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에필로그
"오빠, 저기, 저기 봐봐! 작년에 고작 5000개만 물량이 풀린 쁘리빠라 아이돌타임 마이크를 한정 판매중이야!"
"쁘리…뭐?"
"빨리 사올 테니까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 돼? 괜히 움직였다가 미아 되면 안 돼?"
"미아는 내가 아니라 네가 될 것 같은데…"
중얼대듯이 군말을 덧붙여 보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빨리 장난감 가게를 향해 달려 나가는 작은 소녀.간신히 목덜미를 덮을 정도의 단발머리가 바람결에살랑거린다.
그 작은 등을 지켜보며 형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허나 사뭇 곤란하다는제스처를 취하면서도그의 입가에 걸려있는 것은 기분 좋은 미소. 사실 지금의 그는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샘솟는 행복감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야 한때는 꿈에서나 볼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광경이, 어엿한 현실이 되어서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수술이 성공해서 정말 다행이야."
의학의 발달로 10명중 7명은 완치가 가능해진 게 암 수술이라지만, 그것이 말기에 가까운 수준이고, 환자가 초등학생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실제로 의사도 일찌감치 포기하기를 권유했던 수술.
하지만 형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그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수술은 무사히 성공했다. 그 결과로서 있는 것이 지금의 건강한 여동생.
'오빠…나, 이제 약 안 먹어두 되는 거야?'
'응'
'…집에도, 집에도 언제든지 갈 수 있고?'
'응'
'나…이제 군인아저씨처럼 머리 안 잘라도 되는 거야?'
'응'
걱정과 우려 속에서 수술이 끝난 그 날, 작은 병실에 온가족이 모여 동생의 완치를 축하했더랬지. 그리고 그날부터 형곤은 동생의 진정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걱정하는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쥐어짜낸 웃음이 아닌, 진짜 감정에서 우러나온 진실 된 웃음을 말이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활발한 동생도 수술이 끝난 직후에는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몇 달의 재활을 통해 옛말이 된지 오래. 요즘 들어 거침없이 바깥을 쏘다니는 모습을 보면 웬만한 남자애보다 더 활발해 보일 지경이다.
게다가 동생이 퇴원하면서 무거운 병원비에 허덕이던 가계 사정도 꽤나 나아진 지금, 형곤으로서는 불평할 게 무엇 하나 없었다.
'신입생 대표, 이시아.'
'뭐…잠깐 정도라면 어울려도 나쁘지 않잖아? 공 줘봐.'
'아 씨바! 봇라인 병쉰생퀴들! 시발새끼들이 발로 게임을 하나!'
'잘 가. 언제 한번 또 만나서 롤이나 몇 판 때리자.'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이기적인 건지. 행복의 절정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와중에도 이따금씩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고는한다. 긴 생머리에, 교복을 가지런히 차려입은 풋풋한 소녀.
제 손으로 떠나보냈던 존재. 처음에는 이게 사랑인가 싶어 알쏭달쏭 했지만, 돌이켜보면 사랑해 마지않았던 여자.
흔히들 첫사랑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하던가. 비록 협박을 받긴 했지만 그 실패를 두고 남의 탓을 할 생각은 없다.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지레 겁먹고 놓아버린 사람이니까. 그러나 머리와 가슴은 언제나 따로 놀아서, 떠오르는 그림을 지우고 지워도 지우개똥 같은 미련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래, 이따금씩 찾아와서 머리를 괴롭히는 충동. 만약 그때, 자신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녀의 뒤를 쫓았더라면──
"…아니, 이미 지난 일이야. 괜한 생각은 하지말자."
무슨 이유에서건 그녀를 포기한 저가 이제 와서 그녀를 쫓을 수 없다는 건, 이미 몇 번이고 재확인한 사실. 애당초 지금 이상의 행복을 바라지도 않는다. 왜냐면 그건 지나친 욕심이니까.
그래도 우연찮게 지나가다 마주치면 안부 정도는 묻고 싶은데──그때 원하던 물건을 샀는지 형곤을 향해 번쩍 팔을 쳐드는 여동생. 형곤 또한 그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감아올렸다.
