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자니?"
눈치챈 순간, 새근거리는 작은 숨소리. 허벅지 위의 행복한 무게감. 고요한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흑단 같은 머리칼. 선명하면서도 희미한,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그러면서도 금세 멀어질 것 같은.
어렴풋이 떠오른 달빛이 하얀 얼굴을 환히 조명한다. 안녕하세요 달님. 환상적인 배경, 적절한 스포트라이트와 미모의 여배우,그리고 자신이라는 주인공. 배역도 충분하고, 몰입감은 충분하다 못해 넘쳐버릴 듯한 느낌. 말랑한 볼가를 아련한 듯이 쓰다듬는 매끄러운 손끝. 낙엽처럼 살포시 떨어져 내리는 잔 머리카락 한 올.
'좋아해…언니.'
연분홍빛 입술로 고하던 그 말이 뇌리에 선명히 떠오른다. 나즈막히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소녀. 그 감정이 자신의 감정과 같은 유형의 애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이미 같은 이름의 파일이 몇 개나 있지만, 그래도 이름을 고쳐 쓴 뒤 기어코 복붙.
그 위로 몇 가지 필터를 입혀본다. 순정만화의 오그라드는 장면 같이 화사한 필터, 붉게 피어오른 홍조, 머뭇거리는 입술,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는 히로인. 외로이 떨어져내리는 달빛이 둘을 축복하고.
"사랑해…언니."
그러나 히로인의 대사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남는 것은 허망한 기분 뿐. 그래도 좋아. 그래도 좋아. 기억 한 조각이라도 남아있다면, 언제까지고 그것을 양식으로 살아갈 수 있기에. 한 치의 거짓 없는 이 사랑에 끝이란 없기에.
-깨톡!
저 혼자의 공상에 한껏 열을 올리던 그때, 돌연 여동생의 핸드폰에서 울리는 경박한 알람소리. 꽤나 구형인 핸드폰을 집어들어, 익숙한 손길로 비밀번호를 친 시현은 단번에 싸늘해진 시선으로 푸르게 발광하는 액정 너머를 바라보았다.
[오늘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같이 놀러가요!]
─라고, 발신인 이자나.
"…짜증나는 여자네."
쯧하고 혀를 찬다. 이자나 그레제, 여동생의 반에 전학온지 얼마 안된 백인 여자. 요란한 금발과 자기주장이 격렬한 몸매.
굳이 1학년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2학년 사이에서도 그녀의 존재는 꽤나 화제였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갑자기 나타나선 그 강선아를 순식간에 처리해버린 여자.
"그건 원래 내 역할이었는데."
히로인을 핍박하는 악역과, 타이밍 좋게 히로인을 구출하는 주인공. 얼마나 전형적인가. 하지만 클리셰라는 것은 늘 써먹기에 좋은 법. 그렇게라도 여동생의 진정한 사랑을 쟁취하고 싶었건만.
여동생을 도와주는 것은 늘 언니니까. 아니, 위기에 빠진 히로인을 구하는 것은 늘 주인공이니까. 기껏 강선아를 매장시킬 수 있는 자료도 얻은 마당에, 그 멋진 주인공의 배역이 다른 이에게로 넘어가버렸다. 이자나 그레제, 복선도 없이 등장한 그 빌어먹을 여자에게로.
자국이 남을정도로 아득바득 씹어대는 어금니. 이런 건 본래의 내가 아닌데, 하면서도 차오르는 초조함은 어쩔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주구장창 여동생과의 데이트를 즐겼더랬지. 모든 걸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 배꽃같이 어여쁜 여동생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방해라도 하고 싶었는데, 주위에 상주한 경호원의 존재 때문에 그것이 녹록치 않았다. 결국 들러리 신세가 된 자신.
단언컨대 이런 건 본래 시나리오가 아니야. 시나리오에 없는 NG컷이라고. 히로인은 시아고, 주인공은 자신이고, 이자나 그레제? 뭔데 그딴 엑스트라는. 엑스트라면 엑스트라답게 비참하게 죽어버리라지. 뭣하면 자신의 손으로직접 죽여버릴까. 강선아 그 덜떨어진 여자도 잘만 사람 여럿 죽이고 다녔는데, 자신이라고 못할까.
"우응…"
"앗, 미안."
거의 핏물이 배이도록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떠니, 몸을 뒤척이는 사랑스러운, 사랑스러운, 사랑스러운 여동생. 몇 번이고 말해도 부족한 걸. 사랑스러운, 사랑스러운, 사랑스러운 여동생. 나의 애인. 잔뜩 성이 났던 마음이 자연스레 풀어지고, 은은한미소가 시현의 어린 얼굴에 퍼진다.
뭐, 진짜 욕망 따라이 손에 피를 묻히는 건 곤란하지만, 그 여자가 무슨 존재이건 처리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겠지. 지금 당장 처리방법이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영리한 자신이라면 어떻게든 될 테다.
"사랑해…시아야."
