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1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51/73)



〈 51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우웅

"!"

별안간에 나타난 진동이 밤의 정적을 깨트리고 울려 퍼진다. 허겁지겁 핸드폰의 잠금을 풀어보지만, 정작 보내져온 것은 무단결석을 질책하는 담임교사의한 마디.


“하아…”


바닥이 꺼질 듯한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내렸다가, 다시 들고서는 크게 상처받았을  아이를 위한 문장을 쥐어짜낸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 구질구질한 마디들을 어쩌구저쩌구. 이미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300번은 더 보낸 것 같은데, 하나 같이 답은 없다. 소리를 질러봐도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는다.

전송버튼을 딱 누르고, 기다려도 기다려도 사라지지 않는 '읽지않음' 표시. 초조한 듯 약지손가락으로 핸드폰 액정을 두들기지만, 끝끝내 울리지 않는 진동.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다. 예상했던 일인데, 예상했던 일인데.

초조함과 고독이 함께 손잡고 가슴 한가운데 패인 골 안에 내리 앉는다.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집어던지고, 아직 그 아이의 냄새가 남아있는 듯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콧구멍에 힘을 주자 느껴지는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 변태 같은 건 아는데, 그래도 어떡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은데.

그래, 미쳐버릴 것 같다. 애꿎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악한다. 그렇게 반쯤 머리통을 탈출한 이성을 다시 망치로 두들겨 넣자, 커피 같은 색의 피가 흘러나온다. 줄이 뜯어진 통기타로 고물 락큰롤을 노래하고, 탁 소리 나게 닫히는 워크맨.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그런 의미 없는 되풀이. 돌이켜보면 그저 회한만이 시큰거리고.

머릿속을 점거한  사라지지 않는 그 아이의 얼굴. 내가 이러고 있는 동안  아이 또한 한번이라도 나를 생각해줄까. 내가  아이를 생각하는 것만큼 그 아이도, 는 바라지도 않는다. 곱절에 곱절을 더한 망상 버라이어티.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버러지는 노래한다.  기타케이스에는 고작 10센트짜리 동전이 하나 놓여있을 뿐이다. 안녕 루스벨트. 어느덧 자연스레 세는 것을 그만두고, 몇 천 번째로 빈자리를 자각하자 또르르 흘려 내리는 눈물. 베개 맡에는 벌써 익숙해진 짠내가 가득하다. 퀘퀘함, 그리고 퀘퀘함 더하기 퀘퀘함.


"시아야…"


새벽 2AM.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중.

=



"아…"


벤치에 앉은 채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짜증나리만치 쨍쨍한 햇살, 유유자적 흘러가는 구름. 한여름, 중천에 떠오른 해, 습습한 무더위가 사뿐히 어깨를 적신다. 문득 느끼는 거 한 가지, 내 인생이 어찌 돼도 세상은 좆도 신경 안 쓰는구나. 하긴, 늘 그랬다.

 편에서는 이자나가 아이스크림을 사고있었다. 귀족아가씨한테 이런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시키다니, 나는 정녕 쓰레기인 걸까. 아니면 이자나가 그만큼 호구인걸까. 의미 없는 반복구간에 루프를 당긴다. 오늘은 머리가 좀 이상하다. 아니, 언제는 안 그랬던가.

"시아 씨~"


해맑은 얼굴로 도도도 달려오는 게,  순종적인 강아지 같다. 그나저나 저러다  넘어질  같은데, 생각하자마자 마침 앞으로 고꾸라지는 그녀의 몸. 재빨리 일어나서 받아들인다.

나, 역시 멋짐.

"아으…죄송해요…"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그러면 됐어."

쏟아진 아이스크림이 하얀 블라우스 위로 덕지덕지 묻었지만, 어차피 화장실 가서 대충 닦으면 되는 것. 겨우 이 정도로 화를 만큼 소인배는 아니다. 품에 안긴 이자나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면서 끈적거리는 아이스크림을 훌훌 털어낸다.

"아, 여기, 손수건 드릴게요."

"그런 건 필요 없어."

"네?…읍!"


찐득한 아이스크림이 묻은 검지를 벌어진 이자나의 입에다꽂는다. 놀랐는지 손톱을 살짝 깨무는 앞니, 그러나 태연스럽던 표정은, 이내 달콤하게 녹아내린다.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몰캉거리는 혀가 수줍게 움직이며 손가락에 붙은 더러움을 씻어 내린다.  뺨에 핀 홍조 한 쌍이 아카시아꽃 마냥 사뭇 곱다.

