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7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47/73)



〈 47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에, 그러니까…덥다고 풀어져 있지 말고, 학업에도 교우관계에도 성실히 임하는…그…]

'진짜 없구나.'

아침 조회 시간, tv를 통해 흘러나오는 교장의 느긋한 목소리를  귀로 흘려들으며 옆자리로 고개를 돌린다. 깨끗하게 닦인 책상과 비어있는 의자. 모처럼의 공허함,  각설탕 두 조각을 넣던 커피에 한 조각을 빠트린 것만 같은 기분.

음악실 바닥을 가득 메우며 끈적하게 실내화 바닥을 적셨던 혈액이 떠오른다. 비릿함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붉은색은 씻어도 씻어도 개이지 않았고, 나는결국 그 실내화를 버렸다.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결코 얕은 상처는 아니겠지. 입원치료가 필요한 중상은 기본에, 심하면 어디 한군데 불구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환자복을 입고 병원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의 한쪽 언저리가콕콕 쑤신다.

"…왜"


그러게, 어째서일까. 그것보다 더 심한 일을 당해도 싼 인간인데.

언제나와 같았더라면, 선아가 한쪽 뺨을 눕혀놓고 있었을 책상을 손끝으로 쓰다듬는다. 매끄러운 나무 표면, 그 위로 삐뚤삐뚤한 선을 이어나간다. 아릿하게 떠오르는 예쁜 고양이상.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한편 그 파편들을 소중히 품속에 그러모으는 모순.

손을 거두고,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다. 어차피 이어질  없는 관계였다. 어차피 바뀔 수 없는 인간이었다. 잊자. 아니, 잊어야 한다.

"또 무슨 생각 중이길래 얼굴이 그렇게 어두워요?"

"…아무 것도 아니야."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내 옆자리를 차지한 이자나를 돌아본다. 창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받은 진한 색조의 금발이 눈부시게 빛난다. 책상 위에 올려둔 내 손을 그녀는 슬며시 어루만진다. 아무 저항 않는 손가락을 쥐락펴락, 민감한 손톱 밑을 쓰다듬기도.

"시아 씨는 손이 예쁘네요. 뭐, 손 말고도 이곳저곳 예쁘지만."

"오그라드니까 그런 말  하지마……그보다 내 이곳저곳을 보기라도 거야?"

"설마요. 아, 같이 목욕탕이라도 갈래요?"

"그건 좀…"

아저씨도 아니고 웬 목욕탕.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장난스럽게 웃음 짓는 이자나. 그러나 그 밝은 얼굴은, 이내 칙칙한 어둠에 물든다.

"무슨 일 있어?"

"…시아 씨."

"응?"

"잠시 할 말이 있어요. 따라와 주실래요?"

"상관없는데…뭔데 그래?"


그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자나. 나는 당황하면서도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그녀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며 교실을 나갔다.

"대체 뭔데 그래? 정말  일 있는 거야?"

"…"

유령처럼 걸음을 옮기는 이자나를따라 5층의 화장실까지 걷는다. 교실이 없는 층이라 그런지 인적이 드문 곳. 그럼에도 깔끔하게 청소된 화장실에는 나와 그녀 단 둘만이 있었다.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건만, 이자나는 기어코 화장실칸을 모두 열어 사람이 없는지를 다시 한 번 더 확인한다.


"왜 그러냐니ㄲ─"

"시아 씨."

"응, 왜."


바로 어제까지도 이자나와 함께 있었는데, 설마 밤사이에 무슨 봉변이라도 당한 건지. 사뭇 심각하기만 한 그녀의 얼굴에 내 얼굴 또한 걱정으로 일그러진다. 그러자 느릿하게, 아주 느릿하게 열리는 그녀의 분홍색 입술.

"제가 지금 말하는 건 어디까지나 '진실'이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부디 저를 의심하지 말아주세요."

…그때의 그 말을, 그 진실을, 차라리 듣지 않았더라면,  인생도 바뀌었을까.

의미 없는 가정. 아무리 발악해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기에, 지극히 의미 없다.

=

"어머, 오늘은 빨리 왔네."

