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2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52/73)



〈 52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응…"


새벽녘의  공기가 폐부를 간질이고, 찌푸둥한 허리를 힘겹게 일으킨다. 침대 옆의, 자그마한 탁자 위에 놓인 디지털시계가 고하는 시각은 4시 47분. 다시 잠들기에도, 계속 깨어있기에도 애매한 시간대다. 여명의  자락에 달한 태양은 슬금슬금 준동을 준비하고 있다. 안녕 텔레토비 친구들, 언제나 거지같은 아침.

스르륵 내려가는 이부자락에 봉긋한 가슴께가 드러난다.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어지럽게 산개한 금발이 보인다. 그중 몇 가닥을 쥐었다 폈다, 아무 의미 없는손장난을 쳐보기도 하고. 스르륵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새하얀 목젖 위로 떨어진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커튼을 확 펼치자, 어슴푸레한 하늘, 어둑한 태양, 엉거주춤한 바람. 모두가 어중간함 속에 물들어 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의 나 또한. 감상 따위는 됐으니 다시 침대 위에 엉덩이를 붙인다.

-우웅

그 순간 울리는 핸드폰 진동음. 반사적으로 손을 뻗다가, 액정 위로 뜬 익숙한 이름에 3초 정도의 시간을 갈등에 소요하지만, 이내 애꿎은 핸드폰을 베개 맡에 던진다. 어차피  똑같은 사과 문자일 테지. 내가 미안해, 내가 미안해. 앵무새 같으려니.

시발 진짜로 미안하면 연락을 하지 말라고.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직면하기 보다는, 회피하고 싶은 기분. 그런데도 그 작달만한얼굴이 계속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올리비아 같은흑발에, 나른하게 처진 눈꼬리, 장미와 클로버 같은 입술. 내게 꿈을 주세요 샌드맨 씨. 미쳐버렸나. 사실 정상과 비정상 둘 중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아마 확실하게 비정상. '아마'와 '확실하게'는 맞물리지 않으면서도 막상 붙여놓으면 어울리는 묘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어설픈 연상에 무언가를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감정은 감정이고, 회고는 회고다. '겨우'에 지나지 않아, 봄은 대체 언제쯤이나 찾아올런지. 어쩌면 이미 잃어버린 걸지도. 어느덧 헛소리를 주절주절 떠벌리는 데에도 자신이 있게 되었다. 그렇게 익숙한 이미지를 가슴 안에 파묻는다.

망상의 그녀를 떨쳐내고, 바로 옆자리의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다. 백지 같은 이마를 손톱 끝으로 살며시 쓰다듬자,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그 안에 숨겨진 녹색 눈동자가 드러날듯 말듯.

동화  공주님이 현실에 나타난다면 바로 이러한 모습이겠지. 평생에 한번 마주치기도 힘든 아름다움인데, 왜 내 심장은 이리도 조용한 걸까. 그만큼 여자의 마음에 덧칠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다만 부재중인 익숙함이 그립다.

"…언니"

혼잡해지는 마음을 서둘러 갈무리하고, 다시 베게 맡에 머리를 눕힌다. 어설픈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 그래서는 안 된다. 오직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니를 위해서. 어차피 이뤄져봤자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결말을 알기에, 그렇기에.

그렇게 비겁한 변명을 내둘러본다.



=

"좋은 날씨네요. 그렇지 않아요?"

"응."

웃음기 띤 얼굴로 돌아보자, 마찬가지로 옅은 미소로 화답해주는 그녀. 쨍한 햇볕이 그 찬란한 미모를 수놓는다. 이자나는 시아의 비어있는 왼손을 양손으로 붙잡고서 경쾌하게 흔들었다. 주변에는 흑곰을 비롯하여 경호원 열댓명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마치 이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은 기분. 일률적인 정장에 몸을 싼 경호원들따위 장식물로 전락해버리고, 대신 꽃밭으로 화한다. 상쾌한 산들바람, 향긋한 꽃내음. 멍청한 오웰, 유토피아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거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그 어느 곳이라도 유토피아가 된다.

날개 없이도 하늘 끝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아. 맘만 같아서는  비루한 날갯죽지에 닭날개라도 꽂아 넣고 싶지만, 끝내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못내 원망스럽다. 그저 손을 꼭 붙잡은 채 앞으로 나아간다. 호화로운 현대식 저택의 정문을 지키듯이 주차되어 있는 검은 리무진, 이라고 해도 그렇게 길지는 않지만. 요란스러움을 싫어하는 그녀를 위한 배려. 아, 이자나는 정말로 사려 깊은 현모앙처에요!

