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9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49/73)



〈 49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정말, 노숙자도 아니고 밖에서 뭐하는 짓이에요."

"…"

투덜대면서 소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닦는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쓰다듬는 부드러운손길. 설마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남의 시중을 들게 될 줄이야. 이자나는 드라이기의 전원을 켜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라는 게 우스웠다.

소녀──시아는 인형처럼 잠자코 이자나의 손길에 머리를 맡겼다. 이내 머리를 다 말리자,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칼이 새하얀 등을 포근하게 덮는다. 잠시 그 위로 올라오는 향긋한 샴푸 내음을 음미하던 이자나는, 장난스런 얼굴로 시아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여긴 치안이 좋은 편이라 상관없지만, 유럽 같은 데서 그러면 진짜 납치당한다구요? 가뜩이나 시아 씨는 예쁘니까."


경호원에게서 공원 벤치에서 노숙 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기겁하며 얼른 데려오라 했었지. 다행히 시아는 아무런 반항 없이 이자나의 집으로 왔고, 이자나는 차게 물든 시아의 몸을 따뜻한 물에 씻겼다. 마치 시녀나 할법한 보살핌이었지만, 거리낌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을 묘하게 즐기는 자신이 있었다.

화장대 거울을 통해 보이는 가녀린 어깨,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 도드라진 쇄골을 손톱 끝으로 간질인다. 움찔거리는 기색도 없이 미동도 않는 몸. 정말로 인간이 아닌 인형을 다루는 듯.

"이자나."

"네."

갑작스런 시아의 부름. 스킨쉽이 너무 과했나? 라는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말. 이자나는 그녀의 몸을 은근히 탐하던 손가락을 움찔했다.

"영화 보러 가자."

"네…네?"


치킨



=

"뭐 볼래?"

"어, 어어…"


영화는 다음에 보도록 하죠──그러나 한번 결심을 입에 담자 소녀는 답지 않게 적극적이었고, 답지 않게 재빨랐다. 제대로 된 옷을 차려입을 시간도 없이 시아의 손에 끌려나온 이자나는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동발권기와 점원이 서있는 매대, 사이좋게 손을 맞잡고 있는 커플과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 네 명. 한쪽 벽면의 대부분을 차지한 신작 영화의 포스터와,고소한 옥수수 냄새,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는 평상복으로 위장한 경호원들이 그녀들을 호위하고 있었다.


"가, 갑자기요?"

"…이제 와서 묻는 거야?"

"그야 시아 씨가 갑자기 절 끌고 나오니까…!"

"보기, 싫어?"

이자나의 손을 맞잡은 손이 스르르 풀린다. 동시에 축 처지는 고개. 하얀 얼굴에 옅게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이자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사랑에 빠진 소녀로서 도저히 거절할  없는 모양새였다.

그러자 아까까지의 행동은 전부 연기였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쳐들고 앞으로 척척 걸어 나가는 시아. 차마 예상 못한 발칙함에 이자나는 평소의 품위도 잊고서 입을 크게 벌렸다.

이자나가 그러는 사이 시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티켓을 뽑고, 아무렇지도 않게 라지 사이즈의 팝콘을 샀다(물론이자나의 카드로 긁었다).

이 사람,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건가?

"대체 무슨 영화를 보려고 이러는 거에요?"

"샤크네이도."

"?"

"샤크와 토네이도를 합친 거야."

"????"

뭔데 그 제목부터 대놓고 B급인 영화는.

생각하는 동안 또 끌려가고 만다. 리드당하는 기분이라 나쁘진 않은데, 뭔가 좀 얼떨떨한 기분. 원래 각본대로라면 지금쯤 우울감의 극치에 빠져있을 소녀를 성심성의껏 위로하고 있어야 하는데, 겉보기에 소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친언니라는 작자가  년 동안 그녀를 도촬했다는 사실을 막 알았음에도.


"시아 씨…정말로 괜찮은 거에요?"

"나는 괜찮아. 괜찮지 않더라도, 괜찮을 거야."

"…그 말이 더욱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요."

"아무튼."

아무튼, 이자나는 시아와 함께 영화를 봤다. 예상대로 영화는전형적인 B급 장르의 노선을 따르고 있었고, 나름 공들여 찍은 액션씬도 이자나의 눈에는 그저 고리타분하게 비칠 뿐이었다.

'돈이야 썩어 넘치는데도 왠지 돈이 아까워지는 기분이에요!'

"…이제 됐죠?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슬슬 돌아가죠."

"…"

무심코 내뱉어버릴 뻔한 감상평을 속으로 삼키며 이자나는 말했다. 묵묵히 남은 팝콘을 쓰레기통에 탈탈 터는 시아. 기껏 가장 큰 사이즈를 샀건만, 그녀는 손도 대지 않았다.


"다음엔 뭐 볼까?"

"또…또 보자구요?"

"아, 저거 재밌겠다."

"자, 잠깐만요!"

──킬빌? 저거 틀딱 영화잖아? 갑자기 웬 재상영이래?

그거야 알 바 아니고, 이번에는 질질 끌려가지 않았다. 이자나는 시아의 손을 붙잡은 채 발바닥을 땅에 딱 붙였다. 움직이지 않는 묵직함에 앞을 향했던 시아의 고개가 슬쩍 뒤로 돌아갔다.

"시간도 너무 늦었고, 저도 피곤해요. 시아 씨도 안 좋은 일로 심란하잖아요? 어차피 학교 따위야 어찌 돼도 좋으니 오늘은  자고 다음날 보도록 하죠."


딱 잘라 말하니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어여쁜 얼굴. 그에 한순간 흔들릴 뻔한 마음을 이자나는 간신히 붙잡았다.

뭐라 해도 사랑하는 연인의 부탁이다. 맘만 같아서는 순종적인 강아지가 되어 전부 들어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웠다. 시간도 늦었고, 무엇보다 시아의 상태가 걱정이 된다.

"…"

'어라, 설마  연기 들어가는 건가. 정말이지, 아무리 풀 죽은 체 해도 이번엔 안 넘어갈 거라구요? 이자나, 아니 이사카는 바보가 아니니까!'

"…안 돼?"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는 시아. 힘없이 처진 눈꼬리와 머뭇거리는 입술, 그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몰캉한 혀.

색즉시공색즉시공색즉시공색즉시공섹스시공──그 순간 전조도 없이 찾아온 에로스가 이자나의 심장에 대못만한 말뚝을 박았다. 그리고 이내 그 요망하고 앙증맞은 입술을 열었다.

'흑우쉑ㅋㅋ'

"─물론 되고 말구요!!"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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