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야, 비켜.'
'…'
언니는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못하는 게 없었지만, 처음부터 마냥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아주 어린 시절, 우리가 유치원을 함께 다닐 적의 이야기.
그 시절의 언니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그저 멍하니 시간을 때우길 일수였다. 말수도 거의 없고, 행동은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심지어 누군가 언니를 놀리고, 때려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차별적인 언사를 내뱉고 싶진 않지만, 단적으로 말해서 그때의 언니는 자폐아처럼 보였다.
당연히 짓궂은 남자애들은 그런 언니를 다루기 쉬운 장난감처럼 여겼고, 성격 못된 지지배들은 저능아라며 뒤에서 손가락질 해댔다. 그리고 나는 눈에 거슬리는 무언가 정도로 여겼지. 어째선지 눈에 밟힐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그냥 무시했다.
아아, 지금이야 화목한 사이라지만 처음부터 언니와의 관계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때의 언니가 일부러 멍청한 척을 한다고 여겼으니까. 이제 와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 게임 속 지식은 언니의 성격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명백히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누구의 동정을 살려고 덜 떨어진 행세를 하는지는 몰라도, 그저 가증스러울 뿐. 구실이 하나라도 있다면 싫어할 이유로는 충분하다.
그래도 어린 여자애를 차마 때릴 수는 없으니까. 언니라는 작자에 대해 아예신경을 끄고 살려 했다. 그런데 같은 유치원을 다녔기 때문일까. 이제는 잊었다 싶으면 또 눈앞에 홀연히 나타나곤 해서, 나날이 쌓여만 가는 짜증.
'시아야, 너도 힘들겠지만, 네가 네 언니를 좀 돌봐줘야─'
'하아? 내가 왜 재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되는데?'
덜 떨어진 언니를 신경쓰라고 잔소리하는 엄마도 짜증났다. 아니, 과연 이 아줌마를 내 엄마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내 진짜 엄마는, 이미 한참 전에 죽어버렸는데. 이 몸으로 콱 죽어버리면 그녀의 그리운 냄새라도 맡을 수 있을까. 바보 같은 망상.
아무튼, 언니가 싫었다. 그냥 싫은 것도 아니고 무척이나 싫었다. 옆으로 뻗은 사랑니라고 하면 적절할까. 당시에는 언니가 아니라 '야'나 '너' 따위로 불렀지만.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냐고? 여동생이 언니를 싫어하는 데 무슨 거창한 이유가 필요할까. 그냥 게임 속의 언니가 쓰레기 같은 악역으로 나왔고, 현실의 언니는 멍청해보여서 짜증났다. 겨우 그게 다. 그리고 무엇보다그때의 나는 나 자신의 문제에만 몰두해 있었으니까. 이 세계가 사실은 미연시 게임 세상이라니, 그 병신 같은 거.
게임 속 세상과 게임 속 주요 등장인물인 언니. 그때의 나는 마냥 어렸으니까. 볼 때마다 역정을 내는 것도 당연하지. 작은 머리통에 들어찬 충동이라곤 그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뿐이었다.
어째선지 병신행세를 하는 언니도, 가짜 주제에 부모 행세를 이 몸의 부모도, 이 어설픈 세계 자체도, 모든 게 다 짜증나. 짜증나기 그지없다.
아무튼 언니는, 정말로 짜증나고 싫은 인간.
'너 병신이냐? 그만두라는 말 한 마디도 못 해?'
'…왜'
'안 들리니까 똑바로 좀 말해. 짜증나게 굴지 말고.'
──언니는 짜증나는데, 얼굴조차 보기 싫을 정도로 싫은데, 그런 언니를 괴롭히는 녀석들은 더더욱 짜증났다. 남자 주제에 여자애 하나 둘러싸고 뺀질거리며 히히덕거리는 그 얼굴들을 보고 있자면 괜히 배알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때렸다. 꽉 쥔 주먹으로 꽝. 애새끼라 그런지 한번 때려서는 말을 안 들으니까 몇 번이고 꽝꽝. 나중에 애새끼 손을 잡고 유치원을 찾아온 학부모 앞에서도 대놓고 때렸다. 당시의 나는 눈에 뵈는 게 없었고, 무엇보다 범법소년이었으니까.
'너는…날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어. 지금도 존나 싫어하는데.'
'그럼 왜…'
'그야 눈앞에서 병신처럼맞고 다니니까 그렇지. 보기 짜증나잖아. 그보다 너 이제 말 잘하네?'
역시 몽둥이가 약이라는 건지. 복수하러 올 때마다 때려눕히니 더 이상 언니를 괴롭히는 애들은없었다. 대신 몇 놈이 뒤에서 수군거리긴 했지만, 그래봤자 애새끼들 뒷담화인데 뭐.
그리고 나는 다시금 언니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늘 그렇듯이, 나는 의도적으로 언니라는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우려 노력했고, 언니도 내 눈치를 보면서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자살을 결심하고 차로에 뛰어든 나를, 언니가 밀치고 대신 차에 치었다.
작은 언니의 몸은 단번에 붉게 물들었고, 그것이 비현실로 가득 찬 이번 생에서 내가 처음 마주한 현실의 색감이었다. 운전자는 당황해서 재빨리 언니를 태운 채 병원으로 달려갔고, 나는 옆 좌석에서 빨개진 채 헤롱헤롱거리는 언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번에는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야 난…시아를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녀가 대답했다.
