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5화 〉Something About Us (65/73)



〈 65화 〉Something About Us

밤의 고즈넉함에 감싸인 거실. 자그마한 카우치 소파 위에 엉덩이를붙인다. 딱히 보지는 않지만 그냥 틀어놓은 TV에서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요란스럽게 떠들어대고 있다.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차창 밖의 풍경처럼 지나간 그간의 일들을 떠올린다. 음악실 안에서 돌연 울려 퍼진 총성도, 언니가 내 방에 카메라를 설치한 것도, 이자나의 갑작스런 납치도, 뭐라 형용할  없는 선아의 슬픈 표정도, 그리고 얼마 전 보게 된 이자나의 눈물도, 그 모든 일들이 지난 일이 되니 일종의 회한으로서 내게 돌아온다.


"시아야."

"응?"


사실, 그냥 멍하니 있는 중. 고름 같던 시름들을 전부 덜어내니 한결 알쏭달쏭해진 기분. 문득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볼가를  찔러오는 앙증맞은 손가락. 예상 못한 행동에 한순간 머리가 굳는다. 유치한 장난이 성공했기 때문인지 배꽃 같은 얼굴이 헤픈 미소를 배시시 짓는다.

"…뭐하는 거야."

"그냥, 좋아서."

그렇게 말하면서 더욱 짙어지는 웃음기. 괜한 심술이 들어 언니의 말랑한 볼가를 아프지 않게 꼬집지만,나 역시 그녀와 크게 다른 마음은 아니다. 언니의 뺨을 살살 쓰다듬는다. 그러자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처럼 앵겨오는 어린 얼굴.


"쪽해줘, 응?"

약간의 애교가 섞인 부탁에 따라 언니의 작은 입술에  입술을 갖다 댄다. 새가 부리를 맞추듯 가벼운 키스가 입술 언저리를 어루만지고, 서로의 입가를 간질이는 서로의 호흡. 애띠게 변한 눈동자가 내 얼굴을 쫓지만, 지금은 이 이상 진도를  기분이 아니다. 말없이 고개를 내젓자 한껏 달아올라 있다가 시무룩하게 변하는 언니의 표정.

"오늘은 피곤하니 이만 자자."

"응…같이 자도 되지?"

"응, 그 전에 몸부터 씻고."

"같이 씻으면  돼?"

"안 돼."


축 쳐진 눈꼬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은 다음, 주방을 지나쳐 욕실로 향한다.

습습한 욕실에 들어서자 무의식적으로 구석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지 확인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몸에 걸친 옷가지들을 벗어던진다. 지금의 언니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굳이 그런 귀찮은 짓거리를 할 이유도 이제는 사라졌고.

완전히 나체가 된 다음 샤워기의 밸브를 옆으로 돌린다. 잠시 차갑다가도 이내 따뜻하게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 기분 좋은 물방울이 전신의가장 얕은 곳에서부터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어지럽네."

습기로 얼룩진 거울, 그 위로 흐릿하게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린다. 손가락을 덧씌우자 물기가걷히고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모습.

미역처럼 푹 젖어서 어깨 위로 늘어진 검은 장발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가녀린 소녀의 몸.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몸이지만, 이때만큼은 마치 나의 것이 아닌  낯선 기분이 든다. 촉촉하게 젖은 연분홍색의 입술을 달싹인다.

금세 차오른 습기를 슥슥 지워 내리고 다시금 거울을 바라본다.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도화지처럼 하얗디하얀 몸. 그저 순결해 보이기만 하는데, 요  주간 지겹게 알몸으로 뒹굴거리던 것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흘러나온다. 게다가 그 상대가 전부 같은 여자라니.

문득 벌꿀 같은 금발과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떠오른다. 이자나, 아니 이사카, 그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공항에서의 이별 이후 벌써 며칠이 지났지만사소한 연락조차 나눈 적이없다.

고마움과 동시에 미안함을 느끼게 되는 나의 친구. 그녀에 대해서 생각하니 자연스레 걱정스런 기분이 된다. 아닌 척 하지만 맘이 여린 아이니까. 어쩌면 생애 처음으로 사랑을 하고 이별을 했기 때문일 지도.

