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5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55/73)



〈 55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예컨대,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들 하던가.

오랜 새벽에서 깨어나 눈을 뜰 때도 그와 같은 느낌. 뻐근한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세우니  틈새로 매섭게 찔러 들어오는 환한 빛무리. 어쩔 수 없이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잠시 동안 적응의 시간을 가진다. 희끄무레한 형체들이 어지럽게 번지고,  속에 녹아드는 풍경.

그러다 쿵, 하는 효과음과 함께 확 트이는 시야. 화사하게 치장된 방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벽면은 매끄럽게 햇빛을 반사하고 있고, 거대한 원목 책상에서는 고풍스런 분위기가 풍긴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제는 호화로운 광채를 고고히 발하고 있다. 어째선지 침대가 없는 것을 제외한다면, 꼭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귀족 아가씨의 방. 어디선가  듯한 풍경에남자는 느릿하게 눈을 뻐끔거렸다.

그때,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고 처음으로 든 감상은, 무척이나 어리다는 것.

"일어났어?"

"…너는?"

자신은 분명 저택 후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을 텐데──정신이 들고 나면 고풍스런 디자인의 의자에 앉혀진 채 꽁꽁 묶여 있는 몸. 남자는 자신에게 말을 건 소녀의 얼굴과 똑바로 마주하였다. 공교롭게도 늪의 밑바닥처럼 새까만 눈동자 역시 그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분명 누가 봐도 귀엽다고 평할 어린 얼굴이건만, 상황이 겹쳐져서 그런지 괜히 섬뜩하게 느껴진다. 마치, 인간과 한없이 비슷하게 만들어진 인형을 보는 듯.

쩐내 나는 군침을 한 모금 삼키고, 목울대를 꿀렁인다. 남자는 그제서야 소녀의 한 손에 들린 묵직한 연장의 존재를 깨달았다.

"…내게 원하는 게 뭐지?"

"시아,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지?"

"미안하지만, 전혀 아는 바가 없군."


태연한 얼굴로 뇌까리지만 물론 그것은 거짓말. 만일을 대비한 연락책으로서 고용주와 그녀가 홀딱 빠진 그 아가씨──이시아가 돌연 어디로 향했는지 정도는 숙지하고 있다. 남자는 경호팀 중에서도 제법 높은 직책을 맡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뻔한 거짓말이라는 것은 소녀 역시 알고 있다는 듯,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한손에 든 장도리를 빙빙 돌린다.

"그래…그렇구나."

"잠깐,  무슨 짓을!"

마치 치과의사라도 된 듯, 태연스럽게 남자의 입술에다 청테이프를 찍찍 붙이는 소녀. 입술이 강제로 벌려지고, 남자는 있는 힘껏 저항하려 했지만, 사지가 결박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마취 당한 개구리처럼 부르르 떠는 일 뿐이었다.

이윽고 추레하게 벌려진 남자의 핑크빛 속살을 보면서, 소녀는 그 안에 바싹 마른 수건 하나를 우겨넣었다.


"앞으로 모른다…는 대답이 나올 때마다, 하나씩 이빨을 뽑을 거야. 그럼 다시 물을게. 시아는, 어디로 갔어?"

"호흔(모른)─끄악!"

눈 깜짝할 사이에 장도리를 남자의 입 안으로 밀어 넣는 소녀. 혓바닥에 닿는 섬짓한 금속의 감촉에 흠칫하는 것도 잠시, 소녀가 손목을  바퀴 빙글 돌리자 밀물처럼 닥쳐오는 고통에 남자는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옥수수 알갱이 같은 어금니가 멋진 궤적을 그리며 천장으로 날아올랐다.

아마 진짜 치과의사가 본다면 경악할만한 외과 수술. 침과 한데 섞인 핏물이 사방으로 튄다. 소녀는 더러워진 얼굴을 다만 무표정하게 교복 소매로 스윽 닦으면서 다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시아는, 어디로 갔어?"

"히, 히가 이헌다고(니, 니가 이런다고)─"

그러자 다시 한 번 더 빙글.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온몸을 비틀어대는 남자를 보며, 소녀는 기계적으로 피가 묻은 장도리를 남자의 안에 밀어 넣었다.


"하, 할할게(말, 말할게)! 할할 테니까(말할 테니까)!"

"그래."

"아, 아악!!"


남자의 벌려진 입에서 자연스레 비굴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소녀는 기어코 송곳니 하나를 더 뽑고 나서야 피로 흥건해진 수건을 뽑았다.


"추, 충청도…포도농장…비닐하우스, 거기에…"

이빨 세 개가 빠진 구멍 사이로 핏물을 줄줄 흘리며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이 새삼 우스꽝스럽다. 이것이 찰리 채플린 무성영화였다면, 쓴웃음 정도는 지을 수 있었으련만.