어찌 됐건 간에, 그는 지금 이 순간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
건물의 대부분을 이루는 상아빛의 대리석과, 푸르게 도색된 첨탑. 정문 양쪽에 놓인 사자 조각상은 방문자에게 위압감을 선사하고, 건물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는 철제 울타리는 숲과 저택의 경계를 단단하게 구분 짓고 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이름앞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사람이 살고 있을 법한 대저택. 그중 아리땁게 가꿔진 정원의 한구석, 아담한 벤치에 이사카 파울 하이드리히는 앉아 있었다.
"…"
침묵 속에서 물줄기가 졸졸 흐르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진다. 이자나는 나른하게 턱을 괸 채로 눈앞의 분수를 지켜보았다. 딱히 용무도 없고, 그냥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중.
원래대로라면 영화를 보든 약을 빨든 좀 더 생산적인 활동을 했을 테지만, 오랜만에 고국으로 돌아와서일까. 어째선지 아무런 의욕이 샘솟지 않는다. 한때는 중독 수준으로 빠져 있던 약물조차 지금은 당기지 않는다. 코카…코카…코카콜라? 우웅, 그게 뭐에요?
"하아…"
되도 않는 염병이니, 이런 게 바로 소박맞은 여자의 청승이라는 건가. 무겁게 가라앉는 한숨을 익숙하게 내뱉는다. 고작 3일짜리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 붙이게 된 버릇.
아련하게 퍼진 숨결 위로 어느 한 소녀의 모습이 두둥실 떠오른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 한편에서 원망이 솟아오르고, 또 반대편에서는 그리움이 솟아오른다. 마음 한구석을 차지한 채 도통 빈자리를 내놓지 않는 그 가증스러운 여자. 분명 건물주는 자신이건만, 어째선지 입장이 역전된 듯 저 혼자 안달복달 못하고 있다.
로미오에게 차인 줄리엣도 아니고 이게 뭐람. 설마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이런 멍청한 꼬락서니를 할 줄이야. 이자나는 조소를 머금었다. 겨우 사랑 하나에 이렇게 얽매이는 자신이 새로운 한편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영차"
내뱉지 않아도 되는 기합을 내뱉으며 벤치에서 일어난 다음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훌훌 털어낸다. 다소 귀족 영애답지 못한 행동. 아직도 의식 수준이 중세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어머니가 보셨다면 기겁하며 호통을 치셨을 광경이지만, 그러나 쓸데없이 무거워진 감정을 날려버리기에는 이 정도 천박함이 좋다. 일어난 김에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의 끝 부분도 정리한다.
허나 그러고도 지워지지 않는 옛 연인의 환상. 익숙하게──아니 조금 힘들게 그것에서 시선을 돌린다. 생애 처음으로 겪어보는 이별에 아직도 허덕이는 중.
그러나 아직까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이 불씨도 결국 언젠가는 꺼지겠지. 사랑이란 원래 다 그런 법이니까. 사람이란 원래 다 그런 법이니까.
적어도 나쁜 이별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그거 하나만을 위안 삼으면서,이자나는 하이힐에 감싸인 발을 뗐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이사카"
정원을 떠나려는 이자나를 붙잡는 목소리. 성대에 허니버터를 치덕치덕 바른 듯 끈적하고 굵직한 목소리.
이걸 듣는 게 얼마만이더라. 막상 그 동안 찾지도 않았으면서 새삼 찾아오는 감회. 분명 익숙해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낯설어진 그 목소리에 이자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라울…오랜만이네요. 몸은 괜찮아요?"
"응, 퇴원한지 오래야. 그보다 벌써 떠나려는거야? 잠시 앉지 그래?"
"…예"
햇볕을 받아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을 멋드러지게 쓸어 넘기면서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는 남자.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리즈 시절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울고 갈 약혼자의 얼굴에, 잠시 고민하던 이자나는 천천히 고개를주억거렸다.
얼굴만 잘생긴 쓰레기. 약혼자가 있는 주제에 심심할 때마다 사귀는 여자를 갈아치우는 남자이지만, 지금은 옆에 누가 있건 아무래도 좋은 기분이었다.
