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시발!"
"…"
한껏 겁에 질린 얼굴, 천박한 욕지거리와 함께 짓쳐드는 칼날을 칼날로 쳐낸다. 동시에 불쑥 올라가는 상대의 왼발, 반대편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박아 고정시키고, 그대로 주춤한 상대의 복부를 걷어찬다.
어디 한군데 부러진 목각인형처럼 나가떨어지는 상대, 경련하는 몸. 매섭게 손을 놀려 그 반들반들한 이마에 군용 단검을 휙 내던진다.
10 of 10. 표적의 정중앙에 꽂히는 다트. 사방으로 솟구치는 피. 전위적이기까지 한데, 같이 감상에 젖을 이 하나 없는 외로운 시간.
달짝지근한 정오의 티타임이 필요해. 얼그레이 티의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평화로운 담소가, 상상만으로도 메마른 마음에 봄비를 내린다. 하지만 현실에 있는 것은 잠깐의 여유조차 주지 않고 쏘아지는 총탄의 세례.
선아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젠장, 어디로 갔지!?"
몇 발의 총탄이 허망하게 허공을 가른다. 경호원인 남자는 돌격소총의 손잡이를 꽉 틀어쥐며 서둘러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나 마법이라도 부린 듯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소녀. 그 자취조차 쫓을 수가 없다.
불과 수 초전까지만 해도 총성과 비명으로 가득하던 공간에 소름 끼치는 정적이 도래한다. 자신의 존재감을 고하는 것은 오직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뿐. 마른 타액을 꿀꺽 삼킨다. 어쩌면 도망쳤을 지도 몰라, 다가오는 사자 앞에 극도의 스트레스가 몰린 임팔라처럼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한다. 이미 자신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여기야."
"!"
그때 새벽녘의 안개를 뚫는 여명처럼 나즈막히 들려오는 가녀린 목소리. 옆인가? 뒤인가? 황급히 고개가 뒤로 꺾이지만, 그렇기에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죽음의 손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커─"
환풍구 창살은 어느 새 갈아 치워버린 건지. 위에서부터 쑥하고 내려온 하얀 두 손이 남자의 목울대를 잡고 비튼다. 미처 새된 비명이 새어나오기도 전에 남자의 목이 180도로 꺾였다.
이렇게 되면 정면은 얼굴이 바라보는 쪽일까. 아니면 젖꼭지가 바라보는 쪽일까. 아무튼 목이 꺾인 시체가 풀썩 스러진다. 선아 또한 환풍구 위에서 뛰어내리며 시체의 배를 사뿐히 즈려밟았다.
그러기가 무섭게 잇달아 울려 퍼지는 총성. 급하게 몸을 숙이면서 상대의 손을 향해 칼을 내던진다. 으악하는 비명과 함께 툭 떨어지는 권총 한 자루. 선아는 천천히 그것을 주워들었다. 차마 전부 피해내지는 못한 듯 아래로 내린 팔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괴, 괴물…"
"뭐라고 해야 될지. 너무 뻔한 감상이라 나도 할 말이 없네."
커널 샌더스라던가, 로날드 맥도날드라던가. 나는 좀 더 신박한 평가를 원해. 전혀 아쉽지 않은 얼굴로 아쉽다는 말을 중얼거린다. 상대의 머리통에 총구를 겨누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그 멍청한 금발년이랑 달리 기초적인 사격방법 정도는 숙지해두고 있는지라, 가볍게 펑하고 터져나가는 머리통.
데구르르 굴러 나온 눈알이 발치에 와닿는다. 그만 얼굴에까지 튀고 만 핏물을 손등으로 스윽 닦아낸다. 대충 소맷자락에 닦아내려다, 슬쩍 핥아본다. 메마른 입 속을 풍요롭게 적시는 철분.
"아직 따뜻하네…"
맘만 같아서는 좀 더 즐기고 싶은데, 배를 갈라 흘러나온 내장더미에 꿀단지를 발견한 곰돌이 푸우처럼 얼굴을 파묻고 싶은데, 시간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공과 사는 지키는 살인마니까. 악마조차도 시간 약속은 중히 여기는 법이다. 종례를 질질 끄는 선생은 뒤에서 시발 소리를 듣기에 딱 좋다. 천천히 걸음을 뗀다. 천천히, 천천히, 이내 다급해지는 발걸음, 아니 뜀박질.
도중 바닥에 널부러진 손 하나가 뿌직하고 밟힌다. 끈적거리는 피가 신발 밑창을 붉게 염색한다. 이곳저곳에 즐비한 시체들이 눈을 띤다. 누구는 총으로 깔끔하게, 누구는 칼로 지저분하게 난도질되어 있다. 칠칠맞게도 새파란 내장을 입으로 토해내는 녀석도 있다. 대체 어떻게 죽었길래?
그러고 보니 저건 어떻게 죽였더라? 난 지금 버섯으로 가득 찬 숲을 거닐고 있는 건가. 그래, 인간은 없다. 그렇다면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겠지. 마법이 여린 소녀의 몸을 두둥실. 대체 마리오는 몇 번이나 굼바의 머리통을 짓뭉개봤을까.