여전히 아무런 감정 없는 표정을 유지한 채 소녀는 거리낌 없이 다시금 장도리를 남자의 입에다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약속된 전개. 네 개째의 생니가 힘차게 날아오른다.

"시아, 어디 있어?"

"크륵, 커흑…"


자비 없는 손속에 입안이 욱신거리지만, 이 정도 고통쯤은 견딜만하다. 남자는  안에 고인 핏물을 소녀의 얼굴에다 뱉었다. 끈적한 액체가 소녀의 고운 콧대에 들러붙었지만, 소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터럭 같은 어둠을 품은, 마치 싱크홀 같은 눈동자가 남자를 조용히 내려다본다. 아무 색채도 없는 검은색이 불투명하게 번들거렸다. 유리알 같은 그 표면 위로 남자는 문득 엉망진창이 된 자신의 모습을 환시했다.


"시아, 어디 있어?"

"너 같으면 말하겠냐, 등신아…!"


이것이 정녕 사람의 눈이란 말인가──일순간 몸이 움찔하지만, 밖으로 드러난 겁을 황급히 감춘다. 비록 몸은 형편없이 묶여있고, 입 안은 걸레짝만도 못한 상태이지만, 남자는 지지 않고 소녀의 검은 눈동자에 맞섰다.

피고용자로서, 고용주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쯤은 알고있다. 이사카 파울 하이드리히, 독일에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그 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독일의 제약업계와 뒷세계의 마약유통망을  잡고 있는 거대 가문. 왕의 권위가 몰락하고 신분제가 폐지된 현대에까지 남아있는 진정한 귀족.

소녀와는 오늘 처음 보는 사이건만, 소녀의 눈동자 안에 동정심은 일말도 없다. 아마 자신은 여기서 죽겠지. 하지만 그뿐이라면 차라리 좋다. 만약 배신해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과연 어떤 일이 생길런지. 그것이 죽음보다  잔혹한 처사라는 건, 너무도 뻔하다.

"뒤져도  안할 테니까…고문 따위…얼마든지 해보라고…시발련아!!"

여전히 소녀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악을 쓰듯이 말을 이어간다. 그에 잠깐이지만 역정이 뒤틀린 듯 꿈틀거리는 소녀의 눈썹. 남자는 괜한 자부심에 취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뭐랄까. 이런 어린 계집한테는 지고 싶지 않다고나 할까. 아아, 이 쯤되면 되려 오기가 솟아난다. 도대체 뭐하는 년인지는 몰라도, 여기서 살아남기만 한다면 곱게 죽여주진 않으마. 그리고 설령 여기서 죽는다 하더라도, 설령 어떤 고문을 받는다 하더라도, 절대로  입을 열진 않으마──







"…회홍, 회홍합니다아(죄송합니다)…하, 할할 테니까(말할 테니까)…헌부우(전부)…할할 헤니가아아(말할 테니까)…"


──라고 장담하기엔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남자는 그렁그렁한 물방울들을 잔뜩 눈꼬리에 매단 소녀를, 시현을 간절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런다고 다 큰 남성이 강아지가 되는 것은 아니건만.

아무튼, 빨리 끝나서 나쁠 건 없지. 지금은 그야말로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 시현은 남자가 부르는 주소를 핸드폰에다 받아 적으면서 이미 손잡이의 나무 부분까지 피로 흠뻑 젖은 장도리를 덤덤히 치켜들었다.

동시에 남자의 동공이 공포로 수축된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혓바닥을 놀리는 남자. 어느 새 이빨이 다 빠져버린 입 안에는 선홍빛 잇몸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함간(잠깐)…할려줘어(살려줘)…이헌 약속하고 다르잔하(이건 약속하고 다르잖아)! 하직  말이 힌자인지도 모르는데(아직  말이 진짜인지도 모르는데)!?"

"이미  말고 다른 녀석한테도 똑같은 방법으로 물어봤거든. 그리고 두 명 모두 똑같은 대답을 했으니, 어지간하면 진실 아니겠어?"

"흐, 흐헌(그런)…"

"그럼, 잘자."

"함(잠)─"


꺼져가는 생명의 위기를 직감한 것이겠지. 그 필사적인 애원 따위 아랑곳 않고 남자의 뒤통수를 장도리로 퍽 소리 나게 후려친다. 그러자 실이 끊긴 꼭두각시 인형처럼 픽하고 앞으로 쓰러지는 남자. 시현은 장도리에 묻은 핏물을 훌훌 털어낸 뒤, 볼일이 끝난 남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남자의 얼굴이 처박힌 데서부터 붉은 융단이 짙게 물들어가지만, 아마도 죽진 않았으리라. 아마도.

시현은 반짝이는 금으로 장식된 문고리를 잡고서 벌컥 열어제꼈다.


