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1화 〉Something About Us (61/73)



〈 61화 〉Something About Us


'계산해주세요.'

'어…네.'

그리 말하며 물건을 내미니, 당황해하면서도 바코드를 찍는 편돌이. 담배도 아닌데  그리 당황하는 것일까. 하긴, 불법과 합법의 영역을 떠나 대낮부터 교복 입은 여중생이 찾아와 콘돔을 산다고 말하면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 등 뒤에선 어수룩 보이는 회사원 한 명이 기웃거리며 이쪽의 표정을 살피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콘돔을 사는 음침한 여중생의 모습이 남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조숙한 아이? 날라리? 걸레?  중 뭐가 됐건 요즘 세상에 크게 문제될  아니라지만, 그러나  상대가 가족이라면 어떨까. 웁스, 입에 담기도 싫은 욕. 주저리주저리. 막상 상대를 눈앞에 두고서는 아무 말도 못하는 나는 머저리. 대체 이게  지랄인지.

그래도 쪽 팔리는 거 싫다고 바로 임신하는 것보단 낫잖아. 인생의 내리막을  걷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냅다 내달리는 것보단 낫잖아.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자기혐오가 차오를 때면 늘 이런 식으로 자기를 정당화하고는 한다. 그래봤자 허울뿐인 자기위로, 씹창날 대로 씹창난 족보. 그런 식의 비교가 의미를 갖는 일은 언제라도 없다.

손바닥만한 종이상자를 마이 앞주머니에다 쑤셔 넣고, 밖으로 나간다. 슬슬 저물어가고 있는 무렵의 태양. 바닥의 타일 갯수를 세면서 느긋하게 걸음을 옮긴다.



=


'안녕, 또 보네!'

'…'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다다음날에도 여자는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햇볕도 들지 않고, 아무도 찾지 않는 구석자리. 다른 녀석들은  밖에서 화기애애하게 떠들고 있건만, 굳이 이 칙칙한 도서관까지 찾아와 제일 칙칙한 장소에서 칙칙한 여자와 칙칙한 담소를 나누고는 했다.

여기마저 유린당하면 이제 도망칠 곳이라고는 화장실 밖에 없는데, 암막처럼 드리운 앞머리 아래로 또르르 눈알을 굴린다. 똥냄새 나는 변기 위에서 작은 활자들을 억지로 각막에 쑤셔 박는 자신.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비참하잖아.


'오늘은  읽고 있어?'


어느 새 가까이 다가온 여자. 미약한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사람에게서 이렇게 좋은 향기가  수도 있던가. 괜시레, 꼼지락거리는 손마디.

누가 채찍질이라도 하는  쿵쾅대는 심장 박동. 같은 여자인데, 같은 여자인데, 아무런 소용없는 주문. 문득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섬짓함에 황급히 흥분을 다스린다. 위험해. 또 넘어갈 뻔했다. 아다 딱지 못 뗀 남중생 마냥 어지럽던 머릿속이 그제서야 진정된다.

'그런데 너는 무슨 반이야? 너도 3학년이지?'

그렇게 물으며 코앞까지 다가오는 하얀 얼굴. 옅게 립글로스를 바른 입술이 달싹거렸다. 순진무구한 눈동자는 투명하게 상대를, 나를 비치고 있었다.

…역시 부담스러워. 최근 무슨 바람이 들어서 자꾸 나를 찾는 건지는 몰라도, 어차피 순간의 인연. 잠시 스쳐지나갈 뿐인 관계. 그리고 이런 인연을 즐길 정도로 유들유들한 성격은 아니다.

저 혼자 틀어박히는 꼴이 고슴도치 같다고 해도 좋다. 누구의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그림자가 나에게는 어울리니까. 그런데 이런 하찮은여자에게까지 기꺼이 말을 걸어주는 인싸들의 삶은 이해 못하겠어.

굽혔던 무릎을 펴고, 탁 소리 나게 책을 덮는다. 말간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었지만, 최대한 차갑게 목소리를 깔았다. 찐따가무슨 표정을 지은들, 어차피 찐따처럼 비치겠지만.


'…이해할 수 없어. 대체 뭘 원하길래  귀찮게 하는 거야?'

'응?  원하다니, 나는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자 태연스럽게 뇌까리는 여자. 또박또박 말하다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는 여자.

뭘 하고 싶다고? 고작  마디에 부실한 이성의 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사자무리 앞에 놓인 임팔라라도 된 마냥,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되었다. 번개 같이 내리치는 의혹과 당혹감. 귓가에는 이명이 아른거린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건지.  눈알을 필사적으로 굴려가며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시야를 차지한 건 평소보다 한결 어두워진 여자의 안색. 이런 감상은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데, 빛을 잃은 그 모습마저 미치도록어여뻤다. 순정만화의 첫 페이지도 아닐 텐데, 무른 이성을 화사케 착각케 할 정도의 마법.

헤벌레, 한순간 벙 쪄서 저도 모르게 입을 추하게 벌렸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지금 뭐라고 지껄였더라.

'그…귀찮게 했다면, 미안해. 정말로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어. 사실, 나도 친구가 없거든.'