Shiiiiiiiiiiit!!

당연하지만 욕은 그저 생각만 할뿐,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다. 그저 조신함, 어디까지나 조신한 아가씨를 연기한다. 이미 일상이듯이 몸에  연기.

"얼른 공항까지 가요!"


급하게 구한 싸구려 리무진의 손잡이를 붙잡고, 벌컥 열어제낀다. 신데렐라를 데려갈 호박마차로서는 한참 부족하지만, 뭐 어때. 본래 직접 차문을 여는 일 따위도 여지껏 없었지만, 뭐 어때.

행복하다. 평생을 무상감의 늪에 잠겨, 숨이 막힐까봐 입술만 간신히 빼꼼 내밀고 있었는데, 이 들뜬 감정은 행복이라는 두 글자 외로는 달리 설명이 되지 않는다. 들뜨고 들뜬 마음이, 풍선이 되어 높이 높이 날아오른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도 진행 중.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지만, 앞으로 행복한 나날들이 더욱 많이 남아있기에, 가슴은 기대로 벅차오른다. 통제를 벗어난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이자나는 시아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며 피어나는 꽃처럼 싱그러운 웃음을──

"시아야!"

"…언니?"

시발, 저건 또 뭔데. 제 동생 마냥 길다란 흑발을 이리저리 휘날리며 뛰쳐오는 작은 소녀의 모습에, 이자나의 얼굴이 대번에 썩어 들어갔다.

5미터 정도의 애매한 거리, 경호원들의 제지에 급하게 멈춰선 그 소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앵두 같은 입술을 달싹였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가녀린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정말로 가려…가려는 거야?"

"…그래."

"어디로?"

"독일."

"그런─"

금이 간 유리처럼 소녀의 표정이 흐트러진다. 그에 일순간 시아의 눈썹이 움찔했지만, 무덤덤한 표정만큼은 일그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자나의 얼굴은 여전히 썩어있었다.

"독일어도 못하면서."

"상관없어. 배우면 되니까."

"…그래도,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잖아. 내가 미안해. 앞으로 다시는 그런 짓 안할 테니까. 제발─"

"언니"


무뚝뚝하게 내뱉은  글자에 소녀의 호흡이 한순간뚝 끊긴다. 투명한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그런 소녀를 부감한다.  육친에게 향한다고 보기엔 너무도 딱딱한 시선.

그리고 이자나의 얼굴은 여전히 썩어있었다.

"안 된다는  알잖아. 헤어지는 것만이, 언니에게도 나에게도, 올바른 길이란 걸."

"왜…왜 안 된다는 건데? 나는, 나는…"

"어차피 곁에 없으면 금방 잊혀 질 거야. 정말순식간에."

"──나는 네가 없으면  된단 말이야!"


지가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아주드라마를 찍고 있네.

참으로 애절하게 소리치는 소녀의 모습에 더욱 더 썩어 들어가는 얼굴.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얼굴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며 이자나는 계속 붙잡고 있던 시아의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끌려가지 않는 몸. 조금 힘을 주며 우악스럽게도 당겨보지만, 그 자리에 못 박힌 망부석인 것 마냥 요지부동.


"그냥 가요, 시아 씨."

"…"


말을 걸면서 재촉해보지만 시아의 고개는 돌아가지 않는다. 이자나의 얼굴은 더더욱 썩어 들어갔다.

그러니까, 꼭 자신이 들러리라도 된 듯한,  상황은 대체 뭘까.

"나는 시아 없이 살 수 없어. 시아가 없으면, 괴로워서 미칠 것만 같단 말이야! 그동안 쭉 같이 있었는데,  사랑해왔는데."

"언니."

"만약 네가 독일로 떠나면…나, 죽, 죽어버릴 거야…"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지금 나한테 협박이라도 하는 거야?"

"네가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어쨌거나 나는 진심이니까."

"너─"


이자나의 손을 아주 간단히 놓아버린 뒤, 시아가 성큼성큼 소녀에게로, 아니 자신의 언니에게로 향한다.  이어 짝하는, 경쾌한 소리가 청량감마저 갖고서 울려 퍼진다. 봐주지 않았는지, 폭풍 앞의 갈대처럼 크게 휘청이는 작은 몸.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왜 안 되는 거야? 그만큼 좋아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바보같단 거야! 애초에 우리들은 자매잖아! 그것도 피가 이어진. 그런데 서로 좋아한다는 게 말이나…"

"그럼 너는? 시아는, 내가 싫어…?"

