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Something About Us(여기까지 기존 분량입니다)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지? 그럼 지금 당장 학교 뒷산으로 나와줄 수 있어?]
어두컴컴한 방 속에서 창백하게 발광하는 핸드폰 액정. 2시간의 고심 끝에 다 작성하고 난 한 줄짜리 텍스트가 눈에 들어오지만, 기껏 처든 손가락은 여전히 안쓰러울 정도로 덜덜 떨리는 채. 한없이 가까운 발송 버튼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진다. 고작 눈 감고 손가락 한 번 꾹 누르면 되는 일인데, 왜 나는 이리도 망설이는 것일까.
개한테 오늘밤 학교 뒷산으로 나와 달라고 해줄 수 있어?
그, 그건 왜?
그냥 나눌 얘기가 있어서 그래. 뭐, 네가 알건 없고.
오늘 낮, 불쾌한 얼굴의 그 녀석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자세히는 몰라도 결코 좋은 일을 꾸미는것은 아닐 테지. 그 여자가 무슨 원한을 산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는 얼굴이 꽤나 예쁘고, 아름다움은 이따금씩 그 자체로 주인을 해하는 독이 되기도 한다.
더군다나음침한 시간에 음침한 장소로 여자 한 명을 콕 집어서 부른다라. 과연 무엇을 저지를지,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겠지.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내 알 바는 아니다. 그 아이가 그곳에서 무슨 일을 당하든, 더러운 남자들에게 옷이 찢기고 질내사정을 당하든, 그러다 원치 않는 애를 임신하든, 편히 집에서 쉬고 있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좀 역겹긴 해도 인간들이란 원래 다 이런 법이잖아? 저 자신도 피해를 볼 것 같은 일에는 공감능력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족속들. 나는 다만 평균보다 조금 더 약은 편일뿐이고, 그게 당연시되는 사회.
그래, 내 알 바는 아니다. 오히려 그 남자가 넌지시 건넨 경고를 생각하면 대강이나마 부탁에 따라 준 다음 신경 끄는 것이 제일이다. 만약 내가 그 여자를 불러내는 데 실패하면 애먼 짓궂음의 화살이 어디로 향할 지는 너무나도 뻔한 일이니까.
그래봤자 쭈구리라지만 학교 안에서만큼은 평온한 생활을 이어나가고 싶다. 결심하고, 문자를 발송하려는 그 순간, 머릿속에서 또 다른 기억이 안개처럼 퍼졌다. 아련하게 울려 퍼지는 어느 소녀의 목소리.
그…귀찮게 했다면, 미안해. 정말로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어. 사실, 나도 친구가 없거든.
산타클로스에 대한 믿음은 이미 옛적에 붕괴되고, 미취학아동조차 건달 마냥 입에 창년 소리를 달고 사는 시대. 이제는 삼류 드라마에서조차 채용 안할 법한 대사를 순진한 얼굴로 지껄이던 여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옅게 떠오른 홍조며, 풋풋한 생기가 감도는 연분홍빛 입술이며, 모든 게 나와는 너무 다른 것들. 겉뿐만 아니라 속조차 너무나 깨끗한 그 사람.
'…할 수 없어.'
떨림은 이제서야 진정되지만, 오히려 휴대폰 액정에서 떨어지는 손가락. 이쯤 되면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좋아하게 되었다고.
이것이 흔히 말하는 like의 의미인지 love의 의미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런 나와도 친구가 되고 싶다고말하던 그 여자의 말에 홀리고 말았다.
친구, 그래 그 낯간지러운 단어. 인생 처음으로 사귄 낯간지러운 존재. 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울림에 조소 비슷한 실소를 짓는다. 비록 불협화음이라지만 묘하게 이끌리는 울림.
허나 이 지경이 되어서도 머리의 냉정한 한구석은 의심을 멈추지 않는다. 그 년도 다른 인간들처럼 어차피 널 기만할 뿐이라고. 단물만 쏙 빨아먹은 다음, 필요가 없어지면 널 버릴 거라고. 대체 세상의 어느 누가 너를 진심으로 좋아해주겠어?
익숙한 자기부정. 하지만 이제 그런 의심 따위는 어찌 되어도 좋을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껏 부정해오던 그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자각하게 되었다.
뭐라 해도, 친구이니까. 친구라면, 서로 돕는 게 당연하니까……친구 맞지?