충분히 즐겼다 느꼈을 무렵, 손가락을 빼낸다. 손톱 끝과 그녀의 입술 사이로 질척하게 늘어지는 은빛 실타래.

"바, 밖에서 이런 짓은 하지 말아주세요."

"뭐 어때. 좋았으면서."

"시, 심장에 나쁘다구요!"

늘 느끼는 건데, 이자나는 말이 많은  같아.

말로 직접 내뱉는 대신 그녀를 끌어안는다. 나와 비슷한 체구가, 살짝 어깨를 비틀면서도 거세게 저항 못하는 모습이 못내 사랑스럽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아이가 내 연인이라니, 아직도 꿈만 같다. 마치 하늘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

그래서일까. 마음에 담아둔 말도 금세  내뱉고 마는 건.


"이자나."

"…네."

"우리, 독일로 가자."

"독일──이요?"

놀란 얼굴로 되묻는 이자나. 동그랗게 눈을 뜬 그녀의 말랑한 볼가를 손끝으로 간지럽힌다.

"그래, 네 고향으로."

"정말로요? 저는 좋지만…시아 씨는."

"나도 좋아. 네가 좋다면."

"그,그럼 지금 당장 남는 전세기를 구해보도록 할게요!"

"후후, 그렇게 유난 떨 필요는 없어."


그렇게나 기쁜지, 이자나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간다. 나는 살며시 웃으면서 계속 그녀의 볼가를 쓰다듬었다. 중독될 것만 같은 말랑함.

독일이라──어젯밤 문득 생각나서 갑작스럽게 결정한 거긴 하지만, 뭐, 그곳에서의 생활도 나쁘진 않겠지. 유럽의 필수 관광 코스  하나인 만큼 볼거리도, 먹을거리도 많은 나라다. 무엇보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장소.

내 손길에 순순히 제 얼굴을 맡기는 이자나를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녀는 착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앞에서는 무척이나 착하다. 그리고 내 부탁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준다. 왜냐면,나를 사랑하니까. 그리고 나 또한 그런 그녀를 사랑한다.

비록  심장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있는 채지만, 분명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어.


=



언니가 보고 싶다.



=



더 이상 길게 끌지 말자. 진득한 물방울, 그윽한 눈빛, 지독한 얼굴. 언니가 정말로 내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다면, 어차피 이어지지도 않을 관계다. 가녀린 어깨, 딱딱한 쇄골. 자매 근친 같은 거, 중세시대에도 안하던 짓거리니까.

왜냐면 너무 마니악하다. 언니에게도, 나에게도, 서로에게 해로운 일. 부드러운 귓볼, 평평한 목울대. 탐하는 혓바닥.

그렇다면 나는? 그렇다면 나는?  감정은?  마음은 중요하지 않은 건가?

이건 감정론을 논하는  아니야. 다만 해롭기 때문에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한  말하지만 이건 나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 둘을 위해서야.

아마 한 10년만 지나도, 지금의 자신을 장하게 돌아볼 걸. 그때 내가 한 선택은 역시나 옳은 선택이었다고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죄인의 아가리는 늘상 열려있다. 철학을 논할 때는 항상 마음을 죽여 놓도록 하자. 비대화된 우리네 자아는 늘상 참견하기를 좋아한다.

드럼스틱이 가슴팍을 두들기고, 시원하게 쭉 내뻗는 킥 스네어. 경질된 고음이 산산조각 흩어져 내린다. 물컵을 기울여도 담긴 물은 흘러내리지 않는다.  또한 결국 추억에 흠뻑 젖어 못 잊는 못 잃는 한 사람에 불과하거늘. 달리의 그림에서 우리가 얻을  있는 것이라곤, 간절한외침무의미하게뒤쫓는뒷모습. 오 사랑스런 그대여 날 떠나지 마오. 기껏 내뻗은 손은 매몰차게 내쳐진다. 왜? 사실은 모두 내가 지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끈적하게 녹아내리는 감각 앞에 모든 허물이 무너져 내린다.

손톱으로 간질이고, 손톱으로 살점을 뜯는다. 자신을 파먹고, 자신을 토한다. 시끄러운 윗집 개새끼마저 짖기를 멈춘 새벽. 전기톱이 필요해.

좋아한다, 싫어한다, 좋아한다, 싫어한다, 하나씩 나뭇잎을 뜯는다. 비명을 지르는 꽃줄기. 근데 나뭇잎이 너무 많아서 도통 결론이 나질 않는다. 큰 건  바라니 그냥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한번──구질구질하니.



그거  병신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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