남들의 기준에도 썩 괜찮은 이별을 했다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남은 미련을 훌훌 털어버린  깔끔하게 찍은 방점. 그렇게 마무리가 괜찮다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가 떠나기 직전 내게 보인 얼굴은, 다시 나를 보지 않기로 결심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으로서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운 물음. 그래도 언젠가, 언젠가 그녀가 정말로 나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사랑을 찾는다면 가능할 지도. 이제 연인과는 거리가 멀지만, 적어도 나는 아직까지 그녀를 친구라고 여기고 있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소망을 가슴 한 켠에 묻어둔  샤워기의 밸브를 잠근다. 쏴아아하던 소리가 끊기고, 축축한 바닥 위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푹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는다.

몸까지 전부 물기를 털어내고 밖으로 나오자 때마침 손 안에서 울리기 시작하는 휴대폰. 번호를 확인도 않고서 그대로 통화 수락 버튼을 누르려다가, 화면 정중앙에 떠오른 세 글자에 손가락이 멈칫한다.


[강선아]

입을 꾹 닫고 휴대폰을 가만히 바라보지만, 바뀌지 않는 화면, 제법 긴 시간이 지나도 끊기지 않고 울리는 링톤. 천천히 눈을 깜빡여보지만 바뀌지 않는 세 글자.

그대로 통화를 끊으려다가 이내 관둔다. 아마 내가 지금 이 전화를 끊더라도, 결국 언젠가는 내게 찾아오겠지.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고 했던가. 그래, 마치 묵혀두었던 곤장을 한꺼번에 맞는 기분이다. 그 가증스런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적갈색 머리칼에 고양이 같은 눈매. 싫어한대도 지워지지 않는 상.

 집 앞에서  꼴을 보느니 차라리 지금 전화를 받는 것이 한결 나을 거다. 그래봤자 바뀌는 건 없을 지도 모르지만, 흔들리는 마음을 굳게 다잡은 뒤 통화 수락 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아, 안녕?]

"인사치레는 됐으니 용건만 간단히 말해. 어차피 들어주지는 않을 거지만."

[…으응.]

한때는 바로 옆자리에서 치근거리던 목소리가 이제는 멀게만 느껴졌다. 그야, 실제로 멀리 있으니까. 하지만 비단 거리상의 문제만은 아니리라.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목소리와 더불어 상대에게는 보이지 않을 얼굴까지 차갑게 굳힌다. 한때는 방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이미 단단히 말뚝이 박힌 결심.


[…내일,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숱한 지랄들에도 기어코 다시 얼굴을 보자니. 이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어지간히도 뻔뻔한 인간이다.

불안한 듯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이전과 사뭇 달라서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도 한때는 친구였는데, 이제는 마냥 지워 내리고 싶은 추억. 한껏 인상을 찌푸리면서 대답한다.

"싫어."

[부탁이야. 대신─]

"싫다니까. 아니면 이번에도 누구 한 명 죽이겠다고 협박할 거니? 미안하지만, 그 방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아."

[아니, 이번에는 다른 누구도 죽이지 않을 거야.]

"…뭐?"


순간 단호하게 변한 어조에 되묻고 만다.

[믿지 못할 지도모르지만…아니 믿지 못하겠지만,  번만 만나줘.이번에는 협박 따위는 하지 않을게.]

"하? 내가 왜?"

[…대신,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니까. 내일 한 번,  내일 한 번만 더 만나준다면, 다시는 네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물론 이런 연락도, 다시는 하지 않을게.]


그 간절한 부탁에, 애절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무심코 입을 꾹 다물고 만다. 나는 분명 '아무튼  돼'라는 말을 내뱉으려 했는데, 또 다시 물러지는 물러터진 마음.

