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경에 이른 거북이 승상은 이 사태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오을은 성난 눈으로 이장수를 노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청난…… 부적…… 술…… 이로다…….”
태자는 서서히 뒤로 나자빠지면서 ‘피바다’에 드러눕게 되었다. 주위에 있던 용족 고수들이 우르르 달려들면서 무대는 더할 나위 없이 혼잡해졌다.
“…….”
용족 형제의 연기는 정말 형편없군. 기껏해야 어린애 수준이야.
옆에선, 문파 진선들이 달려와 이장수를 뒤로 보호했다.
오을이 쓰러지면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이장수는 수많은 용궁 고수의 눈빛이 자신에게 향하는 걸 느꼈다. 적의가 점점 더 거세졌다.
용궁 태자의 아리송한 행동을 어느 정도 짚은 이장수는 속히 대책을 고민하였다.
태자의 연기는 비록 가짜였다고는 하나 어쨌든 신분이라는 게 있으니 용궁이 이를 빌미로 일을 벌인다면 당연히 좋은 일이 아닐 터.
주구는 이장수 앞에 서서 작은 키로 이장수의 몸 절반을 가려주면서 조용히 물었다.
“장수 사질, 다쳤어?”
“기식이 흔들린 것이니 다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태자 전하의 주먹이 너무 강해서 그렇지, 다친 곳은 없습니다.”
이장수는 대꾸하는 사이 대책이 떠올랐다. 그는 약간의 근심과 송구스러움을 담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태자 전하의 부상이 어떠한지를 모르겠군요. 제 부적술로는 아마 갑옷을 망가뜨리진 못했을 겁니다. 혹 제자가 계속 신법으로 피하고 정면 대결할 용기가 없어진 터라 전하께서 순간 마음이 다급해져 법력이 어긋난 걸까요? 사숙, 가서 대신 진찰해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용궁의 의술이 어떠한지, 병증을 판단해낼 수 있을지를 모르겠습니다.”
주구는 순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용궁에 고수가 구름 같이 많은데, 그 정도를 어찌 판단해내지 못할까? 쓸데없이 마음 쓰지 말거라!”
그 말에 용궁의 여러 장군의 시선이 오을에게 떨어졌다. 제일 먼저 오을을 부축한 거북이 승상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전하는 무탈하십니다. 순간 법력을 운행하는데 편차가 생기면서 법력이 갑옷에 충격을 줬군요. 현재 전하께선 본인의 법력에 혼절하신 것뿐이니 금세 깨어나실 겁니다…….”
은빛 갑옷을 입은 용궁 장군이 곧바로 물었다.
“승상, 그럼 이번 시합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거북이 승상은 잠깐 망설이다가 경계선과 의식을 잃은 오을을 번갈아 보았다.
이번에는 이장수가 계속 마음을 쓸 필요가 없었다.
도선문 진선 하나가 옆에서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당연히 태자 전하가 이겼지요. 사질이 경계선 밖으로 나간 후 태자 전하께서 법력 충격으로 경상을 입으셨으니 결과는 명백하지 않소. 내게 도선문만의 비법으로 조절한 단약이 있습니다. 평범한 단약은 용궁의 눈에 차지 않겠지만, 그래도 도선문의 성의이니 받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거북이 승상은 용궁 장군에게 단약을 받으라고 눈짓을 보내면서 ‘판결을 내렸다.’
거북이 승상은 곧바로 이무기 병사들을 불러 기절한 태자 오을을 보옥 의자에 앉혀 들고 퇴장토록 했다.
도선문의 선인들도 각자 공수하고, 이장수를 보호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걸어가면서 이장수는 작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주구에게 말했다.
“사숙, 고서에서 봤는데, 탁자 위에 있는 포도는 기공을 수련하면서 호흡이 결리는 상황에 좋다고 합니다.”
“용궁에서 준 포도가 아니냐. 저들이 모를 리가 있겠어?”
주구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너 말이야, 스스로 경계 밖으로 왜 뛰어나간 거야? 조금 더 서 있었으면 이겼을 수도 있었잖아!”
이장수는 멋쩍게 웃었다.
“그땐 버티지 못할 상태였습니다.”
주구는 매우 불만이라는 듯이 이장수에게 순식간에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돌아가면 네가 수행에 전념하는지 감시해야겠다. 수련의 경지는 올리지 않고 매일 단약을 정제하고 진법을 고심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 정말이지, 수련의 경지가 깨달음을 얻는 기본이다! 경지가 낮으면, 앞으로 대단한 법보가 네 손에 뚝 떨어진 대도 법보의 위력을 절반도 발휘하지 못한단 말이다!”
“예, 잘못했습니다.”
이장수는 그리 대답하면서도 마음은 오히려 한결 편안해졌다.
제게 집중되어있던 눈빛들이 빠르게 흩어지고 있다는 게 뚜렷하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맞은편에서 유금현아가 대검을 멘 채 다가왔다. 사뭇 다급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장수 사형, 다친 곳은 없습니까?”
