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6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56/73)



〈 56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우욱…우에엑…!"

"그렇게 오버할 것까진 없잖아."

끼이익,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멈춰서는 고물 세단. 브레이크 페달을 밟자마자차문을 열고 구르듯이 나가떨어지는 선아를 시현은 한심한 쳐다보며 타이어 자국이 남은 땅바닥 위에 우아하게 발을 내딛었다.

"샹년아! 운전할 줄 안다며! 면허를 이니셜D로 땄냐!"

"할 줄은 알아. 다만, 해본 적이 없을 뿐."

"이 ㅆ…우욱…"

머라 더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다가도 속에서부터 역류하는 위액에 입을 꾹 다문다. 어느 샌가 스머프처럼 새파란 얼굴이 되어버린 선아가 시현을 노려보았지만, 시현은 눈길도 주지 않으며 트렁크를 열어제꼈다.

무언가 삐걱대는 듯한 불쾌한 소음과 함께 트렁크 문이 들춰지고, 그 안에 수북이 쌓인 철더미들이 드러난다. 매끈한 강철 표면에 반사된 햇빛이 큐티클 같은 질감을연출해낸다.


"별걸 다 모으고 사는구나."


텁텁한 트렁크 안에서 은빛 자태를 뽐내는 각종 무기들의 눈부신 향연에 살짝 눈살을 구겼다가 뜬 시현이 중얼거렸다. 현대적인 군용 나이프부터 시작해서 일본도, 손도끼, 레이피어, 워해머까지……여고생의 취미라기엔 이상하지만, 연쇄살인마의 취미라면 그럭저럭 아귀가 들어맞는 느낌. 그래도 회칼은 왜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이 근접해서 사용하는 종류의 냉병기지만, 화기류도 일부나마 보인다.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시현은 그중 그나마 쓸만 보이는 엽총 한 자루를 주어 들었다. 나무 특유의 매끄러운 촉감이 부드럽게 손바닥에 엉겨왔다. 사냥용으로 제조된 것이라 그런지 제법 무게가 가볍다.

대체 어떻게 공수해온 것인지 모를 돌격소총도 한구석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지만, 저런 건 아직도 핼쑥한 얼굴로 윽윽거리는 저 무식한 멧돼지녀나 쓰라지. 추가로 경찰들이 쓸법한 리볼버  자루와 탄창들을 챙긴 시현은 주머니에 처박혀 있던 쌍망경을 눈가에 가져다댔다.

차를 댄 곳은 목적지와 조금떨어진 장소. 흔히 볼  있는 시골 풍경의 한가운데, 푸르게 우거진 녹음 사이로 세워진 물류창고의 인공적인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 주변을 순찰하는 검은 정장의 외국인들. 눈에 띠는 무기는 보이지 않으나, 아마 권총 정도는 기본으로 장비하고 있겠지. 시현은 아무 말 없이 장전해놓은 권총들을 홀스터에 쑤셔 넣었다. 허벅지를 조이는 가죽의 감촉에 한층 울렁이는 감정선. 고개를 슬쩍 돌리면 어느 새 챙길 거 다 챙기고 옆에 와있는 강선아가.


"나는 정문, 너는 후문. 뭐…조심해."

"흥, 자기 몸이나 걱정하지 그래?"

입으로는 안부를 걱정하면서도 맘만 같아서는 돌입 도중 죽어버렸으면 싶다. 혼자서는 여동생을 구해낼 자신이 없었기에 불렀긴 하지만, 여전히 거슬리는 인간. 그러나 소망대로 쉬이 죽을 인간이었다면 진작 몇 번은 죽고도 남았겠지.

입을 삐죽 내미는 선아. 무심하게고개를 돌린 시현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재빠르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


"엇, 벌써 다녀왔어?"

아늑한 탕비실. 검은 정장을 입고, 등허리까지 닿는  머리를 깔끔하게 하나로 묶은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딘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인상이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그녀는,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맥주캔을 탁자 위에다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덜 깬 얼굴로 소파에서 떨어져 슬금슬금 허리를 추켜세우는 여자의 선배. 여자와 같이 이 업계에  안 되는 여성인 그 여자는, 한쪽 눈을 가린 안대와 대충 풀어헤쳐놓은 밀빛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선배…아무리 그래도 근무 중에 맥주라니…"

"뭐 어때. 이런 촌구석까지 누가 찾아온다고."


윗단추 두개를 풀어 제낀 와이셔츠, 다림질을 까먹은 듯 주름  마이에, 발끝이 헤진 구두. 같은 정장이긴 하지만, 깔끔하게 다려진 여자의 정장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목울대를 꿀렁이며 상쾌한 얼굴로 맥주를 마시는 자신의 선배를 여자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이거 사진이라도 찍어서 위에다 올리면 100퍼센트로 감봉 확정 아닐까.

"아서라. 찌르면 너만 혼날 거다."

"…어차피 찌를 생각도 없었다구요."


애초에 남을 고자질할 만큼 간이 크지 못한 걸요. 힘없이 덧붙인 여자는 방바닥이 푹 꺼질 듯한 한숨과 함께 맞은편의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순간이었다.


-우우웅

"…뭐야, 이건."

"침입자인가!?"


평화롭던 탕비실 내부를 돌연 감싸 안는 요란한 경보음.  많은 토끼처럼 빳빳하게 굳어버린 여자를 냅두고 그녀의 선배가 총을 뽑아들면서 문 쪽으로 향한다.

