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4화 〉Something About Us (64/73)



〈 64화 〉Something About Us



"후우…"

짧은 청치마와  안에 우겨넣은 순백의 블라우스. 그리고 가녀린 어깨를 덮는 연갈색의 트렌치코트.

그런 차림으로 걷고 있으니, 주변에서는 연예인인 건가? 그렇게 수군수군. 무난하기 그지없는 패션도 모델이 특별하니 밀라노 풍이 된다.

인간이 개미떼처럼 북적거리는 공항 안을 사뿐한 걸음걸이로 활보한다. 한 손에는 분홍색 캐리어, 다른 한 손에는 세피아색 여권, 그리고 귀에 꽂은 무선이어폰에서는 제이지의 Empire State of Mind가. 뉴욕은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군중 속에 홀로 남았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다. 오히려 평소보다 한결 상쾌하다고 할까. 언제나 주변을 꽁꽁 둘러 싸매던 경호원들도 전부 물리친 채, 이자나는 커다란 인파 사이에 자연스레 묻혀 있었다.

-문자와쑝!

"파파도 참…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또 문자 보냈네."

갑자기 울린 알림에 외투 속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보니 아니나 다를까. 안절부절 못하는 어투로 적혀있는 아버지의 걱정 한 마디. 정말로 혼자서 괜찮느냐, 집까지 올 수 있겠느냐,  그런 거. 애꿎은 휴대폰 액정을 째려보던 이자나는 답장도 않고서 도로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사실 그 참변 이후 살아있는 경호원들이 몇 안 남아 있기도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혼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취소했다가 다시 예약한 독일행 비행기, 모처럼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만큼은 혼자서 유유자적 다니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부모의 만류도 뿌리치고 기어코 홀로 공항으로 향했다.

물론 면허도 없는 이자나가 자가용을 운전할 있을 리도 없고, 결국 공항까지는 난생 처음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왔다. 이상하게 생긴 파란 기계에다가 카드를 찍고, 내리기 직전에 벨을 누르고, 다시 카드를 찍고……익숙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불편함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의외로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독일행, 독일행 비행기가 30분 후 출발합니다. 예약자 분들은 부디 시간 안에…]


기계녀가 말해주는 안내 멘트에 체크인 장소를 찾아 바퀴 달린 캐리어를 질질질, 빛나는 금발을 휘날리며 걸으니 자연스레 시선이 쏠린다. 이미 옛적에 익숙해져버린 주목. 어린 시절 옆자리에 앉은 여자아이가 크게 외치길, '와 바비인형이다!' 멍청한 금발의 대명사 같은 그거.

하여간 우민들 주제에 예쁜 건 알아가지고.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평정을 유지하면서 이자나는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살며시 입꼬리를 감아올리자, 사르르 녹아내리는 눈동자들. 아름다움은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머저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광경이다.


"…어라?"


잠시 동안 해매인 끝에 체크인 장소에 도착.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지만 판매원은 따로 보이지 않는다. 요즘은 다 무인이라는 건가?

살짝 굳은 얼굴로 발권기 앞에 선다. 묘하게 나사가 빠진 설명대로 버튼을 띡띡 눌러보지만, 뭔가 맞물리지 않는 아다리. 언어 설정을 한국어가 아닌독일어로 바꿔보지만, 여전히 아리송한 머릿속.

"저기, 빨리 좀…"

"아──진짜!"

“히익!”


평소 결코 지능이 낮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끈거리는 머리를 꽁꽁 싸매며 버튼을 마구잡이로 눌러봐도 도통 모르겠다. 끝내 애꿎은 기계를 발로 뻥 차버리자, 뒤에서 움찔하는 기색. 알게 뭐야.

내가 바보인  아니라 이 기계가, 아니면 이 기계를 만든 사람이 머저리인 거야. 그렇게 혼자 씩씩 대며 이자나는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말도 안 돼."

출발 20분 전. 게이트를 통과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꽤나 빠듯한 시간. 이럴까봐 분명 아침 일찍 집을 나왔었는데, 여기 오기까지 뭐든지 처음 해보는 것들 투성이다 보니 생각보다 늦어버리고 말았다.

평소에는 흑곰이나 다른 경호원들이  알아서 해주었을 텐데, 흑곰 그 바보는 아직까지 퇴원도 못하고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렇게 애먼 사람에게 화를 풀다가도, 금세 시무룩해지는 기분. 결국 나는 이런 거 하나 혼자서 못하는 무능한 인간이라는 걸까.

저절로 축 쳐지는 양 어깨, 그와동시에 쑥 빨려나가는 기운. 그래도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는 지라 곤란한 듯 서성이는 그때,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타이밍 좋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도와줄까?"


목소리가 귓가에 꽂힌 순간, 심장이 멈췄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비켜봐. 내가 해줄게."

"자, 잠깐만요!"

말도 못하고 어버버하고있는 사이 앞으로 나서는 인형. 매끄럽고 가느다란 검지가 발권기의 버튼을 망설임 없이 누른다.

그녀 또한 이러는  썩 익숙한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자나보다는 훨씬 능숙했다. 이윽고 그녀의 손에 들린 티켓 한 장.

