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예컨대,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들 하던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뜰 때는 그와 같은 감상이 문득 떠오른다. 뻐근한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세우면 눈 틈새로 매섭게 찔러 들어오는 환한 빛무리. 어쩔 수 없이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로 잠시 적응의 시간을 갖는다. 희끄무레한 형체들이 어지럽게 번지고, 그 속에 녹아드는 풍경.
그러다 쿵, 하는 것 같은 효과음과 함께 확 트이는 시야. 거무칙칙한 방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택배상자만한 냉장고는 문이 열린 채 방치되어 있고,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의 킹사이즈 침대에서는 산뜻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풍긴다. 천장에 매달린 필라멘트 조명은 잔잔하게 흔들리며 외로이 빛나고 있다. 꼭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이질적인 풍경에 시아는 느릿하게 눈을 뻐끔거렸다.
그때,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일어나셨나요."
"이자나?"
푹신한 흔들의자에 나른하게 몸을 기댄 백인 소녀, 어쩐지 평소보다 색소가 옅어 보이는 금발이 은은하게 빛난다. 얼빠진표정도 잠시, 기절하기 직전의 순간을 떠올린 시아는 단번에 얼굴을 굳혔다.
"이게…무슨 짓이야?"
"장 폴 사르트르, 알아요?"
질문을 던져보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은 맞물리지 않는다. 대신 얼렁뚱땅 시작되는 다른 이야기. 흔들의자가 흔들리며 삐걱거린다.
멍하니 풀린 이자나의 눈은 시아가 아닌 천장에 못 박혀 있었다. 무언가 매캐한 냄새가 풍기는 것도 같은데,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잿빛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는 약병들. 전부가 비어있다.
"그 사람은…아, 뭐하는 사람이었더라. 분명 유명한 사람인데. 아, 분명 책도 읽었었는데. 아."
"이자나."
"아무튼,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더랬죠. 사랑은 본질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임신하고 있다고. 아마 정확한 워딩은 이게 아니겠지만."
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한쪽 발목에 두텁게 채워진 족쇄를 그녀는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
"우리는 사랑을 할 때 상대방 또한 내가 사랑하는 것만큼 나를 사랑해주길 바라죠. 상대방이 스스로의 의지로 나를 사랑해주길 바라면서, 상대방을 속박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주체와 대상의 관계 속에서 무조건적인 사랑 같은 건 헛된 이상일 뿐이고, 결국 사랑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다──나 참, 그깟 게 뭐라고."
"…"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죠? 계약 결혼이나 하다 뒤진 양반이라 그런지, 뜬구름이나 잡고 있네. 나도 가끔 머리 위에 뜬 연기를 붙잡으려 할 때가 있는데. 그래서 그런가. 그나저나 이거 꿈 아니죠?"
그러면서 제 머리를 툭툭 두들기는 이자나. 아랑곳 않고 있는 힘껏 발목을 당겨보지만 족쇄에서부터 이어진 쇠사슬은 꿈쩍도 안한다. 어쩔 수 없이 손을 쓰려고 했지만, 두 손마저 수갑에 채워진 후였다. 시아는 매끄러운 쇠의 표면이 반사하는 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정말 상대방의 의지 같은 게 중요할까요? 짝사랑처럼, 그저 일방통행인 관계로는 안 되는 걸까?……될 리가 없으니, 당신이 지금 여기 붙잡혀 있는 것이겠죠."
"…"
"당신은 저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요. 저도 알고 있답니다. 뭐 친구로서는 몰라도, 연인으로선 아니야.
그래서 생각했답니다. 당신이 곤히 자는 동안,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그리고 드디어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요."
"…"
"조작적 조건화라는 말을 아나요? 스키너는 실험을 통해 쥐로 하여금 지렛대를 누르는 성향을 갖게 만들었죠. 헌데, 감히 인간을 대상으로 그리 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당신이 나를사랑하도록, 그렇게 ‘강화’할 수는 없는 걸까?"