남자 여럿 끼고 여왕벌처럼 살 것 같은 얼굴로 친구가 없다고? 말도 안 돼. 아니면 이게 말로만 듣던 여자들이 싫어하는 여자란 건가.  또한 엄연한 XX염색체건만, 여자들의 생태계 따위는  모르겠다.

아니 비단 여자에 국한하지 않고 사람이란 생물 자체의 생리를 모른다. 그야 다른 사람과 정상적인 관계를 지녀본 적이 없으니까. 애초에 이런 음습한 외양의 여자에게 다가올 인간은 없었고, 그나마 가족이라고 유일하게 있는 것은 쓰레기 같은 남자 하나. 이런데도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니,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인지. 아니면 나는 인간 이하라도 되는 건가.

그러나 착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친구가 없다고, 암울한 일이지만, 그래서 모두가 같은 건 아니다. 태생부터 화사해 보이는 이 여자와, 태생부터 저주 받은 나란 여자. 어울리지도 않고, 어울릴 수도 없다. 하잘 것 없는 공감대 따위에 묶여봤자,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건 뻔하다.

누가 보면  사랑고백을 받는 여자처럼 보일 거야. 뭉게뭉게 떠오른 핑크빛 상상에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젓고, 덤덤하게 지어낸 목소리를꺼낸다. 친구 같은 거, 나는 필요 없다고.


'그…'


마치 대본을 읽는 배우처럼, 먼지 쌓인 기억의 서고를 뒤져 그중 가장 단호한 문장을 준비했건만, 겨우  글자를 끝으로 혀가 움직이지 않는다. 왜, 어째서, 몸서리 정도의 당황. 거절 따위, 익숙한 것인데.

그제서야 떠올렸다. 거절당하는 게 익숙한 거지. 거절하는 게 익숙한 건 아니라고. 정말로, 바보 같은 사람.

'자, 잠깐만!'


결국 거절도 긍정도 못한 채로 그 자리를 떠났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빠르게 두 다리를 움직이며 시끄러운 복도를 지나쳐간다. 그 군데군데서 떠들고 있는 무리들. 겨우 이런 말로 한껏 당황하는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찮은 잡담들이 이어진다.

이런  내가 아니야. 이런 건 나랑은 어울리지도 않는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말들을 주절댄다. 그러나 입은 거짓말을 해도 심장은 거짓말을 못해서, 뚜렷하게 들려오는 커다란 두근거림. 놀라거나, 지치거나, 그딴 것과는 결이 다르다.

아무래도 좋아. 이런 건 자신이 아니다.

'후우…'

자리에 돌아와 흐트러진 숨을 고른다. 점심시간이 끝나기엔 아직 멀어서인지, 수업시간만 되면 꽉 차는 교실은 3분지 2 가량 비어있다. 익숙하게 책상 위에 엎드려서 눈꺼풀을 닫는다.

그때는 저가 느낀 두근거림이 뭔지도 몰랐으니까. 자동인형처럼 멍청한 말을 그저 반복할 뿐. 그러니까 진정하고, 내일부터는 도서관에 가지 말도록 하자. 도피처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지만 뭐가 됐건 그 여자의 얼굴과 다시 마주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딱히 잠은 안 오지만, 목장의 양을 세며 억지로 잠을 청한다. 목장에서 뛰노는 양의 수가 여든을 넘었을 무렵, 어깨를 툭툭 두들기는 손길.

'잠시 할 말 있는데, 괜찮아?'

화들짝 놀라 허리를 일으켜 세운다. 한순간 그 여자인가 싶어 재빠르게 상대의 얼굴을 쫓았지만, 그 여자는커녕, 아예 여자조차 아니다. 김구 같은 안경을 걸친 뺀질거리는 남자의 얼굴.

안도감과 함께 찾아오는 왠지 모를 실망감. 그냥 늘 그랬던 것처럼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왜, 왜 그래 반장?'

'아니, 부탁할 게 하나 있거든.'

'부탁…?'

'응, 너 그 이시아랑 친하다고 들어서.'

익숙지 못한 이름에 버퍼링이 걸리는 사고. 그러다 며칠 전의 기억을 되새기고,멍하니 입을 벌린다. 그러니까, 지금도 내 머릿속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그 여자의 이름.


'따, 딱히 친하진 않은데…'


그냥 친해지고 싶은 거ㅈ──제 멋대로 지껄이기 시작하는 가슴속의 입을 황급히 후려갈긴다. 대신 자신 없는 목소리가 부르르 떨렸지만, 남자는 신경 쓰는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개한테 오늘밤 학교 뒷산으로 나와 달라고 해줄 수 있어?'

'그, 그건 왜?'

'그냥 나눌 얘기가 있어서 그래. 뭐, 네가 알건 없어.'

그러면서 어깨에 둘러지는 남자의 딱딱한 팔. 커다란 손이 가녀린 살을  움켜쥐자, 저도 모르게 미약한 신음을 내뱉었다.


'읏…'

'꼭 좀 부탁할게. 응? 꼭.'

그때, 하필이면 그 여자의 웃는 얼굴이 떠오른 이유는 뭘까.

뭐가 됐건, 그런 말을 하는 남자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순진한 얼굴로 친구가 되고 싶다 말하던  여자의, 시아의 눈과는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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