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환상은 어저께 밤중녘에
반쯤 뜯어나간 단추를 아래서부터 채우고, 발목에 걸린 치맛단을 다시 끌어올린다. 반라의 몸에 점점 줄어들어가는 하얀 살결의 부분. 옷 입은 소리만이 사각사각 묘한 상쾌함과 함께 울려 퍼진다.
스크린 너머의 관객이라도 된 듯이, 이자나는 아무런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고름 같은 시름이 그녀의 머릿속을 잠식하고, 별빛 같은 백지로 무표정하게 수놓았다. 지금이라도 손을 뻗으면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고작 실날만큼 남은 이성이 시든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래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다고.
"이자나?"
그래도 제 주제를 모르는 욕망은 슬금슬금 차오르고, 그때 들려오는 천진난만한 목소리. 긴 한숨과 함께 이자나는 저도 주섬주섬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이 꼬라지만 보면 정사 몇 번은 거하게 오간 것 같은데, 실제로 이루어진 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자위행위일 뿐.
"가요. 경호원들한텐 말해놓을 테니까."
"…같이 가지 않는 거야?"
"왜, 제 염장이라도 지르시게요? 아, 차는 준비해놓으라고 할게요."
애써 매섭게 가꾼 말들을 툭툭 내뱉는다. 그래도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시아는 멋쩍은 웃음만을 지었다.
"당신도 참 속 편하네요…"
그 희미한 미소에 이자나는 또 다시 울렁거릴 뻔한 심장을 간신히 틀어쥐고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아무리 뭐라 해도 자신을 납치한 사람 앞에서 너무 무른 모습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 살인광 싸이코 레즈년 앞에서도 제법 물렀었지. 도촬범 언니도 의외로 간단히 용서해주었고. 이 쯤 되면 물러터진 게 그냥 천성 같기도.
작은 탁자 위에 놓인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 라이터를 켠다. 동그란 물방울 모양으로 치솟는 작은 불길. 꼬나문 담배 끝을 슬며시 갖다 댄 뒤, 이자나는 근처에 널부러진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지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두 눈을 감는다. 이윽고 매캐한 연기를 깊게 흡입.
"가라니까요, 얼른."
"…그럼, 다음에 보자."
다음에 보자. 다음에 보자라니, 이 얼마나 잔혹한 말인가. 기약 없는 희망 따위 절망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왜 날 납치했냐고 욕이라도 해주었으면, 여지라도 남겨주지 않으면, 구질구질한 미련이나마 가지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만 겨우 작별 인사 하나에 벌떡 일어나서 붙잡을 정도로 멋없는 여자는, 애새끼는 아니다. 그냥 허무할 따름. 비참한 몰골로 간신히 붙잡은 자존심의 끝자락이라고 해도 좋다.
등을 돌리고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하는 시아. 이자나는 소리 없이 낄낄 웃으며 폐부 안에 가득 머금고 있던 연기를 내뱉었다.
그 순간 벌컥하고 열리는 문. 그러나 안에서부터가 아닌 밖에서부터 열린 문에 시아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흐응, 여기 있었구나."
"강선아…!"
한동안 보지 못했던 고양이상이 샐쭉한 미소를 머금는다. 색채감이 강한 붉은 머리칼은 어느 때보다 한층 더 붉었고, 백합처럼 하얬던 원피스에도 역시 불쾌하리만치 붉은 꽃이 한가득 피어있었다.
익숙한데,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에 시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시아야!"
"어, 언니!?"
네가 여기엔 왜 왔냐고, 뭐라도 쏘아붙이려는 순간 다람쥐 마냥 쏜살같이 달려드는 작은 몸. 시아는 제 몸의 이곳저곳을 더듬는 시현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난데없는 등장에 머리가 굳어버리고, 이어서 그녀의 몸 곳곳에 알록달록 새겨진 핏자국을 보자 하얗게 표백되었다.
"몸은 괜찮지? 어디 다친 데 없지?"
"언니야말로 괜찮은 거야?"
"응, 난 괜찮아. 조금 다치긴 했지만."
"그럼 안 괜찮은 거잖아!"
경호원들은 어떻게──턱 끝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시아는 도로 삼켰다. 물어보기도 무서울 뿐더러, 시현의 몰골을 보면 뻔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얌전하게 총집에 꽂혀 있는 샷건 한 자루가 사정을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가녀린 소녀의 허리춤에 더블 배럴 샷건. 타란티노 같은 변태나 좋아할 법한, 지극히 부조화스러운 광경.
자신을 위해서 물불 안 가리고 달려와 준 점 하나는 고맙지만, 그를 위해서 사람을 죽였다고 하면 역시 심정이 복잡해진다.
"어머, 기꺼이 픽업 서비스를 준비하려 했는데, 변변찮은 방식으로 거절하다니."
"시끄러워, 샹년아."
부외자의 침입에도 느긋하게 담배를 피고 있던 이자나가 입을 열었다. 사이좋게 부둥켜안은 둘을 째려보는 것도 잠시, 선아는 의자에 앉은 채 꼼짝도 않는 이자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한 손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피 묻은 중식도가 들려있었다.
