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Something About Us
"너는 그 아이, 강선아가 살인자였다는 사실은 몰랐다고 했지."
"예."
"그럼 왜 그때 그 아이와 같이 있었던 거지?"
"그 아이가 나오라고 했으니까요."
"왜 그 아이의 부름에 응한 거니?"
"그야, 그 아이와 저는 같은 반이었으니까요."
"같은 반…? 혹시 평소에 학교를 다니면서 그 아이에게서 뭔가 수상한 낌새는 없었니?"
"자주 졸긴 하던데, 그것 말고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가…그럼 그 아이와는 무슨 관계였니?"
"…무슨 관계였냐구요?"
어떻게 대답할지를 고민하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 느릿하게 입술을 뗀다.
"친구, 였다고 생각해요."
=
"시아야, 정말로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피곤하니까. 나 먼저 잘게."
"잠─"
걱정 어린 언니의 물음을 뒤로 한 채 문을 쾅 닫는다. 그러자 끊기는 목소리. 못된 짓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만큼 피곤하다. 아직도 얼굴을 덮고 있는 피비린내 따위는 어찌 되어도 좋을 정도로.
침대까지 기어갈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문짝에 등을 기댄 그대로 스르르 무너진다. 그러자 엉덩이를 감싸안는 차가운 냉기. 그러나 흐릿한 정신을 일깨우지는 못하고, 꼭 술에 절은 듯 전신이 나른하게 늘어진다.
그저 멍하니 맞은편에 있는 창가를 바라본다. 대체 몇 시간이나 조사를 받은 건지, 하늘 높이 떠있던 달도 슬슬 저물어갈 무렵. 돌연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근처를기웃거리는 길고양이가 내는 소리겠지.
그 울음소리가 트리거라도 된 듯 시리도록 붉게 염색된 순백의 원피스가 별안간에 떠오른다. 사방에 낭자한 핏자국과 아스팔트 바닥 위로 힘없이 드러눕는 시체. 불과 몇 시간 전에 보았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 보통이라면 이쯤에서 구역질이 올라올 법도 한데……이상하게 평온한 위장.
'…안녕. 나 없이도 행복하길 바래.'
"우욱…!"
마지막 유언이 행복하라라니, 그거 참 어려운 주문이네. 목구멍 안에 검지와 중지를 쑤셔 넣고 억지로라도 역겨움을 가장해 본다. 그러나 여전히 잠잠한 위장. 내가 정말 이상해진 건가.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너무 무덤덤해진 것같다. 고통도 계속되면 그게 고통인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대충 같은 맥락.
‘시아는 착하니까. 아무리 내가 나쁜 녀석이라도, 눈앞에서 죽는다면…나를 영원히 기억해줄 거지?’
그녀의 마지막 대사가 떠오른다. 나는 착한 인간도 뭣도 아닌데,너는 자신을 영원히 기억해달라고 했지.
정말 잊지 못할 기억이야. 그게 너의 마지막 선물이라니, 그러고도 나보고 행복하라는 저주를 걸다니. 이미 싸늘하게 변한 그녀의 주검을 불태워버리고 싶다. 그 가슴의 살점을 쥐어뜯고 심장을 파헤치고 싶다. 그 예쁜 눈알을 도려내고 싶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꼭껴안아보고 싶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역겹지. 지긋지긋한 회상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싶다. 고요한데 혼란스러운 정신의 스위치를 꺼버리고 싶다. 침대까지 가서 눕고 싶은데 딱히 푹신한 매트리스 위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 피곤하지만 졸리지는 않는다. 말똥말똥한 두눈. 그냥 그 자리에서 두 눈을 감는다. 그러나 주인의 의지에 배반해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생각들. 파노라마처럼 좌르륵 펼쳐지는 요 며칠 사이의 일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조금씩 현실감이 비현실감으로 덧씌워져 간다.
모두 미쳐 돌아가고 있다. 마치 꿈처럼.
"꿈…"
내가 또 약을 했나. 이사카가 준 마른 버섯이 남아있을 지도 모르는 주머니 속을 뒤적거리다가, 무심코 중얼거리고 만 입술을 손가락으로 덧쓴다. 갑자기 우스운발상이 떠올라서 빙긋 입꼬리를 감아올린다. 이게 만화였더라면 전구 표시가 내 머리 위로 반짝하고 떠올랐을 상황.
