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Something About Us
"앗, 이 밴드 신보 나왔네? 한 번 봐봐!"
"…"
어느 밴드의 통기타 소리가 배경음으로 아련하게 울려 퍼지고 있는 음반가게. 들뜬 표정의 그녀가 청음용으로 배치된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정말로 음악에 심취한 듯 눈을 감으면서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
"이 밴드 저번에 여기 왔을 때 시아가 추천해준 그 밴드 맞지? 기억나?"
"…기억나."
"무슨 오디션 프로그램 나와서 준우승했던데, 알고 있어?"
"…몰라."
그 말을 듣자 따라 비눗방울처럼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들. 그것들을 가차없이 터트린 뒤, 주문처럼 되뇌인다. 내가 그 밴드를 추천해준 다음날 너는 선배를 죽였지. 그리고 그 다음주에는 나를 강간했다.
속으로 열거하는 그녀의 좆같은 짓거리들. 그렇게 한순간 긍정적인 방향으로 엇나갈 뻔한 정신머리를 다잡는다. 기분 나쁘다는 듯이 암적색의 눈동자를 째려보지만, 오히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운 호선을 그린다. 결국 당황한 내가 먼저 고개를 돌리고.
"아, 그 프로그램 안 봤어? 꽤나 재밌었는데 아쉽다."
"알게 뭐야."
"그래도, 이밴드는 시아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라고 했잖아. 공연도 몇 번 갔었다고 했고. 아, 요즘은 안 들어?"
"…안 들어."
이상해. 이상하다. 간질거리는 뒤통수. 간질거리는 심장 언저리.
그 지하실에서 그녀와 마주친 순간부터, 잔정 따위 전부 떼어버리기로 하지 않았던가. 내 어지러운 감정 따위는 둘째 치고 이 길이진정그녀와 나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자신있게 말하지 않았던가.
"저번에는 시아가 여기서 사줬었지? 이번에는 내가 사줄까?"
"…필요 없어."
그녀는 나와 친한 사람들을 들먹이며 나를 위협했고, 나는 답례로 이사카를 불러 그녀의 몸에다 바람구멍을 뚫어다 주었다.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도 이 지랄은 안 했어. 우리가 만약 연인 사이였더라면 서로의 얼굴에 강펀치 하나씩을 먹이고 헤어진 셈인데.
잡생각이 마구 섞여서 머리가 어지럽다. 하지만 마치 우리가 친하던 그 시절처럼 행동하는 그녀를 보면, 어릴 적의 그리운 추억과 마주하는 듯 반가운 기분이 든다. 망아지 마냥 날뛰는 자신의 본심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내가 너무 변덕쟁이인 건가.
"그래도…모처럼인데."
"필요 없다고."
그래도 감정을 최대한 죽이고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젓자 팔에 앵겨오는 그녀. 부드러운 적갈색 머리카락이 팔뚝을 간지럽힌다. 저도 모르게 멈칫하자 말랑한 볼가를 내 팔에다 부벼온다. 아하하, 방울처럼 청명하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나는 실시간으로 암울함에잠기고 있는 중인데, 깊은 늪에 머리부터 꼬라박혔는데, 그런 나와는 대조적으로 밝은 미소를 띤 강선아의 얼굴. 한순간 짜증이 치밀어서 그녀의 몸을 세게 밀쳤다.
"흐응, 빼지 말고. 사실은 관심 있─"
"필요 없다니까!"
"꺗!"
"어머, 재들 왜 저래?"
"싸우는 건가?"
"그냥 저 검은머리가 일방적으로 때린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자, 구경이라도 난 듯 이 쪽을 쳐다보며 웅성거리는 주변, 힘없이 쓰러져 있는 그녀. 익숙지 못한 공황이 덮쳐오고, 동공의 떨림이 느껴진다.
"미…"
'미안'이라는 말을 하려다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는다. 지금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지. 미안해? 그렇게 원망해 놓고서, 그렇게 저주해 놓고서, 그 가는 목을 힘껏 졸라 비틀기까지 했으면서?
어차피 나처럼 그녀도 쓰레기 같은인간이다. 그것도 나보다 더한 쓰레기. 지금은 그저 약한 척하고 있을 뿐이야. 한낱 위장에 불과하다. 실제로 지금껏 그에 속아서 나는……하지만 그녀는 거짓말을 못하는데, 복잡하게 뒤엉킨 머릿속에 통증이 덮쳐온다. 잔뜩 헝클어트린 머리를 붙잡고 있자 걱정스런 얼굴로 내게 다가오는 그녀, 아니 강선아.
"괘, 괜찮아? 시아야."
정작 맞은 것은 자신이면서 나보고 괜찮냐는 물음을 던져온다. 어째서?
그때 선홍빛으로 부어오른 팔목이 언뜻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위로 칭칭 감겨있는 붕대. 감은지 얼마 되지 않은 건지 한가운데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
"…그 붕대, 뭐야."