애초에 인간이란 뭐지? '나'란 건 뭐지? 우리는 흔히들 얼굴 생김새로 사람을 구분한다. 허나 못생긴 사람도, 잘생긴 사람도, 예쁜 사람도, 살가죽을 벗기면 모두가 똑같이 생겼는걸. 그리고 그런 사람은 아름답다. 야채는 싫어하지만 버섯은 맛있다.
후에에엥. 하지만 야채는 싫어.
=
약했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보라──혹자는 몸싸움에 져 엉망이 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혹자는 다수의 힘 앞에 비참히 굴복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혹자는 무례한 상사의 억지스러운 일갈에 찍 소리도 못 내뱉은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혹자는 돈 앞에 비굴해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은 제각기 다르지만, 그러나 자신의 약함을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 같은 건 없다. 당연한 전제이건만──그것은 남자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진리였다.
'괴물놈…!'
익숙한 한 마디.
평생을 갈고 닦은 일신의 무력도, 다수의 힘도, 인간의 힘을 아득히 뛰어넘은 맹수도, 모두 꽉 틀어쥔 이 주먹 앞에 굴복했다.
돈도, 여자도, 명예도, 모두 이 주먹으로 거머쥐었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쳐본다──이 안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 이 무식할 정도로 일차원적인 강함. 지극히 단순한 완력. 그 이외의 무엇이 더 이상 필요하단 말인가?
약함을 알기에 남자는 강했고, 너무 강했다. 단지 그뿐인 이야기.
"…오는가."
전쟁터에서나 맡을 법한 죽음의 향기가 비강에 아른거린다. 짙은 농도, 어느덧 총성은 그치고 고요만이 어둠을 포근하게 끌어안고 있다. 그에 따라 격해지는 심장의 고동. 두려운가? 아니, 이건 흥분의 떨림이다. 언제나 풀이 죽어있던 성기가 발딱 설 정도의 흥분. 시종일관 생기 없던 무표정에 웃음기가 감돈다. 마약중독자처럼 비실거리는양쪽 입꼬리.
가벼운 자물쇠조차 채워지지 않은 제 등 뒤의 문조차, 제 주인을 수호하는 의무조차 까먹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투쟁이란 늘상 즐거운 법이 아니한가. 서로가 서로의 살을 유린한다. 무구한 단련, 수십년간 쌓아온 그 업을 송두리째 짓밟는다. 이 고고한 행위야말로 지고의 쾌락. 그렇다면, 풀장에 뛰어드는 아이와 같이 그저 가뿐히 몸을 맡기리라.
고리타분한 명상은 이쯤이면 됐다. 남자, 흑곰은 가부좌를 풀고. 알래스카의 불곰처럼 거대한 몸을 일으키며 준동할 준비를 한다. 이윽고 위로 이어지는 계단 저 편에서부터 철벅거리며 울려 퍼지는 발소리.
붉은 머리칼이, 피에 젖어 더더욱 붉어진 그 머리카락이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사뿐히 흔들린다.
"봐주진 않겠다."
"…"
비록 저번에는 압도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녀의 절대적인 자만에서 우러나온 일. 그렇다고 한들 딱히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서로가 온전히 전력을 다한다면 그처럼 쉽게는 끝나지 않으리라.
이윽고 계단을 다 내려오자, 붉게 보이는 두 눈이 지긋이 남자를 응시한다.
그 붉은 눈, 아아, 피에 젖은 갈색 눈이 자신을 노려본다.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짐승처럼 헥헥대면서, 끝까지 자신을 노려보던 눈. 남자는 무심코 그 눈동자에서 자신의 죽음을 환시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비록 미약한 감정이라 할지 언정, 그것의 이름이 뒤바뀌지는 않는다.
딱히 죽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격렬한 싸움 끝에 죽는다고 한다면,그 얼마나 멋진 죽음일지. 상상만으로도 황홀경에 빠질 지경이다!
남자는 왼발을 앞으로 내딛는다──그 순간 거대한 충격이 그의 거대한 몸을 후려갈겼다.
-타앙!
"커, 헉…"
"이제 왔냐? 나보다 늦었네."
"흥, 단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것뿐이야."
총성은 단 두 번이었건만, 전신의 곳곳에서 핏물이 줄줄 샌다. 산탄인가. 한순간 기우뚱할 뻔한 몸에 힘을 주며 버티지만, 여유를 두지 않고 다시 한 번 더 울려 퍼지는 총성.
우람한 암석과 같던 그 신체도, 이번에는 버티지 못했다.
"산탄을 피하는 방법…은, 미처 수련하지 못했군."
"야, 재 뭐라는 거냐?"
"나도 몰라."
"좋은 기회였어. 이건, 다음에 활용할 수…"
그런 말이나 내뱉으면서, 남자의 거구가 천천히앞으로 쓰러진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를 내린 시현과 선아는 멍하니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병신…"
문득 선아가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