살며시 문짝에 귀를 갖다 대자 탕탕거리는소리가 잇달아 울려 퍼진다. 굳이 확인할 것도 없는 총성. 그녀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문짝을 밀고, 그 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

메아리가 되지 못한 탄식이 무심결에 흘러나온다. 이건 꿈인 걸까. 얼간이처럼 느릿하게 눈을 깜빡여보지만, 그러나 눈앞의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보디가드 인생 7년,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는 경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특수경찰로서 이탈리아에 근무하던 시절에 마피아와의 총격전은 일상이나 다름없었고, 그 지옥 같은 전장을 어떻게든 살아 헤쳐 나왔다. 지옥 같던 그 시간들까지 포함하면 가히 웬만한 산전수전은 다 겪어봤다고 해도 무방하겠지.

나라면 마피아건 마리오건 뭐건 때려잡을 수 있다며, 정의감과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결국 한쪽 눈을 잃은 비참한 몰골로 퇴직하고야 말았지. 그리고 그 결과,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거치며 무기 산업이 극도로 발달된 현대──절대적으로 강한 인간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맹렬하게 바람을 가르며 쏘아지는 탄환의 앞에서는 누구나가 평등하니까. 아무리 우람한 근육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뛰어난 스피드를 가지고 있어도, 이 지구상에 탄환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은 없으니까. 그런데도 살아남을 수가 있다면, 그건 운과 약간의 지식 덕분.

문득 오른쪽 눈가가 시큰거린다. 옛적에 떨쳐냈다고 생각했던 환각통. 몸으로 직접 깨달은 교훈.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었는데──지금 눈앞의 '비현실'은 대체 뭘까.


"시발! 이년 뭐야!"

"제길,  안 맞는 거야!"

컨테이너와 컨테이너의 사이를 작은 그림자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작고 검은 그림자가 바람처럼 뛰어다닌다.탄환의 세례를 스치는 검은 머리칼, 불꽃이 사방에 튀기는 와중에도 절대 한번을 감기지 않는 검은 눈동자. 그림자의 정체는 너무도, 너무도, 너무나도 어린 소녀였다.

유아퇴행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나볼 법한 광경에 경악하는 것도 잠시, 고개를 틀어 총알을 피하는 소녀의 모습에 놀라움은 더해진다. 이미 총구를 떠난 탄환보다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인가──아니, 그저 총구의 방향을 보고 그 궤적을 예측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뭐가 됐건, 일반적인 인간에게 범주를 아득하게 넘어섰다는 것은 매한가지. 냉철한 판단력과 제로에 가까운 반응 속도가 조화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위업. 그것은 예컨대, 달인의 경지라 할만하다.

그렇다면 저 어린 나이에, 그와 같은 경지에 올랐다는 것인가. 감히 비길 자가 없는 재능이다. 단순히 재능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의, 악마적인 소양. 눈앞에 들이밀어진 총구에도 담담함을 유지할  있는 그녀조차 무심코 군내 나는 타액을 꿀꺽 삼키고만다.


"침입자, 침입자다!"

"빨리 오라고, 젠장!"


이내 소란을 눈치 챈 경호원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소녀의 앞에도, 소녀의 옆에도, 그리고 소녀의 뒤에도. 완벽한 포위진.아무리 저것이 인간 이상의 괴물이라 한들 사각에서 발사된 총알마저 피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단 한 번의 발구름만으로 소녀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소녀가 발 디딘 곳에서부터 뭉게뭉게 퍼져 나오는 안개더미.

마치 아이돌의 무대 연출 같다, 라는 한가한 감상이 뇌리를 잠식할 무렵, 굶주린 야수의 포효와도 같은 총성이 잇달아 울려 퍼졌다.


"으아악!"

"야 괜찮─아악!"

총성, 비명, 총성, 비명. 오직 단 두 종류만의 소리만이 울려 퍼짐을 용납 받는다. 연주자는 이곳에 몸을 바친 무고한 쓰레기들, 지휘자는 소녀  한명.

소녀가 정말 괴물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자욱한 연기 속을 꿰뚫어보는 시력 같은 건 없겠지.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연기가 퍼지기 직전 경호원들의 위치를 일일이 기억하는 것밖에 없다.  전부를,  단시간 안에.


"아와, 아와와와…서, 선배…어, 어떻게 해요 우리…!"

"…"

그야말로 압도적인 유린. 어른과 아이처럼 대결조차 되지 못하는, 일방적 학살. 창백한 얼굴로 허둥지둥하는 후배를 의식에서 냉정하게 컷하고, 잠자코 머리를 굴린다. 기습, 저격, 돌격, 떠오르는 건 총알밭 속에서 갈고 닦은 선택지들. 그럼 과연 이길 수 있을까──이 내가?

다행스럽게도 해답은 빠르게 도출되었다. 그녀는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잠그고, 그것도 모자라 튼튼해 보이는 원목 의자를 가져와 문고리와 바닥 사이에 끼워 넣었다.

"선배…?"

"…째자!"

'기껏 1층의 현장지휘를 맡겨준 이사카 아가씨한테는 미안하지만…무리라고, 저런 거.'

비겁하다고 해도 좋다. 허나 약간의 돈 따위에 목숨을 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단지 속으로만 남기는 의미 없는 사죄. 그녀는 천장에 달린 환풍구 창살을 억지로 잡아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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