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8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58/73)



〈 58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빌어먹을, 알게 뭐람."

금방이라도 찌를 듯한 심정으로 칼을 쳐들었지만, 막상 팔을 들자 고개를 내미는 것은 소심함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 따라서 부들부들 떨리는 칼날.

병신. 내뱉은 욕지거리가 스스로에게 향한다.  상처를 입힐 생각일랑 애초부터 없었다. 그래도 사소한 화풀이 정도는 하고 싶었는데, 기껏 높이 쳐든 두 손은 그저 애처롭게 떨리기만 한다. 약을 너무 많이 먹었나. 그야 먹긴 했지만, 아직은 멀쩡할 텐데.


"이자나…"

사슴 같은 두 눈동자가 애절함마저 띠고서 저를 올려다본다. 정작 간절한건 나인데,  네가 그런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거야. 널 죽이고 싶어. 그런데 너를 죽이고 싶진 않아. 뭐라 지껄이는 거야.

정리해두었던 마음이 다시금 요동친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묶인 몸을 마음대로 껴안고 싶다. 상스러운 애무일랑 필요 없으니, 그냥 한번 껴안아보고 싶다. 동성 사이에 강간죄는 성립하지 않으니, 떠올리기 무섭게 살짝 말려 올라간 치맛단을 보자마자 또 짓쳐드는 마라의 화신. 이 상황과는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난 세울 막대기가 없잖아.

고장난 트렉터처럼 경련하는 심장 언저리. 가운데가 하나 빠져버린 돌다리를 다시 채운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던가? 가문의 이단아, 약쟁이, 모질다는 소리를 들을지 언정 이리도 순박하지는 않았을 지언데,병신. 이번에는 한국어가 아닌 모국어로.

문득 꿈이 다 이뤄질 것만 같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어둔 방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며 유치한 대중음악의 곡조를 노래하던 시절이. 무덤덤한 색채들 사이에서 자극을 찾아 열심히 해매이던 나날들.

부귀영화쯤은 이미 손 안에 거머쥐고 있었지만, 영화 같은 삶을 바랬다. 동화 같은 운명적 사랑을 바랐다. 그냥, 그냥, 망상에 잠길 때라면 너무 조숙해진 나라도 한창 때의 소녀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건 나의 약빨 어린 발라드. 홀로 노래하는 아리아. 그리 포장하기는 쉽지만 그래봤자 호구찐따의 외딴 부르짖음. 이젠 사람이란 게 싫어질 지경이야. 사랑은 늘 지긋지긋하고, 후회는 언제나 늦다. 따뜻함 사이에 개처럼 고개를 파묻고 응애거리고 싶다.

"아"

딱 5초간 멍하니 쳐다보다, 들고 있던 칼을 내렸다.

메마른 목가를 넘어 말라비틀어진 목소리가 슬금슬금 흘러나왔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가는 목덜미를 움켜쥐듯이 어루만진다. 이윽고 아래로 내려가 맨 위의 단추를잡아 뜯자 드러나는 흰색의 속옷. 깊은 골에 고개를 들이박고 코로 숨을 흠뻑 들이마신다. 향긋한 내음을 개처럼 킁킁.


"제가 그 거치적거리는 년 치워준  기억나요? 솔직히  들고 달려들었을 때는 저도 조금 쫄았는데."

"…미안."

"놀이동산도 데려다 줬잖아요. 반 강제긴 했지만, 당신 기분 풀어줄려고."

"…미안해."

"영화 보고 싶대서 영화관도 데려다 줬는데, 새벽에 질질끌려 다니면서, 표값도  내가 내고."

"…미안해."

"당신이 갑자기 독일로 떠나고 싶다고 해서, 비행기 티켓도 예약해놨어요. 이젠 쓸모없어졌지만요…티켓값, 많이 들었는데."

"…미안해."

"처녀도, 처녀도.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하고 한 게 처음이라구요?"

"……미안해."


그저 앵무새처럼 서로가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렇게라도 어우러진다면 좋을 텐데, 갈 곳을 잃은 손이 그녀의치맛자락을 슬며시 걷어 올린다. 가랑이 안쪽의 부드러운 살을 간지럽히고, 슬금슬금 그 위로 기어 올라간다.

민감한 부위를 다듬지 않은 손톱 끝으로 찌른다. 차게 식은 손의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몸. 활의 현을 튕기듯이 움찔거리는 허리를 한 손으로 으스러져라 끌어안는다.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서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제 와서 이런 짓거리를 하려니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무척이나 예쁜 모습.

"…가지 마요. 저랑 같이 있어주세요. 영원히."

"안 가.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함께 있어줄게. 하지만─"

"안 돼. 그 이상 말하면 진짜 죽여버릴 거에요."