"응? 별거 아니야. 요리하다가 실수로…"
"지랄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사실은 그때 그 지하실에서, 경호원들이랑 싸우다가 다쳤어.정말로 대단한 상처는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맘만 같아서는 그 손목을 붙잡고서 자세히 뜯어다 보고 싶다. 정말로 괜찮은 게 맞는지, 혹 큰 상처인데도 숨기고 있는 건 아닌지.
그리고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미칠 것만 같다. 끝없이 뿌리를 펼쳐나가는 내적갈등. 의구심이 지친 뇌세포에 채찍질을 가한다.
대체 왜?얼마 남지 않은 잔정을 아직도 다 떨쳐내지 못해서? 그 상처가 나를 구하다 입은 상처라서? 우리가 친구이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 아직도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어서?
…만약 그 모두가 정답이라고 한다면, 나란 인간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내가 너를 걱정할 리가 없잖아."
"하하…그렇지."
멋쩍은 듯 웃으면서도 갸날프게 떨리는 두 어깨가 눈에 들어온다. 팔을 뻗으면 금방 안아줄 수가 있는데,
정말이지 어리석은 생각.
=
뭣 같은 기분은 계속 목구멍 너머에 자리 잡은 채, 데이트는 계속 해서 이루어졌다.
강선아는 우리가 사이좋은 친구였던 나날들을 복기하려는 듯 일전에 우리가 함께 갔었던 장소만을골라서들렀다. 음반가게에 이어 한때 갔었던 영화관, 한때 갔었던 식당, 한때 갔었던 옷가게.
그렇게 같이 영화를 보고, 같이 식사를 하고, 같이 옷을 사고, 정신을차려보면 어느덧 어둑해진 주위. 얄상한 그믐달이 뉘엿뉘엿 떠오르는 게 슬슬 눈에 보인다.
"아직도 더 남았어?"
"마지막, 마지막으로 한곳만 들르면 돼."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나와 달리 시종일관 즐거운 표정인 강선아에게 말한다. 짜증이 다분히 섞인 어조.
그래도 멋쩍은 듯이 웃어넘기는 강선아. 어쩐지 계속 보기가 그래서 고개를 휙 돌린다. 괜히 내가 나쁜 짓을 한 것 같아서 안 그래도 우중충 쌓여있던 짜증이 한층 늘어난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머리는 여전히 배배 꼬인 채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때는 친구였고, 이제는 원수나 다름없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도 갈팡질팡하고 있는 중. 왜 나는 이런 쓰잘데기 없는 고민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일까.
어차피 오늘 하루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보지 않을 얼굴이다. 원망도 욕망도 그저 하루밤의 달과 함께 사그라들 것들. 그러므로 이제 와서 사소한 배려 따위는 필요 없는데도.
"이제 가을인가. 어느덧 우리가 만난 지도 1년이 다 되어가네."
"의미 없잖아. 이제 다시 볼 얼굴도 아닌데."
"…후후, 그렇지."
검게 물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운을 떼는 강선아. 깎여나간 손톱 같은 그믐달만이 휘영청 떠올라 있다. 무심코 별의 자취를 쫓지만, 샛노란 반짝임은 어디에도 없고.
우리 모두 두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인다. 내 팔을 붙잡고서 질질 이끄는 그녀. 목적지도 모르는 채 기계적으로 걷는 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고 있어?"
"…딱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그건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
밤바람 때문인지 그녀의 볼이 말간 붉은색으로 물든다.
"솔직히 말해서 첫인상은 별로였어. 마냥 살갑게 달가오길래 가만히 있는 나를 괴롭히려는줄 알았지."
"…왜?"
"그야, 딱 봐도 나랑은사는 세계가 너무 달라 보였으니까.안 그래도 초라한 내가 더욱 초라해 보여서.
너와 만나기 전까지의 나는 친구도 뭣도 없었거든. 아니, 친구는커녕 그렇게 나긋나긋하게 다가와주는 사람조차 없었어."
옆에서 걷는 그녀의 얼굴을 무심결에 훑어본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는 적갈색 머리카락과 앙큼한 눈매를 강조하는 마스카라. 예전보다 살짝 더 창백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화려한 외모. 뭐가 됐건 초라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틱틱댔지. 부끄럽고 낯설어서. 나한테 그렇게 친근하게 대해주는 아이는 그동안 없었으니까."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정말인 걸. 왜, 그, 기억 안나? 이따만한 뱅뱅이 안경에─"
"안경?……뭔 소리야."
"…역시 기억못하는구나."
돌연 팔짱을 풀고 앞서나가는 그녀.
대리석으로 조각된 분수대 앞에 서서, 나를 돌아본다.
흐릿한 달빛이 소녀의 형상을 아름답게 빚어낸다.
"도착한 거야? 이제 가 봐도 되지?"
"시아야."
"…왜"
도망치고 싶다. 죄를 저지른 것은 내가 아니라 그녀인데도.
알지만 서도 도저히 저 눈동자를 직시할 자신이 없다.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녀인데도.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채 두 발을 땅바닥에 붙인다. 어느 새 입장된 역전. 그녀의 목소리가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아련하게 들려온다.