"나 없이 한국에 갔다 왔다고 들었어. 별 일은 없었지?"
"예…뭐."
"즐거운 일은 없었어?"
"…딱히요."
평소에는 약혼자고 뭐고 서로 신경 쓰지 말자던 양반이 갑자기 무슨 속셈일까. 이자나는 살짝 눈을 치떴다. 하지만 남자의 비취색 눈은 그런 이자나를 어디까지나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이자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새빨개진 양 뺨은 미처 숨기지 못해서, 남자는 그것을 보고서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왜 갑자기 친근한 척이에요?"
"약혼자로서 이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뭐, 사실은 말이지…"
그렇게 말끝을 흐리면서 남자는 슬쩍이자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히자 이자나의 몸은 빳빳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너와 내가 타고 있던 차량이 전복된 그날, 경호원도 다 기절해있는 와중에 너만이 깨어나서 주변에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다지? 게다가 내가 입원할 때까지 계속 함께 있어주기도 했다고 들었어."
"그, 그걸 어떻게?"
"그야 뉴스에도 보도됐으니까…네 얼굴은 모자이크로 처리되어 있었지만."
"그 망할 BBC…국장실에 폭탄이라도 두고 올까."
"하하, 너무 살벌한 말은 하지마. 그리고 독일의 국영방송국은 BBC가 아니라 ARD야."
"저도 알거든요! 얼른 이거나 떼요!"
끙끙대며 남자의 굵은 팔을 떼어내 보지만 힘자랑이라도 하는 건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결국 갇힌 채로 이자나는 남자를 매섭게 흘겨보았지만, 남자의 입가에 걸린 뻔뻔스런 웃음은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았다.
"아무튼 그 뉴스를 뒤늦게나마 접하고 깨달은 거야. 그 동안 너는 날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는데……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는 건 아닐 뿐이지. 딱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하지만, 나는 영락없이 네가 나를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어. 그래서 지금껏 너를 쌀쌀맞게 대한 거야. 그 점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정말로, 미안해."
거짓 사과는 아니라는 듯이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남자. 이자나는 오늘만 해도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동안 마냥 파렴치한이라고만 생각했던 남자에게서 사과를 받으려니,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됐으니까 고개 들어요. 낯부끄럽네요."
"응, 고마워."
"할 말은 이걸로 끝이죠?"
"아니, 아직이야. 너만 괜찮다면 나는 우리의 약혼 관계를 정상적인 것으로 되돌리고 싶은데…너는 어떻게 생각해?"
"흐응…그 말은 즉, 더 이상 바람 따위는피우지 않겠다고?"
"맞아."
흐응? 저도 모르게 콧소리를 낸 이자나는 눈가를 샐쭉하게 휘며 남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진지한 녹빛 눈동자에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툭하면 주인의 손을 물던 버릇없는 반려견이 훈련소에 갖다오면서 순해진 걸 보는 기분. 기특하니이대로 용서해 줄까나──라는 기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그러기에는 너무 괘씸하다. 이제 와서 개과천선했건 뭐건, 몇 년간 이 남자가 자신의 속을 썩여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이자나는 남자에게 보이지 않도록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저로 괜찮으신 건가요?"
"응, 이사카로 좋아."
"그런데 이걸 어쩌죠. 바람은 제가 피게 생겼는걸요."
"…응?"
"실은 말이죠. 당신 없이 여행을 떠난 그 나라에서, 저, 그만 운명적인 사랑과 마주하고 말았어요."
"뭐…뭣!? 그게 정말이야?"
능청스레 그리 말하자 한껏 당황하는 남자의 모습에 이자나는 황급히 허벅지살을 꼬집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예, 물론…뭐, 금세 차이고 말았지만요."
"아…"
"하아…서민 주제에 엘레강스 오브 엘레강스, 뷰티 오브 뷰티, 엑스터시 오브 엑스터시인 저를 차다니, 정말로 건방진 여자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게…잠깐, 여자?"
그래, 여자. 왕자님과의로맨스를 꿈꾸던 소녀의 첫사랑이 같은 성별의 소녀라니 그거 참 우습지. 이용만 당한 끝에 비참하게 차인 말로를 생각하면 더더욱 우습다.