"그야 당연히─"

끊겨진 말을 내뱉는 대신 헛숨만을 들이키는 시아, 그리고 꽤나 오랫동안 이어지는 정적에 이자나는 제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그냥 ‘응 존나 싫어‘라고 말하면 되잖아. 그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표적을 바꿔 저보다도 머리 하나는  작은 소녀를 매섭게 노려본다.  눈초리에 투명한 물방울을 그렁그렁 매단 소녀. 작은 체구와 합쳐져 제법 애처로운 몰골이지만, 이자나의 눈에는 그저 역겨울 따름이었다.

변태 마냥 화장실에도 몰카를 설치한 주제에, 온갖 청순한 척은 다 떨어대는구나──물론 나도 몰래 사람을 시켜 카메라를 설치하려고 하긴 했지만. 화장실에도 설치하려고 했지만은! 내건 사랑이고, 저건 흉측한 스토킹이다. 서로가 좋다면, 그걸로 된 거야.

더군다나 이미 저희들은 몸을 섞은 사이라구요? 영어로는 섹스, 아니 FUCK! 저희들끼리 볼꼴 못 볼꼴 다보고 거기도 조물락조물락 만져주고 서로의 똥꼬까지 핥아준──아니 거기까진 안 했지만, 아무튼  때까지 간 사이랍니다. Do you understand? 당신이  자리 같은  없다구요.

그런 의미를 담아 시현을 매섭게 쏘아보지만, 시현은 이자나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시아를 애달픈 시선으로 바라볼 뿐. 그리고 어쩌면 시아 또한.

하지만 우린 몸까지 섞은 사이인데, 아헤가오에 시오후키까지 간 사이인데, 서로에게 자신의 아다까지 바친 사이인데.

지레 겁먹은 채 이자나는 시아를 돌아보았고, 그녀의 불길한 예감은 불행히도 그대로 적중하고 말았다.

"그건…그건…"

"나는 시아를 좋아해. 시아는, 시아는 어때?"

"…하지만, 우리는 자매잖아."

"으응, 괜찮아. 부모님한텐 내가 잘 말할 테니까."

"게다가, 동성이고…"

"요즘에는 동성 커플도 많은 걸."

"하지만, 하지만─"

"시아야."


이게 아닌데, 이건 아닌데. 인형처럼 감정 없던 눈동자는 어느덧 인간의 마음을 되찾고 한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시현은 그것을 애달프게 바라보며 천천히 시아의, 제 동생의 몸을 끌어안았다. 작은 손, 작은 팔이 시아의 허리를 감싼다.

그리고 이자나는 저도 모르게 Fuck, 이라는 말을 작게나마 내뱉고 말았다. 비록 주변에 눈길도 주지 않으며 서로만을 바라보는 그 둘은 눈치도  챘지만.

"좋아해. 정말로 좋아해. 이 세상 누구보다도,  어떤 것보다도. 시아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나는, 나는 언니를…아니 나도, 언니가 변태라도, 좋아하긴 하지만…그래도 이건…"

"그렇구나. 그렇다면,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마. 그걸로 된 거야. 그걸로 좋은 거야.

"…"

"저기, 시아야."

"…왜?"

"좋아해…아니, 사랑해."

"…나도."

슬픈 고전문학의  장면처럼 애틋하기 그지없는  마디가 오가고, 이내 서로를  부둥켜안는 둘. 서로의 따뜻함이 서로를 달래고, 그렇게 상처난 마음에 연고를 바른다. 참으로 보기 훈훈한 광경 덕분에 이자나의 머릿속은 반쯤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무심코 가슴 속을 뒤적거리는 손길. 그러나 공항으로 가는 와중에 총을 챙겨왔을 리도 없다.


“…왜”

왜 그런 눈으로 저 년을 쳐다보는 거에요?
왜 그런 눈으로 내가 아닌 저 년을 쳐다보는 거에요?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 거에요?

시현을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은 채, 천천히 이자나를 돌아보는 시아. 미안한 감정을 가득 품고서, 꼭 못할 말을 해야만 하는 듯.

 내가 아닌 그 년을, 왜, 왜, 왜, 왜, 왜──

"…미안, 이자나. 역시 독일에는 못 것 같아."


이번에는, 이자나의 얼굴은 일그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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