만화책에서 읽었던 어느 대사를 읊으니 꼭 자신이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 가슴이 간질거리지만, 썩 나쁜 느낌은 아니다.
쓰던 문자를 망설임 없이 지우고 난 뒤 방문을 열고 나간다. 문자를 보내지 않더라도 그저 가만히 있으면 결국 똑같은 일이 발생할 뿐이겠지. 내가 어떻게든 해야. 그런 마음을 품고 약속했던 학교 뒷산까지, 준비물은 달랑 사과사의 애새끼폰 하나.
내 어렴풋한 예측이 맞다면 상대는 훌륭한 범죄예비군. 태어나고 자라온 게 찐따 외길이라, 두려움은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지만, 생각을 달리 하면 기껏 해봐야 급식 먹는 양아치들일 뿐이다. 무슨 짓을 저지르는 순간 바로 경찰한테 알린다고 경고하면 알아서 꼬리를 말겠지. 신고 제도가 보편화된 요즈음에 엄석대 같은 존재는 나타나지 않는 법이니까.
새벽에 가까운 밤이라 거리를 나돌아 다니는 사람은 얼마 없다. 언제나 보던 것과 조금 다른 분위기의 음산한 골목길을 지나 추악한 노파의 굽은 등 같은 봉우리에 도착, 핸드폰의 플래쉬를 번쩍이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어! 여기야 여기!'
'등신아, 소리 키우지 마!'
애초에 산이라고 해봤자 커다란 언덕 수준이기에 기다리고 있던 인간들은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3명의 건장한 남자들. 개 중 은근히 나를 겁박해오던 그 재수 없는 안경잽이가 먼저 나를 알아차리고 인사를 건네 온다. 제법 큰 목소리에 안경잽이의 조인트를 까는 다른 남자.
옆에 있는 녀석들은 누구지? 소주병으로 나발을 부는 모습이 꽤 불량해보이지만 학교에서 본 기억은 없다. 그럼 고등학생인가? 경계를 높이며 핸드폰을 켜서 번호 112를 미리 입력해둔다. 경찰 따위 조금도 믿지 않으나, 어디까지나 방위용이었다.
'뭐야, 고년은 어디 가고 너 혼자만 왔냐?'
'그, 그게…개, 개는 왜 부르는 건데요.'
분명 마음을 굳게 먹고 왔는데, 불쾌감이 살짝 어린 어조에 다시금 울렁거리는 가슴. 입 안에 고이는 타액을 뒤로 넘기며 최대한의 다부짐을 가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굴하게 떨리는 목소리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일단 있는 힘껏 없는 가슴을 쭉 펴본다.
'애야, 그러다 험한 꼴 본다. 내가 계집년이라고 봐줄 줄 아냐? 주먹 들기 전에 지금 당장 이시아 그년 불러라.'
'시, 싫은데요.'
'하, 이 년 봐라. 그래도 친구 좋다 이거지?'
'다, 다가오지 마요. 경찰 부를 거니까!'
내 절박한 외침 따위 아랑곳 않고 가래 섞인 침을 찍.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위협에 굳어버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점점 공포에 질리는 나의 상태 따위 아랑곳 않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는 둘러싸여 있었다.
이 녀석들 왜 이렇게 막 나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대화로 해결한다는 선택지. 건장한 남자 세 명이라는 벽에 둘러싸이니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게 된다. 몇 대 맞을 각오 정도야 진즉에 해두었지만...
'야 최재수, 네가 오늘 그년 따먹을 수 있다며. 그래서 기껏 기대하고 왔더니 이딴 찐따년만 있고 이게 뭐야이게.
'죄송해요 형…'
'하, 됐다. 애초에 너 같은 놈한테 기대를 건 내가 병신이지.'
'야, 그럼 애는 어떡하지? 이대로 그냥 보내줄 수는 없고.'
'뭘 어떡하긴 어떡해. 최재수, 거기서 카메라 켜고 있어. 찍어두게.'
'뭐, 뭐하는 거에요!'
아차하는 사이, 통화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순식간에 빼앗긴 핸드폰. 재빨리 손을 뻗었지만, 그 순간 칼로 쑤셔지는 듯한 고통이 아래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굽히자, 정확히 명치 한가운데를 가격한 남자의 주먹이 보인다. 역류하는 위액.
'욱!'