이번에도 웃음을 참으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새어나왔나 보다. 마치 본인이 슬픈 일을 당한 것 같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무는 남자.
아아, 보기 싫은 얼굴. 얼굴만은 세상에서 제일 잘나신 왕자님도 이렇게 울상이니 별 볼 일 없어 보이네. 이자나는 길쭉한 검지로 그런 남자의 입꼬리를 살살 문질렀다. 그러자 간지러움을 참을수 없던 건지 남자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아무튼 이제 사랑을 주는 것에는 질렸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당신이 제게 사랑을 주세요. 이 세상 무엇보다 열렬한 사랑을 제게 갖다 바쳐주세요.
다른 여자한테 눈 안 돌리고 꾸준히 그러다 보면……뭐, 저도 언젠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날이 올 지도."
"뭐야 그게."
이내 피식 웃는 남자. 이자나역시 혀끝에 감도는 쓴맛을 어렵사리 떨쳐낸 뒤, 장난스런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왜요, 아까는 좋다더니, 다시 싫어졌어요?"
"설마, 오히려 더 좋아졌어."
=
[최근 세간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던 연쇄 살인 사건, 경찰이 임시로 'X'라는 이름을 붙였었죠. 문자 그대로 지금껏 미지수였던 진범의 정체가 어젯밤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 범인의 정체가 현재는 살해당한 경찰청장의 딸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할 사실인데요. 이에 대해서 서울경찰청의 김용구 치안정감이 오늘 저녁 기자회견을열어…]
"뭐해? 빨리 와서 아침 먹어."
"아, 응."
언니의 호출에 군말 없이 TV를 끄고 주방으로 향한다. 식탁 앞에 착석하자 시선을 사로잡는 가지각색의 진수성찬들. 평범한 가정의 아침식사라기에는 너무 호화로운 식탁에 맞은편에 앉은 언니를 멍하니 바라본다.
"고맙긴 한데, 아침부터 이렇게 공들일 필요가 있어?"
"후후, 퇴원 기념이야."
아무리 그래도 아침부터 너무 무거운 게 아닐까 싶지만, 굳이 딴지를 걸어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가라앉힐 필요는 없겠지. 그냥 입에 지퍼를 걸어 잠근 뒤 젓가락을 든다. 제일 처음 집어 드는 반찬은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조기구이.
"엄마는?"
"먼저 출근하셨어. 그나저나 우리, 정말오랜만에 같이 등교하네."
"나는 그냥 등교 자체가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은데."
말을 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등교가 대체 언제였더라. 씹고 있던 생선살을 목구멍 너머로 넘기고 흐릿한 머릿속의 실타래를 더듬어 보지만, 그 동안 워낙 많은 일들이 있어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이사카가 학교에서 총을 쏘고, 떡도 치고, 납치도 당하고……최대한 적게 잡아도 벌써 한 달이나 지났네.
일단 생기부를 조진 건 확실하고, 모르는 사이에 유급이라도 당했으면 어떡하지. 고개를 아래로 떨궈 깍듯하게 차려입은 교복을 내려다보자 바라보자 찾아오는 우울감. 최근 총과 섹스와 담배 따위의 자극적인 것들이 계속되다 보니 그만 자신이 학생이라는 사실도 잊고 살았었다. 나는 전생에 뭔 죄를 저질렀기에 이 개 같은 삼년을 두 번이나 반복하는 걸까.
"…이제 수시로는 대학 못 가겠네."
"아, 그거라면 내가 알아서 병결 처리해뒀어?"
"하? 무슨 수로?"
"음…비밀?"
"…그래."
검지로 입술을 꾹 누르면서 꼭 사랑스러운악동 같은 미소를 짓는 언니. 귀엽긴 하지만 그 나이에 그러면 자괴감 들지 않아?
무심결에 흘러나올 뻔한 물음을 간신히 틀어막는다. 만약 이 말을 곧이곧대로 내뱉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아침부터 눈에 쌍심지를 켜가며 대판 싸우지 않았을까.