“괜찮다. 그저 기식이 떨린 것뿐이야.”
이장수는 무안해하며 대답했다.
“사매와 동문들을 걱정시켰군. 미천한 실력으로 선문의 체면을 깎아버렸어.”
한 사형이 곧바로 전음으로 말했다.
“용궁 태자는 문제를 일으키려고 일부러 장수 사제를 고른 게 분명해! 이따가 사제도 잘 보아라. 내 반드시 용의 아들이건 손자건 본때를 보여줄 것이다!”
이장수는 순간 사형에게 감격한 눈빛을 던졌다.
“장수 사형, 서 있지 말고 일단 앉아서 숨 좀 고르세요.”
“용궁은 진짜 너무하네. 그 태자는 더 비열하고 말이야.”
주구가 말했다.
“모두 착석하고, 불평은 그만하라! 저기 천선들이 머리꼭지에서 보고 계신다!”
제자들은 꾸지람을 받고도 여전히 이장수를 위해 불평을 털어놓았다가 다른 도선문 진선들에게 또 혼쭐이 났다.
사실 동문들의 반응은…….
매우 정상이었다.
이는 집단의 명예가 얼마나 높냐와 상관이 있고, 개인과는 그다지 큰 관련이 없었다.
자리로 돌아온 이장수는 파동하는 기식을 재빨리 평온한 상태로 회복시켰다. 유금현아는 한참 머뭇거리면서 그의 곁에서 벗어났다.
뒤이어 유금현아의 아리따운 얼굴은 ‘애정과 관심’이 걷히고, 점점 차가워졌다.
도선문 당대 제자 서열 1위의 두 눈에 노기가 일기 시작했다.
그녀는 대검을 등에서 풀어내 앉은뱅이책상 위에 올리고, 검지로 검신의 각 부분을 가리켰다. 결청련개천보인(結靑蓮開天寶印), 대검 위에 화염 문양이 나타나고, 서서히 가늘고 긴 비검들로 어우러졌다…….
도선문의 차세대 제자가 모인 구역은 느닷없이 기온이 약간 낮아졌다.
그녀는 단약 두 병을 꺼내 살펴보곤 법력을 빠르게 회복하는 단약을 충분히 준비했음을 확인했다.
이어서 손수건을 꺼내 침착하게 비검들을 닦았다. 차가운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었으나 눈빛은 약간…….
섬뜩하였다.
“유금 사매.”
이장수의 목소리가 전음으로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유금현아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따가 나선다면 조금만 자제하라. 이곳은 용궁이고, 그들과 첨예하게 맞설 것까진 없어.”
유금현아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 누굴 잡아 제대로 족칠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어쩌면, 그녀는 이 순간 입술을 말고 있거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둘 다 동시에 할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과 눈빛은 이장수에게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건 분명했다.
이장수와 유금현아 사이에 있는 도선문 제자 셋은 처음으로 유금현아가 이러한 표정을 드러내는 걸 보고 저마다 의아해했다. 또 왠지 모르게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방해꾼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유금현아는 계속해서 비검을 꼼꼼히 닦았다. 이러한 모습을 보니 이장수의 전음으로 인해 생각이 크게 바뀌지는 않은 듯싶다.
이장수는 차라리 더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무언가 관여할 수 없기도 했고.
그는 풍어 주문을 펼쳤다. 이번에는 의론하는 소리로 ‘공연 후 관객들의 실시간 피드백’을 듣기 위함이었다.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담화를 나누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귀에 들어왔다.
퍽 소란스러웠다…….
“도선문 제자도 제법이긴 한데, 용궁 태자가 너무 조바심을 내서 실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했어.”
“조금 전에 거북이 승상이 하는 말 못 들었어? 태자는 열 살밖에 되지 않아서 패기가 넘치는 것도 당연하지, 뭐.”
“내가 올라갔으면 태자를 이길 수 있을 텐데, 안타깝게 도선문 제자가 경계선을 밟아버렸으니…….”
자세히 분석하면서 이장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때, 도선문의 우수한 제자라는 그의 인상은 입체적이고 풍족했으며 조금의 흠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문파 내 서열 10위를 다투는 이들과 나란히 앉아있을 때, 다음 대결이 이어지는 터라 주위에 있는 이들은 이장수의 몸에서 어떠한 빛을 보지 못했으니 계속 관심을 주지도 않았다.
거북이 승상은 조금 전 겨루기는 용궁 태자가 승리했다고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하지만 용궁 태자는 성정이 조급하여 기식이 엇나가면서 내상을 입었고, 현재 용궁으로 돌아가 몸조리를 해야 하니 뒤에 이어지는 축수 행사는 자연히 취소되었다.
작은 풍파는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이장수도 이번 기이한 사건에서 홍황의 무상함, 용심(龍心)의 복잡함을 보고, 자신이 너무 어려서 인간의 마음과 용의 성정을 낮게 평가하고, 빈틈없이 계획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린 용이 무슨 꿍꿍이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을은 이토록 제멋대로 굴다니. 혹 일부러 내 손에 패할 생각이었던가?