'반항하지 마라. 오빠 거친 남자아니다. 웬만하면 여자는 안 때리는 순정남이야. 하지만 너 같은 년은 이래야 말을 듣겠지?'
배를 움켜쥐고 쭈그린 사이 거칠게 벗겨지는 옷자락. 풀린 눈을 치켜드니 바로 근처에서 또렷하게 빛나는 카메라 플래쉬가 보였다.
'미친 안경 새끼…너 이러고도…'
'그래서 카메라로 기록을 남기는 거잖아. 안심해, 이 오빠도 너 같은 애 따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대신 너 입 조금이라도 뻥긋하는 순간 바로 인스타에다 올려버린다? 뭔 말인지알지?'
덮쳐오는 손길을 뿌리쳐보지만, 이미 힘이 풀린 어깨로는 변변찮은 반항조차 되지 못한다. 그대로 떨어져나가는 교복 상의, 셔츠, 치마, 이윽고 말로하기 힘들 정도의 민망한 차림새가 되었을 때, 내 옷을 벗기던 한 남자가 돌연 손을 멈추었다.
'뭐야 너, 왜 갑자기 멈추고 지랄이야.'
'아 시발…나 섰어.'
'미친놈.'
급한 손길로 바지춤을 풀어 제끼는 남자. 이내 한눈에 봐도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삼각팬티가 드러나고, 그것마저 훌러덩 내려버린다.
'야 이 미친, 네가 침팬지냐?'
'아 씨…그럼 어떡하라고, 꼴리는 걸. 싫으면 그냥 구경만 하든가.'
싸늘한 밤공기 중에 노출되는 남성성을 상징하는 물건.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횟수만 따지면 숱한 편. 비록 한 사람 거만 주구장창 봐대서 다른 사람의 것은 처음이라지만, 어차피 고추가 다 거기서 거기지. 기분 나쁜 생김새에, 역한 땀내.
경험이 많다고 해서 변태는아니니 불쾌한 상황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지만, 그보다는 익숙함이 더 크다. 그러니 큰 충격을 먹지는 않았다. 아니, 버스 뒷자리에 탄 것처럼 몸이 덜컹거리는 와중에도 오히려 나는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흥분했냐고? 설마.
지금 내가 여기 없었으면, 이딴 일을 당하는 건 아마도 이시아, 아니 시아였겠지. 내가 이런 일을 당해봤자 오물 덩어리에 오물 한 줌이 늘러 붙은 정도밖에 안 되지만, 몸도 마음도 순수한 그 아이는 다르다. 정작 나 자신의 일에는 슬픔도 공포도 차오르지 않지만, 이 일을 당하는 게 그녀라고 상상하면 마냥 끔찍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고통 대신 행복을 느끼는 거다. 쓰레기 같은 내가 고결한 그녀를 위해, 인생 처음의 친구를 위해 대신 희생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커다란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거다. 어차피 애초부터 더러운 몸이었으니까. 몇 번이고 주어도 상관없잖아. 몸은 창녀여도, 마음만은 성녀 같은 거니까.
'오, 안경 벗기니까 제법 괜찮은데?'
'진짜냐?…진짜네. 나도 해볼까 그럼.'
괜히 반항해봤자 맞기만 할 뿐이니까. 맞는 것은 싫다. 강간당하는 것도 싫지만, 맞는 것은 더싫어. 아픔은 언제라도 익숙해지지 않으니까.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싫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몸에 스르르 힘을 푼다. 이러면,맞지 않는다. 어떻게 아느냐면, 아버지가 그랬는걸. 어린 내가 조금이라도 반항할 때마다, 늘 매서운 얼굴로 주먹을 쳐들었다.
마치 휘몰아치는 폭풍 속을 항해하는 돛단배와 같다. 얌전히 돛을 내리고 바람결에 순응하는 게 제일 안전한방법. 포식자가 아닌 피식 당하는 자가 야생에 적응하는 방법. 등 뒤를 간지럽히는 잡초들도, 전신을 아우르는 미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익숙한 것이 되어간다. 그렇게 나는 생각을 멈추고 남자의 거친 몸짓에 적응해갔다.
'이년 꽤 쓸만한데, 범생이 같이 생긴 주제에 아다가 아니라는 게 놀랍지만.'
'인정…나중에는 이시아 그 년도 이렇게 따먹자.'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곧장 하얘지는 머릿속. 시아는 안 돼. 시아는 나와 달리 이런 짓을 당해도 괜찮을 아이가 아니란 말이야. 뭔지 모를 조급함에 쫓겨 위아래로 들썩거리기만 하던 어깨가 절로 움직였다.
