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레이니에게 들었어. 네가 그녀를 괴롭혔다고.'
'…'
'자꾸 이러면 곤란해, 이사카.'
'…'
무거운 정적을 찢고 그가 입을 연다. 답이 없다는 듯 도리도리 내젓는 고개. 정말로 곤란하다는 표정.
'약혼녀 놔두고 다른 여자랑 헬렐레 놀러다닌 주제에 뭐래 병신이. 내가 닥치고 가만 있으니 레몬 스파클링으로 보이냐 시방새야?'
──라는 반박이 턱밑까지 차고 올랐지만, 소녀는 그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말했잖아. 너랑 나는 약혼 관계로 묶여있긴 하지만, 난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
무겁게 내리깐 목소리에, 사뭇 진지한 얼굴. 다시 고개를 쳐들면,벌꿀 같은 금발에 시리도록 푸른 눈이 보인다. 마치 동화 속 왕자님 같은 외모. 한 여름 밤의 꿈결. 아마 웬만한 여자라면 한눈에 가슴을 움켜잡으며 뻑이 가겠지.
'나도 딱히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야. 난 당신이 아니라, 당신 얼굴이 좋은 거라고, 레이니인지 비키니인지 뭔지 하는 그 나보다 덜 떨어진 년을 괴롭힌 것도, 질투가 아니라 주제도 모르고 우쭐대는 모습이 짜증났기 때문이야. 게다가 어차피 그 여자도 곧 갈아치울 예정 아니야? 꼭 새 자동차가 나오면 헐레벌떡 갈아타는 카푸어처럼.'
──라는 반박이 턱밑까지 차고 올랐지만, 소녀는 그저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다음부턴 조심해. 나도 더 이상 가만있지 않겠어.'
'…'
그 휘황찬란한 외모를 제외하면, 오히려 '싫다' 쪽에 더 가깝겠지. 늘 꿈꿔오던 왕자님의 내면은, 이런 하찮은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그렇더라도, 이 남자가 조금이라도 자신을사랑해주었더라면, 아니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말이야.
그래도, 만약 그랬더라면, 나 또한 이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었을까.
"…미안, 이자나. 역시 독일에는 못 갈것 같아."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후우, 저도 모르게 내쉬고 만 한숨. 차갑게 식은 숨결이 더운 공기 중에 흩어진다. 무심코 치마 주머니에 든 담배를 주섬주섬 찾지만, 아차, 주머니가 없네. 하다못해 담배라도 빨아 마시고 싶은데, 아니 신나라도 불고 싶은데, 고작 한 조각의 위안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어쩌다 삼킨 문장을 은단 굴리듯 한 글자 한 글자 그대로 되풀이한다.
'…미안, 이자나. 역시 독일에는 못 갈 것 같아.'
어젯밤 희희낙락하며 초고속으로 구해놓은 퍼스트 클래스 좌석 2개는 어떻게 하지. 돈이란 게 이리도 아까운 거였나. 텅빈 가슴에 무상감만 켜켜이 쌓인다. 독일에는 못 간다는 그 말이, 단순히 독일에만 못 간다는 말이 아님을 똑똑히 알고 있기에.
익숙한 거절. 결국 그녀 또한, 그 남자와 같은 부류였던 걸까. 그래도 이번에는 진짜로 사랑했는데. 망상, 망상, 피애망상.
누가 보기에도 미안해하는 저 얼굴이 진심이라는 것을 잘 안다. 왜냐면 거짓말을 그리 잘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러나 그 진심이 담긴 얼굴이야말로 무엇보다도 가증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헛구역질이차오르는데, 정작 겉으로 드러난 얼굴 가죽은 태평하기 그지없다.
역겨운 존재. 혐오의 끝자락에 불을 지핀다. 도쿄 디즈니랜드에 가서 뭣 같은 인형탈의 눈에 구멍을 파버리고, 꼬맹이가 간신히 붙잡은 풍선줄을 가위로 싹둑싹둑. 그렇게 한없이 역겹기만 한 그녀건만, 밉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만 16세. 청춘이라는 이름의 거짓부렁. 인생 처음으로 맛본, 달콤하고 바삭거리는 사랑의 질감. 혀로 살살 굴리다 그만 목구멍으로 쑥 넘어가고말아버린 기분.
숨이 막혀와. 켁켁대면서 찾는 물. 그러나 주변은 이미사막이고, 주변에 있는 것들은 죄다 빌어 처먹을 개새끼들 뿐. 이년이고, 저년이고, 이 새끼고, 저 새끼고. 나를 구해줄 왕자님은 쥐새끼 마냥 어디로 토낀 거죠. 아, 저기 있네요. 딴 년이랑 사이좋게 부둥켜안은 그 모습에 울화통이 치밀어 오른다기보다는, 오히려 침침하게 가라앉는 기분.
아아, 어쩌면 '운명적 만남'이란 것도 다 허상에지나지 않았던 걸까요, 라면서 이자나는 혼자 주접을 떨어보기도 하고. 어쩌다 올린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는다. 벅벅, 벅벅. 전혀 아가씨답지 않은 행동인데, 오히려 그렇기에더더욱 자신스럽다.
"이자나…"
그딴 얼굴로 나를쳐다보지 마. 그딴 얼굴로 나를 부르지 마.
나를 배신한 주제에.
나를 버린 주제에.
맘만 같아서는 목 놓아 소리치고 싶다. 서슬 퍼런 목소리로 저주라도 토해내고 싶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저 추할뿐이잖아. 어차피알아주는 이 하나 없고, 또 새하얀 도화지 위에다 새하얀 물감을 덧칠하게 되겠지. 아크릴 물감으로 두둑해진 종이. 그렇게 무의미하게 이어진 나날들.
이 쯤 되면, 싫더라도 깨달을 수밖에 없다. 행복이란 것은 병신 같이 기다리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야만 하는 것임을.
피에타 상 마냥 여전히 서로를 껴안고 있는 둘을 지긋이 바라보며─한순간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아내고─메마른 입술을 천천히 뗀다.
"흑곰."
"예, 아가씨."
"내가 다음에 할 말이 뭔지, 아시죠?"
"…예."
형태가 되지 못한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덩치에 걸맞기 않게 재빨리 움직여 시아의 등뒤를 점거하는 거한. 시아는 다급한 얼굴로 등을 돌렸지만, 그것은 남자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느린 반응이었다.
뒷목에 꽂힌 수도 한 방. 시아의 몸이 천천히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갑작스런 사태에 시현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커헉"
몸은 작지만, 예사내기는 아니라는 것이겠지. 시현은 순식간에 반응하며 남자의 명치를 노렸다. 그러나 깨달았을 때 이미 그녀의 손목은 남자에게 잡혀있었다. 도리어 그녀의 명치에 무자비하게 꽂혀 들어가는 남자의 주먹.
누가 자매 아니랄까봐. 사이좋게 땅바닥에 드러누운 둘을 내려다보며, 이자나는 누구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전부 당신이 나쁜 거야…당신이나쁜 거니까…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