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0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50/73)



〈 50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다음엔 저거."

"또…또요오…?"

"이번에 정말 마지막이니까."


여자들의 피 튀기는 싸움이 지나가고,  이후로내리 세편을 연속으로 감상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새벽의 한창때, 이자나의 눈에는 점점하이라이트가 사라져갔고, 매대에 선 점원은 '재들 또 왔네…'라는 눈빛으로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물론 시아는 쌩쌩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발권기에서 기계적으로 티켓을 뽑은 뒤, 헤롱거리는 이자나의 손을 질질 끌면서 다음 상영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도착한 상영관. 어둠이 짙게 깔린 극장 안에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쌩쌩한 에어컨 바람이 이자나의 머리를 살짝 들뜨게 했다.

"후헤에…"

질질, 질질, 이건 내 캐릭터가 아닌데……하면서도맞잡은 손을 뿌리칠 생각은 들지 않는다. 본래라면 싫은 건 싫다, 딱 잘라 말하는 스타일인데도 왠지 모르게 거절할 수가 없다. 정확히는, 망설여진다고나 할까. 기나긴 광고가 끝나고 제작사 로고가 스크린 위로 떠올랐지만, 이자나는 시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그저 헤벌레─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여긴 지옥이에요…영화지옥…"

"쉿, 극장에선 조용히 해야지."

"어차피 우리밖에 없는데에…"


이번 영화는  뭘까. 입장 전에 넌지시 들었던것 같은데, 정신이 없어 그만  귀로 흘려들었다. 뭐야, 좀비랜드? 이것도 액션물이잖아.

생각하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구워어─하는 좀비의 신음소리. 쾅하고 샷건 쏘는 소리. 너드 같이 생긴 주인공이 쓰러진 좀비의 머리통에 대고  발을 더 쏜다. BOOM!

그러고 보니 오늘 본 영화가 죄다 액션영화 뿐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액션 장르 취향인 건가. 시작부터 유혈이 낭자하는 스크린에서 시선을 돌린 이자나는 시아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느 때와 같이아름다운 이목구비, 집중하는 건지 살짝 좁혀진 미간. 의외일 듯 하면서도 은근히 어울리는 게, 묘한 아이러니다.

그 와중에도 영화는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다. 죽이고  죽인다. 좀비를 죽인다. 유명한 코미디언도 죽인다. 제법 유쾌한 블랙코미디가 몇 차례 지난 후 다시 쾅쾅, 놀이공원에서도 쾅쾅. 떼거지로 방역당하는 좀비들. 자고 싶어도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었다.

그렇게 20시간 같은 2시간이 지나고, 딱히  것도 없는 크레딧이 올라온다. 검은 화면에 하얀 글자들이 속속들이 떠오르는 것을 보자마자 이자나는 재빠르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죠…? 또 본다고 하면 저 이번엔 진짜 화낼─"

"이자나."

"왜요…"

평소라면 '네, 시아 씨!'하고 기쁘게 대답했을 텐데, 너덜너덜한 지금 상태에서는 아무래도 말투가 퉁명스러워진다.

이자나는 간절한눈빛으로 가만히 앉아있는 시아를바라보았다. 이제 제발 집에 가서 자자. 토끼처럼 충혈된 눈이 못내안쓰러웠다.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간다고 생각해…?"

"네?"


뜬금없는 질문에 이자나는 저도 모르게 되묻는다. 그러나 어딘가 우수에 젖은 시아의 두 눈동자는 여전히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설마 감상평으로 내놓은 그런 철학적인 질문인 건가. 아니 방금  영화는 그냥  없이 보라고 만든 거 아니었나?

시아는 다만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담백한 목소리가 운율처럼 흘러나왔다.

"나는 사람이 죽으면 영화관에 간다고 생각해."

"영화관요?"

"그래, 영화관."


제가 죽고 나서 영화관에 갈 지는 몰라도 지금 저는 영화관에서 졸려죽을 것 같은데요──이자나는 무심코 튀어나올 뻔한 말을 도로 삼켰다. 시아의 얼굴은 어느 일상의 풍경과 다를  없이 담담했지만, 그렇기에 차마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영화관 의자에 앉은 채, 양손에는 팝콘과 콜라가 들려있고, 스크린에서는 자신의 인생사가 영화처럼 압축되어서 흘러나와. 검사로 살아온 사람은 편의 법정영화를 볼 테고, 군인으로 살아온 사람은 한 편의 전쟁영화를 보겠지."

"…"

"어차피  비슷비슷한 인간 군상들이 뭐 그리 특별할 게 있다고.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비슷해 보이는 인생일지라도 당사자들이 느끼는 건 다 달라. 비슷한 생활수준에 비슷한 직업을 가지고 있어도, 누구는 자기 인생이 담긴 영화를 '제국의 역습' 쯤으로 여기고, 또 다른 누구는 '라스트 제다이' 쯤으로 여기겠지."

"그…런가요?"

"그런데 중요한 건 영화가 아니야. 정말로 중요한 건──사람의 인생은 연기로 점칠 되어 있다는 사실이야. 예외라고는없이, 누구나가."


인생은 무대 위 한 편의 연극. 작은 목소리로 시아가 덧붙였다. 숱한 작품들에서 질리도록 인용되어 온 셰잌스피어의 말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 앞에서라도 가식은 떨쳐낼 수 없어. 친한 친구 앞에서의 자신과 혼자 있을 때의 자신──이 둘이 정말로 100퍼센트 같을까?"

"아무리 그래도 조금은 다르겠죠."