어쩌면 이건 전부 꿈이고, 나는 자면서 그 게임을 되풀이하고 있는 중일 지도 몰라. 등장인물이 또라이밖에 없는 것은 내 저열한 머리의 왜곡이거나, 뭣 같은 시퀄이라도 나왔나 보지.
그래, 꿈. 아하하, 팽이가 빙빙 돌아가네. 우습지도 않은 농담따먹기에 소리 내어 웃는다. 웃기기는커녕 불쾌하기 그지없는데 있는 힘껏 유쾌함을 가장한다.
정말로 이 모든 것이 꿈이었더라면,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웃어넘길 수가 있을까.
"…"
그저 재미없는 발상이라고 여겼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마냥 이상할 것도 없다. 어쩌면 틀린 것은 내 근본 전제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중요한 무언가가 어긋났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대체 왜이 뭣 같은 세계를 현실이라여기고 있던 거지?같잖지도 않은 3류 로맨스 게임을 배경으로한 세계? 하루아침에 생판 모르는 여자가 된 자신? 그런 건 망상중독자의 뇌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잖아.
곰곰이 돌이켜보면 현실에 있을 리 없는 것들 투성이다. 스무 명을 넘게 학살한 연쇄살인범이 대낮에 당당히 거리를 활보하고, 정신 나간 마약중독자 백인 유학생이 학교에서 총질을 한다. 친언니라는 작자는 몇 년 동안 내 도촬영상을 반찬 삼아 자위행위를 하고 있었다.
누가 짜기라도 한 듯 내주변에는 죄다 정신 나간 인간들 뿐, 아마 시나리오 작가부터 이딴 게임을 정발한 수입사까지 죄다 맛이 가버린 게 아닐까.
아침드라마에도 안 쓸 막장 설정에 쓰레기 각본인데, 이런 게 현실일 리가 없잖은가.
그래, 현실일 리가 없다.
"…"
나는 분명 '게임은 현실과 다르다'고 했었지. 그렇게 잘난 듯 지껄이던 과거의 내 머리통을 세게 후려갈기고 싶다. 그야 이딴 게 현실일 리가 없으니까.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게 현실이라도, 이루어지는 일과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따로 있는 법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해가 서쪽에서 뜰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렇게 이어지는 사고에 반론이라도 하려는 듯 나대신 차에 치인 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보다도 한층 작은 몸, 꺾여서는 안 될 각도로 꺾인 왼팔과 점점 생기가 사라져가는 표정.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제 목숨까지 무릅쓰고 희생한 아름다운 모습. 내가 이곳이 또 하나의 현실임을 깨닫게 된 계기.
허나 이제는 그마저도 의심이 간다.그것을 과연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20년 전 나온 고어무비를 봐도 언뜻 봐서는 가짜인지 모를 정도로 분장을 잘 해놨던데, 4D 아이맥스 시대를 사는 내 상상력이 과연 그보다 못할까.
그러니까 꿈이다. 나는 단순히 기나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이 꿈에서 깨어나 다시 일어나면 익숙한 방 풍경과 남자인 내 몸이있는 거야. 그리고 진짜 가족도.
그래, 가족. 근친상간 따위를 꿈꾸는 언니나 평소에 얼굴을 잘 비추지도 않는 엄마가 아니라, 저곳에 두고 온 가족들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자상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틈만 나면 틱틱대지만 사이가 썩 나쁘지 않은 여동생. 어린 아이가 그린 듯 전형적인 우리 가족. 미련을 버리려 잊고자 했지만, 차마 지워 내릴 수 없었던 그 사람들.
보고싶다. 그 동안 애써 외면했던 그 사람들이 미칠 듯이 보고 싶다. 미어터지려는 가슴을 으스러질 듯이 움켜쥔다. 이 부드러운 감촉조차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예리한 고통이 심장 언저리에 눌러 앉지만, 사소한 고통 따위는 이 꿈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지긋지긋한 꿈에서 깰 수 있는 걸까.
"…"
쾅, 벽에다 머리를 한 차례세게 찧고,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이 가벼워진 몸을 일으켜 세운다.
방을 집어삼킨 어둠이 내 등을 떠밀고, 나는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