그녀가 무섭다. 왜냐면 이 하찮은 마음이 또 다시 그녀에게기댈까 봐. 깨지기 쉽상인 우정을 또 다시 그녀에게 품을까 봐.
이미 한 번 깨진 유리잔을 딱풀로 붙여봤자 금세 다시 깨질 뿐이다. 그러니까 자기부정, 의미 없더라도 자기부정. 어차피 깎아내릴 부분도 남아있지 않은 그녀를 깎아내리기 시작한다.
"너는 아마 부정할 테지만,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까, 정말로."
"하, 이제 와서 사랑고백이야?"
"응, 이제 와서.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이 말을 해보고 싶었어."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희미해 보이는 미소를 짓는다. 얕게 패인 보조개와, 눈물을 흘리진 않지만 촉촉하게 물들은 눈망울.
이제 와서 주인 잃은 개처럼 처량한 표정을 지어봤자 그저 역겨울 따름이다. 과거의 기억은 저주처럼 아무리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다. 네 손에 묻은 피의 양을 알고 있다. 네 손이 나에게 저지른 짓거리들을 알고 있다. 그러니 불쌍한 척일랑 그만해.
좆같은 이유로 헤어진 연인 같은 사이. 분명 그런 저주들을 쏟아내야 하는데, 어째선지 딱 달라붙은 두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입을벌려보지만, 매마른 성대는 그저 묵묵부답.
한참을 그러다가, 간신히 입을 열고 목소리를 쥐어짜낸다.
"너는─"
"경찰이다, 꼼짝 마!"
"어머, 벌써 경찰이 왔네? 마지막에는 그 도서관에 함께 가보고 싶었는데…아쉽다."
"뭐, 뭐야 이거?"
갑자기 튀어나온 경찰들이 우리 둘을 포위하듯이 둘러싼다. 한껏 당황한 내가 뭐라 소리치기도 전에 은색의 총구들이 섬뜩하게 빛나며 우리 둘을 겨눈다.
“상대는 21명을 죽인 살인귀다! 방심하지 마!”
"자, 잠깐만, 잠깐만요! 갑자기 이런 짓을!"
"움직이면 쏜다고 했지!"
"그만하세요!"
살인귀라는 단어에 번뜩 정신을 차린다.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어. 저 사람들이 분명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소리쳐보지만 거두어지지 않는 총구. 셀 수도 없는 수의 총구들이 전부 그녀의 머리를 노리고 있다.
분명 나는 그녀를 죽이려고 했었는데, 막상 그녀가 위협에 처하자 그녀의 추악한 이력과 함께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된다.이제 와서 잃어버렸던 우정을 되찾기라도 한 걸까. 여전히 그녀를 노리고 있는 경찰들에게 무의미한 악다구니를 쓰는 나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는 그녀.
이윽고 드러난 검은색 총신은 그녀 자신에게로 향해 있었다.
"있지, 시아야."
"너, 너 뭐하는 거야 지금!"
"시아는 착하니까. 아무리 내가 나쁜 녀석이라도, 눈앞에서 죽는다면…나를 영원히기억해줄 거지?"
"뭐…?"
"걱정 마. 슬픔은 오래 가지 않는 법이고, 다만 기억만이 길게 남을 뿐이니까."
"개 같은 소리하지 마!얼른 그 총 안 내려!?"
"…안녕. 나 없이도 행복하길 바래."
"기다─"
공원 한복판에서 용의자가 총을 꺼내들었음에도 무능한 경찰들은 들고 있던총을 그녀 쪽으로 조준만 할 뿐 아무런 조취도 취하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미처 마지막 말을 내뱉기도 전에,
-탕!
"아…"
영화처럼,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슬로우 모션 따위는 없었다.
그저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지고, 다음 순간 그녀의 작은 머리통에서 붉은 물이 분수처럼 콸콸 솟아오른다. 순식간에 하늘로 올라 잔비처럼 내려와이윽고 나를 적시고, 그 붉은 정경을 가만히 담고 있는 두 눈동자.
미미한 떨림도, 격렬한 요동도 없다. 그저 잔잔함 뿐. 아직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정신머리.
바닥에 고인 질척한 핏물이 내 신발창에 스며든다. 아직은 미묘하게 남아있는 그 온기에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자, 하얀 원피스 위로 알록달록 피어나 있는 붉은 자국들. 눈이 어지러울 만큼 선명한 붉음에 한순간 정신을 잃는다.
쇠냄새 같은 비린내가 비강을 간질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서있던 장소를 바라본다. 완전히 으깨진 두개골. 너덜거리는 살가죽이 퍼질러져 있고, 그 사이로 끈적한 하얀 뇌수가 질질 흘러나온다. 영 칠칠맞지 못한 모습.
"이게 뭔…야, 빨리 구급차 불러!"
"꺄아아아악!"
"으왁, 저게 뭐야!"
"학생, 괜찮아? 학생?"
당황한 경찰들이 고성을 내지르고,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들이 새된 비명을 내지르고, 모두가 정신이 없는데 오직 나와 그녀의 시체만이 분위기에 맞지 않는 고요함에 잠겨 있다.
어째선지, 그 모든 것이 나와는 관련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