…지금 이렇게 매정한 태도로 대하고 있지만, 그녀만 생각하면 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한때는고민하고  고민했던 그녀와의 관계.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길 한 번도 소망하지 않았다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굳이 설명할 것도 없이 그녀는 어엿한 범죄자니까. 그것도 법원에 회부되는 순간 사형 판결을 받는 것은 거의 확정인 중범죄자. 그런 범죄자와 하하호호 웃으며 떠들 만큼 내 양심이 둥글지는 않다.

그런데 막상 그녀와 마주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처럼 박아놓은 결심이 약해지고 만다. 나에게로 향하는 사랑을 그리 간단히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인지. 아무튼 이기적인 사고방식. 결정도 못하고 그저 갈팡질팡하는 모습은 병신 같을 뿐이다.

그래서 그때 지하실에서, 오랜만에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답지 않게 곧 바로 결정을 내렸다. 내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를 칼 같이 내치고 지금도 한 글자 한 글자 똑똑히 기억하는 그 말. 그러니까 네가 싫다는 거야.

순식간에 일그러지던 그녀의 미소. 그 순간 나의 마음 또한 묘하게 일그러졌지만, 아픈 마음 따위는 다독이면 언젠가 낫는 법이다. 침을 발라두면, 언젠가는.

고작 양심 하나 때문에 그녀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그건 있으나 마나 한 감정이니까. 지난 몇  동안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냥 어차피, 이 이상 이어져봤자 서로에게 좋을 게 없는 관계이니까. 나는 살인자인 그녀를 방치할 수도, 그녀의 사랑에 화답해줄 수도 없다.

한때는 격렬하게 타올랐던 사랑도 언젠가는 사그라드는 법,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그녀도 나에 대한 건 싹 다 잊어버리겠지. 그래서 서로에게 가장 좋아 보이는 길을 골랐다. 그래서 그 길로 가는 게 옳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아직은.

모르는데, 모르는데, 모르겠다. 애먼 벽을 발로 뻥 찬다.


"…짜증나."

[…미안]

무심코 튀어나온 속내에 희미한 목소리가 그렇게 사과를 한다. 하지만 딱히 그녀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강선아도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그녀를 마땅한 악이라 규정하지 못하는 자신이 무엇보다도 짜증난다. 아예 신경을 끄기로 했으면서 새벽에 눈을 감으면 종종 떠오르는 그 얼굴. 왜 나는 맺고 끊음이 이리도 확실하지 못한 걸까.


[저기,  안 된다면…]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을 녀석의 모습이 떠올라 짜증은 더욱 커진다. 다 덜어내고 혐오로  빈자리를 채웠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덕지덕지 붙어있는미련. 마치 화장실 타일들 사이에 핀 곰팡이 같다.

그냥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하지만 막상 손가락을 쳐들면 또 망설이고 만다.대체 왜.

하잘것없는 우정이라도 남았다는 걸까. 나는 대체 그 녀석에게서 무엇을 바라는 걸까. 이전처럼 화목한 사이로 돌아가기? 바보 같은 소리. 제사상 돼지처럼 혓바닥 내밀고 죽은 선배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한데, 그럴  있을 리가.

결국 정이 다 문제다. 내가 그녀에게 붙인 정, 그녀가 나에게 붙인 정. 어쩌면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의미 없는 가정.

"좋아."

[응?]

그렇다면 이제 구질구질한  정을 끊어야겠지. 그녀의 것도, 나의 것도 함께.

"좋다고. 내일 만나줄게.대신 내일이 지나면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고, 내 주변에도 얼씬거리지 마. 만약 이 약속을 안 지키면…“

[지, 지킬게! 반드시 지킬 테니까…]


쓰레기 같은 녀석이지만 거짓말을 잘하는 녀석은 아니다. 여전히 신경에 거슬리지만, 이번 한 번으로 녀석에게서 신경을  수 있다면 제법 괜찮은 거래일지도 몰라.

최대한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읊조리며 이번에야말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다. 그 직전, 폰 스피커 너머로언뜻 들려온 음성.

[그러니까…고마워! 그럼 내일 보자!]


순식간에 화색이 도는 그 목소리에, 경멸과 분노의 틈 속에서 미약하게 차오르는 기쁨.

결국 나도 어쩔 수 없는 병신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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