어 그 사람은 언니였다. 나를 밀치고 대신 트럭에 치인 어린 몸. 알록달록한 피가 덕지덕지묻어있는데, 그러나 두렵지는 않다. 누군가에게는 두려운 일. 다시 보기 싫은 광경이라는  확실하지만, 그러나 두렵지는 않다.

그냥 의미 없이 떠나보낸 무수한 시간들. 평생을 멍청하게 보내온 나인데,  세계에서라도 제대로 살아갈 각오를 한   이후. 그러니 내게 있어언니는 단순한 가족 이상의 연결을 지닌다. 최근 그녀와 한번 멀어지고 나서야 새삼 깨달은 사실.

"…"

"졸려? 이대로 자도 돼."

뒤통수를 떠받든 허벅지의 말랑한 감촉에 정신없이 잠겨 있다 보니, 두 눈이 스르르 감긴다. 흐려져 가는 언니의 얼굴을 불투명한 시야 속에, 온 세상이 검게 물들 때까지 담으면서, 나는 잠에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