고장  엘레베이터처럼 덜컹하고 내려앉는 심장.  뒤에 이어질 말이 소름 끼치도록 예상되서, 이자나는 황급히 언성을 높였다. 어느 새 눈물로 얼룩진 얼굴, 울먹거리는 목소리. 허세 가득한 으름장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그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이자나는 아이처럼 두 귀를 틀어막았다. 아니, 그녀는 실제로 아이였다.

"그 이상,  이상 말하면 진짜 죽여버릴 거니까…"

"…이미 알고 있잖아. 내가 사랑하는 건 너가 아니야."

"이─"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뻗친 손이 가느다란 목을 움켜쥔다. 그렇게 꽉 잡고서, 금방이라도 비틀어버릴 듯 앙상한 손등 위로핏줄이 돋아났지만, 목을 졸리고 있는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야 전혀 힘을 주지 않았으니까.

분명 꽉 쥐었다 생각했는데, 힘없이 스르르 풀리는 손아귀. 불투명해진 시야는제 눈앞의 여자조차 제대로 인식하질 못한다. 그 사이 흘러나온 콧물을 슬쩍 닦고.

"왜…왜 내가 아닌데요…나는, 나는, 당신이 원하는 건 다 갖다 바쳤는데, 당신이 원한다면,  갖다 바칠 수도 있는데…"

"미안해, 정말로."

"왜…"

맘만 같아서는 마구 상처 입히고 싶다. 저를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눈을, 같잖은 동정의 말을 쏟아내는 저 입을. 그런데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 상처 입히고 싶은데 상처를 입히고 싶지가 않네요. 모순적이기만 한데, 이래서 사랑이라 써놓고 지랄이라 읽는 걸까요. 개 같네요, 정말.

메아리가 되지 못한 끝맺음이 산산조각 박살난다. 허망한 얼굴로 그 조각들을 그러모으고 있으려니, 괜시레 그녀의 얼굴이 또 한 번 보고 싶어진다.

나처럼 그녀도 엉엉 울었으면 좋겠다.  10분의 1만이라도 좋으니 아팠으면. 다소 찌질한 구상. 당신의 심장을 파헤치고 그 위에 입맞춤하고 싶어. 다소 잔혹한 구상. 악당이 되기는 싫은데, 악당이라도 되고 싶다. 그래도 끝내 악당은 될 없는 머저리.

"비참하게 울어줘요. 날 위해."

"…미안, 눈물이 안 나와."

"그 미안하다는 소리도 이제 그만하구요."

"미안…아"

"바보."

또 한심한 소리나 하려는 것이겠지. 멋없게 무언가를 덧붙이려는 그녀의 입술을 재빨리 제 입술로 틀어막는다. 저항 없는 꽃봉오리를 살며시 열고  안에 촉수 같은 혀를 집어넣는다.

그녀의 타액이 메마른 혓바닥을 적신다. 달아오르는 몸과 반대로 차갑게 식어가는 머리. 키스 따위야 이미 몇 번이고 해봤는데, 더한 것도 해봤는데, 지금 이 순간에는 조금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우연찮게 찍힌 차창 밖의 풍경처럼.

좀 더 당신을 느끼고 싶어.  더 당신과끌어안고 있고 싶어. 그런데 눈치 없는 시간이 매정한 알람을 울린다. 입맞춤이 길어지자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그녀. 그와 동시에 영원만 같던 잠깐은, 순식간에 끝이 나고 말았다.

슬며시 입술을 떼자, 길게 늘어지는 타액의 실. 이자나는 시아를 보았다.

"아핫, 이제야 우네."

"우으…"

병신 마냥 거울 앞에서 혼자 노력했던  마냥 쓸모없던 것은 아니었는지, 시아의 눈초리 끝에 살짝 매인 눈물방울에 이자나는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점점 일그러지는 그 미소. 웃는 듯, 혹은 우는 듯, 평소 같았으면 절대로 안 내비쳤을 기괴한 표정.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감정들이 제멋대로 날뛰어대고, 직감적으로 느낀다. 이것이 마지막 입맞춤이라는 것을. 그리고 뭐가 됐건  마지막을 추하디 추한 모습으로 장식하고 싶진 않다. 이자나는 고개를 떨구며 시아의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을 칼로 끊었다.

"…이제 다시는 안 도와줄 거야."


깊게 드리운 음영이 언제나 화사하게 빛나던  얼굴을 가린다. 잠시 머뭇거리던 시아는, 손을 뻗어 이자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손끝에 와닿는 축축한 습기.


"그래도 난, 아직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 이자나."

"그거  위안되는 말이네요."

퍽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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