다음 순간, 내 손은 머리맡에 굴러다니고 있던 소주병을 주워들어 녀석의 관자놀이를 있는 힘껏 후려치고 있었다. 미처 생각이라는 걸 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 내 배를깔고 앉은 채 허리를 놀리던 녀석의 몸이 옆으로 푹 꺾인다. 제대로 후려쳤는지, 풍만한 여인네의 가슴골처럼 깊게 파인 녀석의 뒤통수.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런지 비명은 없었다. 얕은 언저리의 숲은 여전히 고요함에 물들어 있고, 다만 손에 남은 혈흔만이 비릿한 냄새로 자기 존재를 주장해올 뿐.
'뭐, 뭐야 시발!'
'아, 아아…'
사람을 죽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내가, 이 두 손으로.
아스피린이라도 과다 복용한 것처럼 덜덜 떨리는 두 손. 창백하리만치 하얀 손이 붉게 물들어 있다. 은은한 달빛에 맞추어 저를 뽐내는 붉은혈액의 색.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뭐가 됐건 간에 돌이킬 수 없는 짓거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 나란 년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두 손으로 머리를 억세게 붙잡는다. 끈적한 피가 머리카락에도 늘러붙고, 흐릿하게 번지는 시야. 추레함과 역함, 헛구역질을 동반한 어지러움, 반쯤 망가져 있던 이성에 쐐기를 박는 피비린내, 그리고, 대체 뭘까, 이 묘한 상쾌함은.
'──어라?'
기절이라도 한 듯 눈앞이 어둡게 물들고, 다시금 눈을 떠보니 재수 없는 안경잽이를 엉덩이 아래에 깔고 앉아있는 나. 이게 말로만 듣던 기승위? 고개를 아래로 떨구니 금이 간 안경을 붙잡은 채 여린 계집애처럼 오들오들 떠는 안경잽이가 보인다. 근원적 공포가 집어삼킨 그 표정.
한 놈 죽인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다른 한 놈은? 슬쩍고개를 돌려보니 가장 처음 죽인 녀석 옆에 얼굴 가죽이 반쯤 뜯긴 채 쓰러져 있는 녀석이 있다. 뭐야 저거? 누가 저런 거야? 뺨에다 손등을 슥슥, 분을 바르듯 피칠갑을 한다.
'뭐야, 이거.'
'히, 히익…!'
그렇게 물으니 수축한 동공 위로 언뜻 내 모습이 비친다. 피로 번들거리는 모습. 고양된 눈동자. 하얀 알몸을 덧칠해주는 혈액이라는 따뜻한 옷감. 꼭 예쁘게 화장을 한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내 오른손에 들린 주황색 전기톱도 그에 화답하듯 호쾌하게 우웅거린다. 시발 이건 또 어디서 난 거야?
자아도취에 휩싸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야. 공포가 담긴 눈을 남에게 향한 적은 많았지만, 그 눈이 자신을 향하는 것은 처음이다. 줄곧 갈취만 당하던 피식자가 포식자가 되어버린 셈. 결국 나 또한 똑같은 악일 지언데, 약자멸시란 것이 이리도 기분 좋은 것이었나. 참새 마냥 자존감으로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는 가슴.
'사, 살려줘…나, 나는 아무 것도 안 했잖아…'
애원하는 목소리와 동시에 아랫도리 근처에서 퍼지는 미지근한 액체. 평소 같았으면 찝찝함에 치를 떨었을 텐데, 이것 또한 나를 두려워해 일어난 생리적 반응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음, 나쁘지 않아. 혀를 내밀어 녀석의 툭 튀어나온 목젖을 핥아본다. 혓바닥에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땀내, 전기라도 쏘인 듯 바르르 경련하는 남자의 딱딱한 몸.
'살고 싶어?'
까칠까칠한 입술을 혀끝으로 어루만지면서 물으니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끄덕끄덕. 그때 한 줌 정도 남은 마지막 이성이 발악하듯 외친다. 이러면 안 돼. 지금이라도 멈춰야만 해. 이런 건 나쁜 짓이야. 이런 건 해서는 안 될 짓이야.