결국 끝까지 가면 지는(져주는) 것은 언니일 테지만, 새삼스럽게 따지고 싶지도 않다. 언니가 음흉한 인간이라는 사실에도 이제는 익숙해졌으니까. 그저 묵묵히 식사를 계속한다.
“쿼터파운더 치즈라고 알아? 맥도날드에 있는 햄버거.”
“쿼파치? 아는데, 갑자기 그게 왜?”
“그걸 프랑스 맥도날드에서는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뭐라고 부르는데?”
“로열 위드 치즈."
"…?"
“아니, 그, 프랑스는 우리랑 똑같이 미터법을 쓰잖아.”
“…”
“…관두자.”
그렇게 시덥잖은 담소를 나누면서 식사를 마치고, 산더미 같은 설거지도 해치우고, 언니와 함께 집을 나선다.
"아─"
현관문을 밀자 눈부신 햇살이 얼굴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아침을 알리는 참새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동시에 아직 덜 깬 몸을 쓰다듬는 기분 좋은 바람은 옘병 빨치산 마냥 옷가지의 온갖 틈새로 침투해 들어오는 차디찬 바람. 감성이고 뭣도 없이 몸을 부르르 떤다.
"갑자기 왜 이렇게 추운 거야?"
"이번 주는 내내 이렇다는데?"
"젠장"
"앗, 이제 나쁜 말하지 않기로 했잖아!"
"시발니미럴육시럴지랄존나뻑뻑뻑뻑마더뻑─"
"에잇"
"악!"
눈 깜짝할 새에 얻어맞은 입가를 부여잡고 언니를 노려본다. 그러나 이미 먼 발치에서 앞서 걸어가고 있는 언니. 한숨과 함께 그 뒤를 쫓는다.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야."
"그래?"
"정말로"
신발창에 즈려밟히면서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는 잎사귀와 군데군데 떼가 낀 보도블럭. 가드레일 바로 옆에서는 차들이 쌩쌩 쏘다니고 있고, 인도에는 나와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한 방향으로 걷고 있다. 정말, 정말 오랜만에 다니는 등교길.
문득 이 길을 처음 갔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유아하게 흐드러진 벚꽃들과 상쾌하게 내 등을 떠밀었던 봄의 바람. 그러나 지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그것들.그 빈 자리를 꿰찬, 앙상하게 메마른 나뭇가지와 뼛속까지 스며드는 싸한 냉기.
계절이 바뀌고, 풍경이 바뀌고, 나 또한 바뀌었다. 그것도 조금 극단적으로.
사라진 사람들과 남은 사람들. 즐거운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면 거짓말. 그러나 막상 돌이켜보면 후회만 잔뜩 남는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조금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늘상 갖게 되는 감정.
"언니"
"응?"
걸음을 멈추고, 언니를 부른다. 때마침 눈앞에서 떨어지는 갈색의 나뭇잎. 죽어가는 환자의 팔뚝처럼 말라 비틀어져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꼭 나쁘게 볼 필요가 있을까. 비참하더라도, 그게 우리네 인생인 것을.
갑자기 철학에 대해서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사소한 위안 하나를 스스로에게 건네 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이 정도면 엉성한 나치고는 제법 좋은 결과가 아닌가─하고, 어디까지나 속으로만.
"이쪽으로, 와줘."
"왜?"
"그냥"
사실은 말이지. 사실은, 아직도 이 세계가 현실이라는 것을 나는 못 믿겠어. 이성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물론 이것 또한 현실이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원래 인간의 머릿속에서 의심을 거세할 수는 없는 법이잖아. 예수 그리스도조차 의심 때문에 죽었는데.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언니만 곁에 있어주면 이제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언니가 곁에 있어주면, 나는 행복해지고, 꿈에서라도 행복하다면 그걸로 족한 거겠지. 그리고 그것이 깰 수 없는 꿈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즉, 그러니까, 꼭 모든 사람이 빨간 약을 먹고 각성할 필요는 없는 법이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한순간 떠오른 모든 생각들을 말로 하려다가, 이내 관둔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대신 앞을 향해 무심하게 툭 내미는 손.
"…손, 잡아줘."
언니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
.
.
THANK YOU FOR PLAYING...
PRESENTED BY
ULREZA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