이자나 또한 탁자 위에 놓인 권총을 집어 들었지만, 그것이 맞을 리가 없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도 이자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퀼리브리엄이 아니라 에너미앳더게이트를 볼 걸, 젠장."
"뭐라는 거야."
이자나는 순순히 총구를 내렸다. 저항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굳이 힘써서 저항하고 싶지도 않다. 애당초 그럴만한 기력도 다 빨린 채, 기어를 억지로 당겨보지만 축 늘어진 몸에 힘은 돌아오지 않는다.
딱히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구태여 살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죽어버리는 편이 한결 편할 지도.
"너…뭐하는 거야?"
"뭐하냐니, 뻔하잖아. 얼른 거기서 비켜."
"싫어."
"너…"
물론 그 광경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을 시아가 아니었다. 사이가 안 좋았을적의 이자나조차 몸 바쳐 구해준 그녀였으니까. 재빨리 이자나의 앞을 가로막는 등. 등허리를 덮으며 길게 흘러내리는 풍성한 머리카락이 꼭 검은 폭포수 같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촌극을이자나는 무심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시시하다고 여기면서도 어김없이두근거리는 이 심장은 대체 뭐라 정의해야 할까. 마치 제것이 아닌 냥, 쿵쾅쿵쾅.
"시아야, 엄밀히 말하면 저건 널 납치한 범죄자야."
"그래도…상관없잖아. 실제로 아무 일도 안 일어났고, 결국엔 날 풀어줬으니까."
"시아야."
"…이자나는 내 첫 친구야 언니. 아무리 언니라도 다치게 하는 건, 용서 못해."
보다 못한 시현이 한 마디 거들었지만 시아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은 뒤, 여전히 눕다시피 앉아있는 이자나의 손을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어, 어딜 만지는 거에요!"
"따라와. 가자."
"하아? 싫거든요!"
"그냥 따라오라면 따라와…언니도."
방문 밖으로 이자나를 질질 이끄는 시아. 원숭이처럼 시끄럽게 악악대는 이자나였지만, 막상 붙잡은 손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잠시 그 자리에서 서성이던 시현은 한숨 쉬며 둘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잠깐, 거기 정지."
싸늘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볼가 옆을 매섭게 스치고 지나가는 칼날. 조금만 옆에 있었어도 얼굴에 꽂힐 뻔했지만, 시아는 덤덤하게 선아를 돌아보았다. 겉보기에는 마냥 해사한 웃음을 품은 소녀의얼굴 아래, 추악하게 일그러진 누군가의 모습이 슬쩍 엿보였다.
"나만 쏙 빼놓고 어딜 가려는 거야…? 게다가 첫 친구? 우리 둘의 관계는, 분명 친구가 아니었던 걸까?"
"글쎄. 난 너 같은 친구를 사귄 기억은 없는데."
"…그날의 거래는 잊은 거야?"
"거래?"
순진하게 반문하는 모습. 웃음기가 더욱 짙어져간다. 선아는 묘기라도 부리듯 다시 뽑은 칼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설마, 기억 안 난다고는 하지 않겠지."
"…"
'앞으로는 사람을 죽이지 않을게. 그 대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서로가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거야.'
아아, 잊을 리가 없다. 그 황홀한 기억. 옅은 새벽의 안개가 감싸 안았던, 아무도없는 교실에서 단 둘이 나눴던 담소.
겁에 잔뜩 질려있던 그 얼굴이 떠오른다. 핏기 없이 시체처럼 창백했던 그 얼굴이 떠오른다. 제 손 안에 꽉 틀어쥔 가녀린 손목과, 립스틱이라도 바른 듯 붉디붉은 그녀의 입술.
잊을 리가 없잖은가. 아니, 잊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 이시아. 떠올리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세 글자.
분노에서 우러나온 미소가 안락으로 뒤바뀐다. 선아는 여유롭게 발걸음을 떼었다. 비록 운명의 짓궂은 장난으로 잠시 떨어지긴 했지만, 결국 너는 나에게 돌아올──
"…그러니까 네가 싫다는 거야."
"─응?"
"알아서 해. 뭐가 됐건, 이제 너 따위한테는 신경 안 쓸 테니까."
"그게 무슨…"
문장에 미처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쿵하고 닫히는 문. 어색하게 웃는 표정 그대로 망부석처럼 굳는 몸. 의식이 사로잡힌 듯 문짝에 시선이 고정되지만, 차갑게 굳은 문고리는,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10분, 20분, 30분. 어느덧 셀 수 없을 만큼의 초가 흘러가고, 발치에 흘러내린 혈액이 늪을 이루고 있다. 이게 누가 흘린 거더라. 누가 한 대 때리고 간 듯 멍한 머리로 선아는 왼팔을 치켜들었다. 주륵하고, 팔꿈치를 따라 흘러내리는 한 줄기 선혈.
"나도 다쳤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길 잃은 아이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