그 부르짖음에 가출했던 정신이 돌아오고, 변함없이 두려움에 요동치는 녀석의 눈동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제서야 자신의 모습을 오롯이 인식한다. 화장도 뭣도 아닌 추레함. 붉은 피와 하얀 뇌수와 희뿌연한 백탁액이 한데 뒤섞인 번잡스러움. 거기에 있던 것은 예쁘게 단장한 신부 따위가 아니라 단순한 미친 여자였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미쳐있었던 거지?
그보다 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거야. 일단 나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나는 아닌 것 같은데, 톱날 부분을 따라 끈적하게 늘어지는 혈액. 내 손을 더럽히고,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신다. 땅땅 망치를 두들기는 검은 옷의 판사님. 안 돼, 안 봐줘, 돌아가. 아무리 죄인이라지만 최대한 형량을 줄여줬으면 하는 이 마음이 그렇게나 잘못된 것인가요.
지랄하지 말자 강선아. 현실부정도 정도껏. 지금이라도 발정난 염소처럼 낑낑대는 이 녀석을 보내주고,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자. 살인은 범죄, 범죄는 나쁜 것. 응, 그게 올바른 길이다.
모처럼 네 아버지께서도 훌륭한 경찰이시잖아? 밑바닥에서부터 청장 자리에까지 오른 대─단한 분이시잖아? 그래 그 시발년, 그 시발년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배배 꼬였다. 그 새끼 때문에 목이 졸리면 쾌감을 느끼는 변태스러운 성벽을 얻고 말았다.
딱히 변명을 내두르려는 것은 아니야. 가해자가 된 피해자? 그건 좀 지랄.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이 사람 죽이는 게 대체 왜나쁘다는 건데. 운전 중에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온 애새끼를 들이받아도 살인자 취급을 받는 세상이다. 그냥 살면서 한 번쯤은, 다들 그렇지 않나? 아님 말고.
'미안…이제 가도 좋아.'
하지만 뭐라 해도 이건 아니야. 일말의 이성이 간절하게 외친다. 이 이상 가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 게 뻔하다. 녀석이 도망쳐서 곧장 경찰서로 향한다고 해도 좋아. 차라리 녀석을 보내고 나서 나도 죽어버리자. 적어도 죽기 전에 소중한 사람의 도움이 될 수는 있었잖아? 그러니 미련도 없다.
장고 끝에 녀석의 배 위에서 슬며시 물러나자 내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녀석. 그러는 녀석의 얼굴 위로 문득 언젠가 보았던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졌다. 선아야, 오늘은 안전한 날이지? 아아 아버지, 저는 아직 초경도 안 왔다구요.
전혀 닮지 않은 둘인데, 아버지는 뚱뚱하고 이 녀석은 빼빼 말랐는데, 아버지는 수염도 났고 이 녀석은 민둥민둥한데, 아무튼 괜히 짜증이 나서──
'커트 코베인!'
'─커흡'
요란스럽게 돌아가고 있는 전기톱을 끄트머리부터 푸욱 찔러 넣자 실이 풀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힘없이 고꾸라지는 안경잽이. 문득 장난기가 들어서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려본다. 오락기 스틱 돌리듯이 빙글빙글. 갈기갈기 찢기는 얼굴 가죽, 금이 간 항아리처럼 봇물 터지듯 뿜어져 나오는 핏물.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흐리멍텅해진 머릿속에서, 하늘 위로 날아오를 것 같은 고양감만이 유일하게 선명하다. 이제는 미안하다는 말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 멀리 와버린 걸까. 해질녘 이글거리는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보잉747. Good morning, ladies and gentlemen. We hope you have had a pleasant and enjoyable flight.
'후헤에…'
군침을 질질.
=
대체 누가 죽였는지 모를 녀석들을 죄다 땅 속에 파묻어버리고 돌아오니, 정원에서 달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가 있었다.
왜 새벽부터 괜히 나와서 청승이세요, 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니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살이 두툼하게 오른 턱살이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예뻐졌구나.'
전신에 덕지덕지 묻은 피는 덜어냈지만, 얼굴은 아직 피칠갑을 한 채. 왜냐면 얼굴을 덮은 이 질척임이 기분 좋았으니까. 굳이 비유하자면 인간 츄파츕스 같은 꼬락서니. 하지만 그런 모양의 딸을 보고서 지껄인다는 게 고작 그따위 말이라니.
결국 그날밤, 아버지는 세 차례에 걸쳐서 나를 강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