한순간 차오르는 기쁨을 애써 억누르며, 이자나는 낯빛을 차갑게 굳혔다.

"…왜 따라온 거에요."

"왜라니, 그야 인사하고 싶어서지. 한쪽 눈에 안대 쓴 경호원 언니가 너 떠난다고 알려줬어."

"누가 그딴 게 필요하다고…!"


그렇게 소리치자마자 왈칵 차오르는 눈가의 습기. 봉긋한 가슴을 으스러질듯 쥐어보지만, 가슴의 떨림은 멎질 않는다.

길고  머리카락, 연한 앵두 같은 입술, 말간 눈동자, 하얗고 갸름한 얼굴, 모두  꿈에서나 그리던 모습 그대로라서.

너무 반가운데, 반가워할 수가 없다.

너무 기쁜데, 기뻐할 수가 없다.


"저는 시아 씨 따위 보고 싶지 않았어요."

"나도 알아.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해두고 싶었어."

"그딴 말도 필요 없어요. 글쎄 당신 얼굴 따위 이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니까요. 그런데 왜…"


그녀는 안쓰럽다는 얼굴로 이자나를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되도록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소녀의 마음. 어차피 이어지지는 못할 사이라지만, 일그러진 얼굴 따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 따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있는 힘껏 눈가에 힘을 줬는데, 매정하게도 차오르는 습기. 며칠 만에 본 그녀의 예쁜 얼굴이 흐릿하게 번진다.

"크, 흥, 흐읍, 보, 보지 마요."

"이자나."


잔뜩 얼룩져 있는 얼굴을  손으로 가려보지만, 어느 새 코맹맹이가 되어버린 목소리까지는 차마 감출 수가 없다.

"가, 가요…얼른 가버리라구요…!"

"…"


지금이라도 그녀를 납치해서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 지금이라도 그녀의 마음을 앗아간  빌어먹을 녀석을 죽여버리고 싶다. 마음만 같아서는, 마음만 같아서는, 누구나가 쉽게 떠들어대는 검은 욕망들.

하지만 그러면  되잖아. 아무리 좋아하더라도,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사람인데, 그렇게 아픔을 줄 수는 없잖아.

"이제 정말 잊으려 했는데, 이제 다시는 생각조차  하려고 했는데,  다시  앞에 나타나서!"

이자나는, 아니 이사카는, 딱히 착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어떨 때는 한없이 잔인한 사람이었지만, 어째선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큼은 도무지 나쁘게  수가 없었다.

미련한 바보라고 해도 좋다. 호구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나를 호구라고 부르는 것만큼은 용서 못해.

아아, 비참하게 차인 아직까지도 그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다. 그녀라는 늪에 파묻혀 허우적대고 있는 중. 진흙탕 위로 콧구멍만 빼곰 올라와있는 중.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저기 서있는 그녀를 볼 때마다  달뜬 마음은 커져만 간다.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보지 않으려 매정하게 거절해 보지만,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냥 처량할 뿐이다. 마치 흐느끼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 꼭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 아이 같은.

결국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혼자만의 어둠 속에 파묻혀 있으니, 돌연 머리를 감싸 안는 부드러운 온기.

이 감촉은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데, 어느 푹신한 매트릭스 위에서, 흠뻑 들이마시었던 채취.

"흐윽, 흑…"

"미안해."

죄책감 어린 목소리가 못내 밉다. 정말로 듣고 싶은 말은 '미안해' 따위가 아니라, '사랑해'인데.

정말 싫다. 정말 싫다. 정말 싫다를 몇 번이고 말해보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는 이 애정이 정말로 밉다.

왜 나는 이런 사람과 만나서 이렇게 질척대는 걸까. 정말로 미련곰탱이 같은 여자. 자신을 껴안은 온기를 차마 떨쳐내지도 못하고, 그렇게 한참을 그녀에게 안겨 있는다.

[독일행, 독일행 비행기가 10분  출발합니다. 예약자 분들은 부디 시간 안에…]

"…비켜주세요. 이제 곧 비행기 뜰 시간이에요."

"아, 미안. 그…잘 가, 이자나."


한참 같은 잠깐이 지나고, 눈치 없이 흘러나오는 안내 멘트에 그녀의 품에서 벗어난다. 그렇게 모처럼 찾아온 봄은 순식간에 겨울로 되돌아 가버리고.

그렇게 떨어지자 제 얼굴에 따라붙는 죄책감 어린 시선. 저 눈에 담긴 감정이 애정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헛된 소망.

씁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이자나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는 미련  스푼을 최후로 덜어내었다.


"이사카."

"응?"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서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매정한 이별 방식이라지만, 그 얼굴을 다시 본다면 모처럼 굳게 먹은 마음이 다시 헬렐레 풀어질까봐. 긴장을 놓는 순간 금세 돌아가고 말 목덜미를 뻣뻣이 부여잡는다.


"이사카라고 불러주세요. 지금껏 숨겨왔지만, 이게 제 본명이에요."

"…잘 가, 이사카. 거기서는 부디 행복하길."

"…역시 이자나라는 호칭이  좋은  같네요. 그럼, 안녕."

이것이최후. 손을 가볍게 흔들면서, 역시 가볍게 안녕.

이제 정말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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