"그래, 모두가  그래. 어쩌면 혼자 있을 때조차, 인간은 거짓을 덮어씌우고 있을 지도 몰라."

"…그래서, 하고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문장에 마침표를 찍기 무섭게 검은 눈동자가 이자나를 향한다. 이자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눈을 지그시응시했다. 그러자 그 눈이 가까이 다가왔다.

따뜻한 숨결이 이자나의 콧망울을 간지럽힌다. 살짝 메마른 연분홍빛의 입술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달싹인다. 서로의 심장 고동이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 당연하게도 이자나의 심장 박동은 빨라졌고, 그녀는 한순간 호흡을 멈췄다.


"그 공원에서, 쭉 생각했어."

"아…"

"어차피 모두가 배우라면, 나 자신조차 연기자에 지나지 않는다면, 기왕이면  파치노 같은 명배우가 되면 좋은  아닐까. 자신이 몰입해있다는 사실조차 까먹는, 그런 대배우가."

검은 눈동자가 자신과 마주본다. 그래, 그녀는 만날 때부터 이런 눈을 하고 있었다.  혼자 세상 모든 우울함을 다 떠안은 듯한, 나락의 터럭과도 같이 온갖 감정을  집어 삼키는 눈동자.

마치 별조각 하나 없는 도시의 삭막한 밤하늘, 그 눈에 홀려서 그녀에게 접근했고, 운명에 홀려서 그녀에게 반했다. 차근차근 진행된 로맨스의 단계.

그녀는, 이시아는 심해다. 왜냐면 모든 것을 빨아들이니까. 그런 오그라드는 비유가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무렵, 어느 샌가 이자나는 인어공주가 되어 'under the sea'를 열창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랍스터 새끼는 대체 어디로  거야? 아니, 지금은 오히려 좋다.

"이자나는  좋아하지?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서."

"그, 그건…"

"겨우 만난 지 얼마 안  친구를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사람은 없잖아. 바보라도, 알  있을 걸."

점점 더 가까워지는 그녀의 얼굴. 그녀의 긴 속눈썹이 자신의 긴 속눈썹에 스치운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더 검은 그 눈동자, 흔하디흔한 갈색과는 다르다. 그리고 오똑한 콧대와 짙은 쌍꺼풀, 현실과 동떨어진 문장들을 나긋나긋 나열해대는 혀.

세상의 모든 빛이 꺼지고, '우리'라는 단 둘만이 남는다. 조명은 나의 비단 같은 머리카락, 음악은 지루한 3류 영화의 액션씬. 피가 튀기고, 살점이 튀긴다. 전기톱 위잉거리는 소리. 나뭇잎은 모두 시들고 세계는 회색빛인데, 당신만이 화려하게 빛나네요. 겨우날의 한창때 우연히 찾은 벗꽃이야말로 당신인 걸까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두른 자유의 여신상조차 당신보다는  아름답겠죠. 미안하지만, 맛이  제 머리로는 이보다 더 로맨틱한 문장을 떠올릴  없어요.

"그렇다면 나 또한 이제부터 이자나를 사랑하도록 할게. 이자나가 내게 그렇듯이."

"시, 시아 씨?"

"이자나에게는 받은 것이 많기도 하고, 분명 그 편이…분명, 분명 모두에게 이로운 길일 거야."


그녀의 얼굴이,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저기, 영화 끝났으니 이제 나가셔야─"

-철컥

"─히이익!!"

"흐응…"

아아, 아버님. 이사카는이렇게나 음란한 아이였던 걸까요. 손톱이 살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어 봐도, 무심코 야한 비음이 터져 나오고 만다. 혀끝에서부터 올라온 짜릿한 쾌감이 온 말초신경을 적시고, 자극 받은 허리가 저절로 들썩거린다. 입 안을 적시는 캬라멜 팝콘의 달콤씁쓰름함. 슬며시 가슴팍에서 꺼낸 총을 들이밀자 기겁하며 사라지는 알바생 따위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그저 끈적하게, 최대한 끈적하게 서로의 혀를 탐하고 서로의 타액을 교환한다. 좀 더러운데, 지금은 있는 힘껏 더러워지고 싶은 기분.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은 아예 달팽이관에 자리를 잡아버렸다.

마치 석유통을 들이부은 캠프파이어처럼 온몸이 화악 달아오른다. 이자나는 시아의 가는 등허리를 으스러져라 꽉 껴안았다.

척추도 예쁘네요, 시아 씨는.


=



"춥네…"

창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밤바람이 끈적하게 젖은 몸에 스푼의 청량감을 더한다. 어지간한 호텔 침대보다도 푹신한 매트리스, 시아는 허리를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옆자리에서는 잠에 빠진 이자나가 콧소리를 색색거리며 내고있었다.

한 손으로 라이터를 키고, 다른 한 손으로 더듬더듬 무언가를 찾는다.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싶은 기분인데, 침대 옆의 작은 탁자 위에는 쿠바의 혁명가나  법한 두꺼운 시가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시아는  수 없이 그것을 집어 들고 끄트머리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독한 내음은 사정없이 여린 폐를 찢어 갈기고, 콜록콜록 터져 나오는 기침. 그러고 보니 이번 생에서는 이게 첫 담배구나. 목울대가 찢어질듯이 아픈데, 왠지 이것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다.


'그야 난…시아를 좋아하니까.'

"…콜록!"


뭉게뭉게 퍼져나가는 담배연기 사이로 익숙한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지나간 것도 같은데──지금은 떠올리고 싶지 않아. 촉촉함을 매단 얼굴로 그저 있는 힘껏 이 매캐함을 빨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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