창백했던 양 볼가가 순식간에 발그레해진다. 취한 듯, 달뜬 듯, 점점 고조되는 목소리와 그 가운데 저 홀로 겉도는 식은 눈동자. 천천히,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형체. 답지 않게 투박한 한 손에는 짧지만 서슬퍼런 예기를 발하는 칼이 쥐어져 있었다. 꼭 술병이라도 쥔 것 마냥 손이 덜렁거린다. 스릴러 무비의 한 장면이 떠올랐지만, 시아의 눈은 어디까지나 투명하게 이자나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저 손에 칼 대신 담배라도 쥐어준다면, 입에 사탕을 문 아이처럼 얌전해질까.
"자유의지? 그딴 게 뭐 어쨌다는 걸까요. 어찌 됐건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데, 행복할 수 있는데──그래서, 지금부터 당신을 조교하려고 해요."
"…이자나."
"당신이 나를 사랑하도록, 아니 나만을 사랑하도록. 내가 당신에게 그러는 것처럼, 당신 또한 나에게 그러토록 하기 위해서─"
"그만해, 이자나."
짤막한 한 마디에 바로 눈앞까지 쉬지 않고 다가온 걸음이 뚝 멈춘다. 섬뜩한 예기가 눈앞에서 짙푸르게 발광하지만, 분노하는 것도 아니고, 공포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무표정, 다만 무표정. 어디까지고 감정이 결여된 거울 같은 얼굴이 이자나를 바라보았다.
이자나는 일순간 사고를 방폐했다가, 다시금 그것의 끝자락을 부여잡았다.
문득 벌침 같은 망상이 심장을 스치고 지나간다. 차라리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소리쳤더라면, 무서우니 제발 그만두라고 엉엉 울었더라면, 이암울한 기분도 조금은 개였을까. 그럴리가요그럴리가요그럴리가요. 조용히 수면 위로 떠오른 조소를 가슴 안에 묻어둔다. 익숙한 거짓부렁, 둥글게 깎인 양심의 삼각형. 아픔을 느끼기엔, 너무 무디어진지 오래.
"지금 그만두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어떤 책임도 묻지 않을 거고, 너와의 관계를 끊지도 않을 테니까…이쯤에서 그만둬."
"…"
"아직 늦지 않았어, 이자나. 나는 너를 친구라고─""
"─닥쳐. 닥쳐, 닥치라고 시발!"
가슴 안에 썩은 물처럼 고여 있던 화가 울컥하고 터져 나온다. 참고 참았는데, 순식간에 눈가에서 흘러나오는 물기. 이자나는 근처의 벽을 강하게 찼다. 얼얼한 통증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오자 물기는 더욱 더 짙어지고.
동시에 냉정한 자신이 그런 자신을 평한다. 꼭 철없는 아이 같다고.
"이자나…"
"당신이 나쁜 거잖아…전부 날 유혹한 당신 때문이야. 왜냐면 이사카는 살면서 나쁜 짓 같은 건 아무 것도 안 했는걸. 약은 좀 했지만, 고작 그것뿐인데, 모처럼 아껴둔 처녀도 바쳤는데, 왜, 왜…내가 이렇게 괴로워해야 하는거죠."
그래, 아이 같다. 버릇없는 아이처럼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못 이기고 사정없이머리를 쥐어뜯는다. 호화스럽게 가꾼 머리털 몇 가닥이 떨어져나가고, 다듬지 않은 손톱이 머리 가죽을 긁으며 핏물이 주륵 흘러나온다. 부릅뜬 두 눈에 핏기가 서고, 칼을 꼬나 쥔 손이 수전증 환자처럼 덜덜 떨린다.
광분하는 이자나를 바라보는 말간 흑안이 옅은 색에 물들었다. 동정심, 그리고 꽉 깨문 입술. 당신도 나처럼 괴로운 건가? 그러나 사랑도 뭣도 아니다. 그저 자책일 뿐이다. 내가 이 인간을 이렇게 만들었다, 하는 자책. 애정 따위, 사랑 따위,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더더욱 화가 나는 거다. 저 눈, 저 눈! 왜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왜 그년을 볼 때처럼 나를 봐주지 않는 건데──하지만 당신의 그런 부분까지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아요. 이자나는 하하 웃으며 칼을 쳐들었다.
이건 조신한 아가씨가 할 행동이 아닌데, 익숙한 뇌까림.
"빌어먹을, 알게 뭐람."
이미 허례허식 따윈 집어치우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