=
"내가 너무, 심했던 걸까."
혼자서 내뱉어보는 자조의 말. 공원 중앙에 놓인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고, 이곳저곳 칠이 까진 벤치는 냉랭하게 식어있다. 나는 애매한 밝음을 자랑하는 그믐달을 올려다보았다. 그 청승맞은 분위기가 왠지 지금의 나랑은 어울리는 것 같아서, 썩 나쁘지 않은 느낌. 이런 말은 답지 않게 너무 감성적인 걸까.
"하아…"
담배연기처럼 뿜어져 나오는 한숨. 무겁게 가라앉아선, 내 허벅지를 습하게 적신다.
담배는 전생에서 몇 번 펴보고 그만뒀는데, 그때는 내가 완전히 민짜여서 그랬던 건지. 떨어진 거 한 개비라도 있다면 입에 꼬나물고 싶은데, 개처럼 주저앉아서 바닥이나 들여 볼 기분은 도저히 아니다.
"…"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벤치에 등까지 기댄다. 척추를 시원하게 간질이는 밤의 냉기. 평소라면 머리를 한결 개운하게 만들어줬을 테지만, 머릿속은 출근길 서울행 고속도로처럼 그저 텁텁하기만 하다. 뭔가 이것저것 떠오르는데, 이것저것 망쳐버리고 만다. 의미 없네.
두루뭉술함 투성이에 유일하게 선명히 떠오르는 상은 언니의 우는 얼굴. 그 눈물을, 언제 마지막으로 봤더라. 적어도 까마득한 기억.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듯, 마모된 추억.
간절하다 못해 애절한 얼굴로 내 다리를 붙잡는 언니의 두 팔이 떠오른다. 걷어차듯이 내쳤었다. 그리 매몰차게 굴 생각은 없었는데, 그만 흥분해서 자신을 주체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싸잖아.
그때와 같은데, 그때와는 다르다. 언니가 싫은데, 언니가 싫진 않다. 첫사랑에 빠진 소녀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람.
보통이라면, 그야 싫겠지. 한번 바꿔서 생각해볼까. 어느 날 남동생이 형의 컴퓨터를 뒤져보니까 자기 알몸 사진을 비롯하여 화장실에서 똥싸는 영상까지 전부 다 하나하나 기록되어 있다.그리고그걸로 몰래 딸을 치고 있다. 솔직히 존나 소름 돋잖아. 퀴어를 차별하지 말아달라고? 어쩌라고. 보통의 형제자매 사이라면, 바로 부모에게 일러바치고 절연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럼 우리가 보통 자매인가?
'그야 난…시아를 좋아하니까.'
아직도 언니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마디가 남아있는데, 그것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사이 나쁜 형제자매가 많듯이, 사이 좋은형제자매도 웬만큼 있을 테지만, 그냥 사이좋다고 치부하기에 이 관계는 다소 무겁다. 굳이 따지면 질척한 늪에 다리 한짝을 빠트리고 온 기분. 애당초 빠져나올 수도 없지만, 딱히 빠져나오고 싶지도 않다.
그럼 용서해줄까. 호구처럼.
불현듯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쥐어뜯듯이 붙잡는다. 머리털 끝자락에서 천천히 피어오르는 예리한 통증. 언니가 나를 단순한 자매 이상으로 좋아하던 것은 옛적부터 알고 있었다. 왜냐면 나 또한 그랬으니까.
단지 언니의 그 감정이 성애로 이어질 거란 생각을 못했을 뿐. 왜 언니도, 강선아도 나 같은 인간을 좋아하는 걸까. 껍데기만 멀쩡하지 나는 문제 많은 인간인데, 어찌 보면 그들보다도 문제 많은 병리적 인간일 지언데. 암세포 같은 정신병들이 뇌 속에 가득 들어찬 인간.
언니를 의심할바에야 세상의 다른 모두를 의심하는 게 낫다. 다른 누구를 의심해도 언니는, 언니만큼은 도저히 의심할 수 없다. 나는 그토록 언니를 믿었는데, 언니는 내 뒤에서 몰래 그런음습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대체 왜 내 알몸 따위를 찍은 건데? 차라리 언질이라도 미리 해주었으면 달랐을까. 언니가 아무리 내게 해준 것이 많다 해도 이건 아니잖아. 그래, 언니는 내게 해준 것이 많다.
가슴의 밑바닥에 켜켜이 쌓이는 갈등의 잔재. 애초부터 그저 그런 관계였다면, 끊는 것도 쉬웠을 텐데, 또 바보처럼 혼자서 고민하고. 차라리 쉽게 용서할 정도로 대범한 성격이었더라면, 하는 망상을 펼치기도.
"…그렇게 쉽게 용서해줄 리가 없잖아."
아무튼, 아무튼, 지금 언니의 얼굴이 보기 싫은 것은 사실이다.
아니, 지금은 누구의 얼굴도 보기 싫어. 제것이 아닌 냥 무겁게 느껴지는 팔등으로 눈가를 덮는다. 그러자 달빛마저도 자취를 감추고, 감싸오는 어둠.
잠이라도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