"욱…"


그 순간, 화악하고 비강 안으로 짓쳐들어오는 피비린내. 시현은 멈칫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장의 모습을 비출 정도로 매끄럽게 닦인 대리석 바닥, 창문을 가린 짙은 보라색 커튼, 미켈란젤로가 만들어낸 피에타 상의 모조품으로 보이는 조각상, 벽면에 걸린 누군가의 초상화…그 모든 것의 위에 붉은 선혈이 낭자해있다. 예외라고는 하나 없이, 모든 것이 하나 같이 불쾌할 정도로 선명한 붉은색으로 물들어서, 현실감도 마저 상실되는 느낌. 저도 모르게 지옥에라도 떨어졌나 싶어 오른쪽 뺨을 긁적이지만, 다행이다. 아직 촉각은 제대로 남아있다.

장담컨대 살인을 즐기는 취미 같은 건 없다. 자신이 이중인격이라도 되지 않은 이상 이런 싸이코 같은 짓을 저지를 리는 없고…굳이 이런 선문답을 던지지 않아도, 범인이 누구인지는 뻔하다. 시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범인의,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강선아."

"이제야 끝난 거야? 나라면 5분 안에 입을 열게 했을 텐데."

저벅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진다. 피비린내가 더욱  짙어지고, 시현은 살며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살짝 검게 변한 붉은 머리카락, 청순한 디자인의 새하얀 원피스 위에는, 마찬가지로 붉은 색 얼룩꽃이 잔뜩 피어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아의 한손에는 왠 중식도가 들려있었다. 이 역시 피로 물든, 관리를 제법 잘 했는지 날끝에 새파란예기가 감돈다.

"너는 멍청해서 자칫하면 정보를 알아내기도 전에 죽여 버릴 수도 있으니까. 내가 하는 게 나아."

"이년이…평소 같았으면 바로 죽여줬을 텐데."

"주소는 알아냈어. 가자."


그러면서 앞으로 척척 걸어 나가는 시현. 선아는 잠자코 그 뒤를 따랐다.

사실 맘만 같아서는  아담한 뒤통수에 당장이라도 칼을 내다 꽂아버리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흠, 어딘데?"

"안산."

"…거기까진 어떻게 가게. 여긴 서울 한복판이라고?"

"뭘 어떻게 가. 운전해서 가야지. 차도 준비해두라고 했잖아."

"그, 그렇긴 한데…너 진짜 운전할 줄 아는 거 맞아?"

"응."

"그으래…?"


…2종 보통 나이제한이 몇 살이었더라? 한순간 치켜든 의문이 머릿속에서 크게 부풀어 올랐지만, 선아는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응, 설마 저년이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진 않겠지. 그리고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 설마 그 재수 없는 양키년이 그 아이를 납치해갈 줄이야.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물론 선아라고 해서 그런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회만 있었더라면, 진즉에 실행했을 쪽. 하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랴. 내가  아이를 괴롭히는 건 괜찮지만, 다른 년이 그 아이를 괴롭히는 건 역시 못 참겠다.

'…도와줘.'

'???'

그저께 새벽, 평소 얼굴도 맞대지 않던 년에게서 갑자기 연락을 받고 도와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찌나 놀랐었는지. 그 아이의 얼굴을  보게 된지도 벌써 몇 주가 지났건만, 지금도 눈만 감으면 곧잘 떠올릴 수 있다. 흑단 같은 머릿결, 아담한 이마, 오똑한 코, 체리즙을 살짝 머금은 듯한 입술, 건강한 살굿빛 피부, 그리고 사슴처럼 한없이 말간 눈동자. 그렇게 상상이라는 하얀 도화지 위에다  아이의 얼굴을 그려본다. 이미 똑같은 형태 똑같은 색채의 그림들이 주변에 널려있지만, 기어코 다시 한 번 더.

──아, 아아, 하지만 역시 상상만으로는 모자르다. 그저 상상만으로 하복부에서부터 올라오는  정열을 달래기엔, 턱없이 모자르다. 성욕에 미친 남고생도 아니고 천박하긴. 이러다 정말 발정이라도 나는 게 아닐까 싶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

다시 두 눈을 뜬다. 오롯이 인식되는 현실, 피로 물든 복도. 분명 그 아이가 왔다간 곳이건만, 그곳에 그 아이의 모습은 없다. 모습은커녕, 그 아이의 자취조차 없다. 그렇다면 이 허전함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공주님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나.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콧노래,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

도장이라면 이미 몇 번이고 찍어 놨다. 하지만 그래도 부족해. 그녀의 채취를, 그녀의 얼굴을, 그 아이의 몸을, 다시금 이 몸에 새기고 싶다. 게다가 어쩌면, 못  사이에  예뻐졌을 지도 모르는 걸.

아무래도 좋아. 예쁘지 않아도 좋으니까. 고철 찌끄레기처럼 볼품없어졌어도 좋으니까. 그냥, 다시 한 번 더  얼굴이 보고 싶다.

"곧 찾아가도록 할게──시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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