부드러운 눈썹털을 스쳐지나, 광대뼈를 슬며시 어루만지고, 날렵한 얼굴선을 따라, 말랑한 입술에 떨어지는 손가락. 지금은 그저 이 달콤한 감촉을 즐기고 싶을 뿐. 이시아라는 기분 좋은 늪에 잠겨들어가고 싶을 뿐.
그렇게 자정이 지나고 새벽안개가 자욱히 가라앉을 때까지, 시현은 자고 있는 여동생의 귓가에 쉼없이 달뜬 사랑을속삭였다.
=
"…답장, 안 오네."
눈이 충혈될 지경까지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지만 끝끝내 사라지지 않는 노란색 1 표시. 역시 자고 있는 걸까. 물론 웬만한 사람들은 다들 잠들 시간이라지만, 그래도 10대인데, 너무 일찍 자는 거 아니야?
남몰래 투덜댄 이자나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의 화면을 껐다. 호텔에서나 볼 법한 대형 베개에 뒤통수를 파묻자 노크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아가씨, 말씀하신 대로 이 근방의 CCTV는 모두 회수했습니다."
"모두? 잠깐, 설마 경찰 것까지 회수한 건 아니죠?"
"설마요."
살짝 우스꽝스러운 농을 던져보지만, 그저 묵묵하게 고개를 내젓는 남자.
언제 봐도 재미없다니깐─앵두 같은 입술을 삐죽 내민 이자나는 느릿느릿허리를 일으켰다.
"그래서, 안에 담긴 건?"
"물론 전량 회수했습니다."
"흐응…전량?"
"예, 이시아 양의 집 안까지 샅샅이 뒤졌으니까요."
"집 안…"
그러고 보니 시아의 집 앞까지는 가봤지만, 집 안에 들어가지는 못 했지. 과연 집 안에서 그녀의 모습은 어떨까. 평소에도살짝 풀어진 모습이긴 하지만, 아마 집안에서는 더더욱 풀어져 있겠지. 혹시 속옷바람으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게 아닐까? 위는 아예 안 입고 다닐지도 몰라. 그녀의 유륜은 무슨 색일까. 역시 적갈색? 아니면 예상 외로 검은색? 난 무슨 색이든 좋은데, 거기에 털은 얼마나났을까.
어머, 상스러워라. 하지만 꼴리는 걸 어떡해. 아랫배에서부터 미적지근한 열이 뭉게뭉게 올라오자 이자나는 저도 모르게 음부로 향하려던 팔을 재빨리 치웠다. 아아아니, 공개 자위는 아직 취미가 아닌데.
"그래서,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거죠? 사제 CCTV가 이 주변, 정확히는 시아 씨의 통학로 주변에 쫙 깔려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저라도 소름이 쫙 돋았는데."
"그게…아마도 그녀의 친언니로 추정됩니다. 컴퓨터 안에 이시아 양에 관련된 모든 영상이 들어있었으니까요."
"──뭐 시발?"
언니? 그거 학생회장? 그 다람쥐 같이 생긴 여자가 그런 음흉한 짓을? 아니, 피가 이어진 친언니가 그런 미친 짓거리를 하고 다닌다고? 시발──존나 부러운 년이네.
"어머, 저도 모르게 욕이."
"…"
그만 상스러운 말을 내뱉고 만 입을 황급히 틀어막는다. 다른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히로인이 이럼 안 되지. 그녀는 왕자님, 나는 공주님. 천박한 욕지거리도 없이, B급 스너프도 없이, 깨끗하고 순결한 동화 속 세계. 다다를 수 없는 천국도 엑스터시와 함께라면 대기권 너머까지 날아오를 수 있다지. 날개를 달아줘요 레드불.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흑곰! 당장 모든 영상이 담긴 USB를 제게 넘겨요! 어서!"
"예."
"그리고 당신은 얌전히 꺼져요!"
"예."
잔뜩 흥분한 일갈에 순순히 메모리카드를 넘기고 문을닫고 나가는 남자. 이자나는 두근거리는 제 심장소리를 한 쪽으로 흘리며 탁자 위에 놓인 노트북을 켰다. 한껏 서두르며 전원을 키고 USB를 꽂자, 주르륵 흘러나오는 무수한 동영상 확장자 명들. 대충 훑어본 이자나는 그 중 얼핏 살색이 많아 보이는 섬네일의 것을 재생했다.
곧 이어 쏴아아하는 물소리. 물에 젖어선 투명하게 비치는 검은색 장발. 봉긋이 솟아오른 가슴께와 엉덩이. 엉덩이. 엉덩이. 엉덩이. 엉덩이. 엉덩이. 엉덩이. 엉덩이! 엉덩이!! 젖꼭지──설마 했는데 분홍색이었어!!! 그리고 거기!!!! 거기!!!!! 대놓고 말하는 순간 습작 처리되니 차마 말할 수 없는 거기!!!!!!!! 영어로는 PUSSY!!!!!!!!!!!!! ㅂㅈ씨바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랄!!!!!!!!!!!!!!!!!!!!
"뷰티풀…"
그날밤, 이자나는 저 혼자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