"…"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있는 여동생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건넨다. 자신처럼 막 돌아온 건지, 갑갑한 마이만을 벗어던진 교복 차림. 시현은 오랜만의 낯익은 풍경에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여동생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있지,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나가서 먹지 않을래? 맨날집에서 해먹는 것도 지겹고, 모처럼이니까 밖에 나가서─"

"언니."

"응? 왜?"


도중에 말이 끊겨도 시현의 미소는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았다. 물론 다른 상대였다면 불쾌함을 고스란히 표현했을 테지만, 상대는 사랑스러운 여동생이었으니까. 그래,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해 마지않는 여동생이었으니까. 하지만 직후, 여동생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완벽한 그녀의 완벽한 미소를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나 목욕하는 건 왜 찍은 거야?"

"…응?"

"나 목욕하는 건, 왜 찍었냐고."

그러면서 날선 눈초리를 자신에게 향하는 여동생에, 해맑던 표정도, 붕 떠있던 머리도 단번에 굳어버린다. 지금 이 아이가 무슨 말을  거지. 일단 부정해보지만 눈앞에 닥친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변명을 쏟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돌아가는 뇌세포. 하지만, 마땅한 대답이 나올 리가 없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발뺌하지마. 이미 언니 노트북으로 다 봤으니까."

"그러니까…그건…"

"그러니까  그랬냐고!"

히끅하고,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딸꾹질. 힘없이 내린 두 손이 오들오들 떨리고, 물속에 빠진 듯 숨이 차고, 입으로 들이마시는 공기도 차다.

결코 여동생의 노성이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눈에서 짙게 배어나오는 혐오감에, 난생 처음으로 마주하는 그 감정에──다만 지금까지의 행복했던 현실이 무너질까 두려웠다.


"그, 그거야, 너,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돼서─"

"그럼 욕실에는  카메라 설치한 거야? 그것도 5년 전부터.
아하, 5년 전부터 내 알몸 보면서 딸친 거야?"

"그건, 어쩌다가 찍은─"

"닥쳐!"

평소의 배려라고는 조각도 없는 손길에 시현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엉덩이에서부터 둔한 아픔이 올라왔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 시현은 여동생의 종아리를 붙잡고 간절하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분노로 한껏 일그러진 얼굴,  눈동자에는 추하게 눈물 흘리는 자신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미, 미안해 시아야. 하, 한번만 용서해줘. 앞으론 그런 짓 안할 테니까, 응?"

"살면서 많은 사람을 의심해봤지만, 언니만큼은 믿었어. 그래, 언니만큼은. 그런데─"

"카메라도 다 뺄게. 하, 하라는 것도 뭐든지 다 해줄게. 내, 내 얼굴 보기 싫지? 그럼 내가 잠시 나가서 살까? 그러니까제발, 이러지 말자."

"─양심이 있다면 치워. 진짜 역겨우니까."


제것보다 커다란 손을 붙잡은 두 손이 쳐내진다. 손목에 남는 빨간 자국. 처음 받아보는, 여동생의 아픈 손길. 동냥하는 거지처럼 다시 손을 뻗어보았지만, 결과는 역시 같았다.

"가지마…가지 말아줘…"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지만 그녀는 매몰차게 등을 돌린다. 등을 돌리고, 그래 돌아보지 않는다. 그저 잔잔하게 살랑이는 흑색 장발. 시원한 걸음걸이.

이건 정말로 현실인 걸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시리도록 선명하기만 한데, 의심 또 의심. 머저리 같은 머리통.

이게 아닌데, 내가 바란 건 이게 아닌데.

의미 없이 속으로 읊조리고, 짠내 나는 눈물이 눈가와 볼가를 적신다. 당장이라도 뛰어가 붙잡고 싶은데, 힘이 풀린 두 다리는 갓 태어난 아기 사슴처럼 바들바들 떨릴 뿐이다. 구멍난 가슴엔 핏물 비스무리한 액체가 철철 흘러넘치고, 호흡은 점점 가빠워져 온다.

두 눈을 감고 싶은데, 눈을 감을 수조차 없다. 이내 쾅하고 닫히는 현관문. 시현은 언제까지고,  빈 현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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