다행히 미리 경계선을 넘어 패배를 인정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상황이 얼마나 엉망이 되었을지 알 수 없었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을 만난다면 자신에게 주먹을 휘둘러 중상을 입고 퇴장해야겠다.
조금 전 상황을 돌이켜보니 평온하면서 황당한 대결 같았다.
주먹이 서로 맞붙던 순간…….
두 사람 다 뒤에 약간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두 사람의 뒤로 사기꾼의 기운이 검은 인영처럼 떠올라 차가운 눈으로 서로를 주시하는 것 같았다.
‘내 앞에서 연기했냐?’
‘피차일반이다.’
더 생각할 것 없이 어린 용은 다른 속셈이 있었을 것이다.
무사히 산문으로 돌아가는 게 이 순간 이장수의 최대 바람이 되었다.
이해득실을 따져보니 나중에 비장의 패를 일부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이 위험한 환경에서 순조롭게 벗어날 수 있다면 그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비장의 패를 숨겨둔 목적이 훨씬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닌가.
훗날 어느 용이 어떤 장난을 칠지 누가 알겠어!
……
공연과도 같은 대결이 끝난 후, 요괴 소탕대회가 정식으로 개막하였다.
용궁은 또 몇 가지 성대한 행사를 준비하였다. 선보(仙寶)급의 법보 12가지를 꺼내 이어질 제자 겨루기의 최종 상품으로 삼았다.
겨루기는 도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문인 제자는 제한 없이 참여할 수 있고, 경기장도 여러 개 구역으로 나누어졌다.
경기가 시작될 때마다 선보 하나를 상품으로 걸고, 연속 9번을 이긴 후, 용궁에서 보낸 ‘최강자’까지 격파하면 선보를 가져갈 수 있다.
최강자는 차세대 어린 용들로 수련의 경지나 실력은 정상적인 수준의 귀도경 1, 2단 연기사와 맞먹었다.
보물을 쟁취하는 난도가 낮지 않은 데다 선문 제자들의 열정 또한 상당히 드높았으니 결국 선보를 얻기란 상당히 힘들었다.
연무대에서 시작을 알리자 각 파의 제자가 솜씨를 힘껏 발휘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불과 한 시진 만에 귀도경 초기의 대종문 제자가 9연승을 이루어 최강자를 직면할 기회를 얻었지만, 격전 끝에 용족 소년에게 격퇴당했다.
이때, 유금현아가 앉은뱅이책상을 탁, 치더니 하늘로 떠올랐고, 몸 주위에 선회하는 비검 열두 자루가 용족 소년의 앞에 떨어졌다.
“한판 하자.”
이날 용궁 대회에서 도선문 제자 유금현아는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탁월한 검술과 공화술(控火術)로 선보를 연속 4개를 차지하였다. 연기사 수십 명을 격파하고, 용족 귀도경 소년 네 명을 부상 입히면서 하루 아침에 동승신주에서 명성이 드높아졌다.
대전이 끝난 후, 앞으로 선도가 예사롭지 않을, 모두의 주목을 받은 연기사는 피로에 전 몸을 끌고, 온몸에 상흔을 단 채로 대검을 등에 메고 한 걸음 한 걸음 도선문 구역으로 걸어갔다.
동문의 부축을 거절하고, 바로 호흡을 가다듬으라는 사숙과 사백의 권고를 마다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나 계속 뒤로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숙여 허리를 굽혔다. 법력을 과도하게 소모한 탓에 가느다란 두 손은 살짝 떨렸다.
하나 그녀는 끝끝내 휘황찬란한 선보 4개를 이때 절대다수에게 잊힌, 도선문의 반허경 2단인 남제자 앞 앉은뱅이책상 위에 무사히 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제자에게 지친 기색이 역력한 미소를 지었다.
이 순간, 장내 모든 연기사는 유금현아의 경건함에 절로 고개를 숙였고, 각 선문의 진선들도 감동하였다.
이장수의 눈빛이 상당히 복잡해졌다. 말은 힘이 없으니 차라리 일어서서 손을 뻗어 부축하려고 했으나 유금현아는 그의 병증을 고려하여 곧바로 뒤로 확 물러났다.
그리하여 이장수는 유금현아의 등에 대고 깊게 읍하고, 마음속으로 주오 사백을 조용히 축복하였다…….
수백 번쯤.
…
웅장하고 화려한 해저 궁전 안.
백 척 길이의 침상 위에 누워있는 소년이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뜨고, 옆에 꿇어앉아 포도 껍질을 벗기던 시녀의 팔을 확 끌어당겼다.
“내가 졌느냐? 졌지?”
“저, 전하.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기셨습니다…….”
“무어라? 어째서! 내 분명…… 크헉!”
“태자 전하! 태자 전하! 여보세요! 전하께서 또 쓰러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