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이번에 만림균 장로 혼자서 많은 강적을 죽여서 도선문이 위기를 벗어나게 해주었으니 문에서도 어느 정도 마음의 표시를 하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그러나 공로가 이토록 큰 장로에게 ‘상을 하사’하는 건 적절치 않고, ‘사례’하는 것도 어딘가 맞지 않았다······.
도선문 장문은 이리저리 고민해본 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만림균 장로는 진귀한 독단을 적잖게 썼을 터. 문에서도 응당 손해를 보상해줘야겠지요.”
만림균 장로는 살짝 인상을 쓰며 눈앞에 장문이 건넨 수납 반지를 보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거절하려고 했다.
문파를 위해 이러한 행동을 하는 건 당연지사였고 딱히 상을 바란 적도 없었다.
하지만 만림균 장로는 곧바로 무엇을 떠올리는가 싶더니 입을 가로로 늘려 싸늘하게 웃었다.
장수에게 장려로 주면 되겠구나······.
“그럼, 받겠습니다.”
만림균 장로는 그리 대답하고 난 뒤 뒤돌아 지팡이를 짚으며 전각을 빠져나갔고, 이내 뒤에 남은 이들에게 노쇠하지만 소탈한 뒷모습을 남겨주었다.
사실 만림균 장로와 같은 세대 제자인 도선문 장문은 순간 미간을 찌푸리고 뒤에 앉아있는 태상장로들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내 방금 말실수를 해서 만 장로를 기분 나쁘게 한 부분이 있었습니까?”
태상장로들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사실 그들도 만 장로와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
도선문에서 남서쪽으로 아득히 멀리 떨어진 곳.
진법으로 가려 막은 어느 산골짜기에 검은 인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대진 밖에도 몇 사람이 방향마다 몸을 숨긴 채 적의 기습을 경계했고, 땅 밑에도 서너 명이 숨어 있었다······.
산골짜기 가장 깊숙한 곳, 세 도인이 허공에 삼각형 형태로 나누어 앉아있고, 아래에는 잎이 일곱 개인 핏빛 연꽃이 가볍게 선회하였다.
저승 피바다에서 온 혈련 세 송이는 이미 그들에게 절반 이상 흡수되었다.
모깃소리가 마음속에서 울리자 세 사람은 수행을 중단하고 귀를 기울였다.
금세 그들은 눈을 뜨고 고개를 드리운 채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존명.”
모깃소리가 마음속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원택 도사는 슬며시 숨을 들이마시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에 선봉 부대가 좌절되었소. 하나 이는 우리가 아직 자신의 도가 원만하지 않아 즉시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오. 주인님이 하사하신 신통력을 얻고 나면 이제 문제없소!”
“도우! 입 좀 다무시오!”
좌측에 있던 중년 얼굴의 도사가 황급히 말을 끊었다.
“말은 행동보다 못하오. 우리가 일찍이 성공해서 대인의 계획을 완성합니다!”
“좋소!”
원택 도사는 멋쩍게 웃고는 천천히 두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우리는 곧 금선 도과로 응결될 터인데 변변찮은 도선문은 전혀 힘들이지 않고 안온히 잡을 수 있겠지요?”
원택 도사는 그리 말하고는 입가에 자신만만하면서 평온한 미소가 걸렸다······.
똑같이 피모기에 원신과 도심이 잠식된 금오도 연기사 둘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쓴 채 서로 마주 봤다.
‘또 말을 꺼내는군요.’
‘아니면, 대인께 간언을 드려서······ 바꿔버립시다.’
두 사람은 저마다 고개를 흔들며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하나 금세 무뚝뚝한 얼굴로 되돌아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 순간 그들의 정신은 전부 그 소리에 점령당해버렸다······.
‘연꽃을 흡수하여 도과를 응결하고 도선문을 몰락시켜라.’
그들이 자주적으로 생각할 기회란 사실 그다지 많지 않았다.
혈련 세 송이가 다시 천천히 선회하면서 혈광이 피어나왔고, 이내 세 사람의 도포 아래로 파고들어 각자 허무(虛無) 도과를 채웠다······.
······
‘현아야, 근래 산문에 악한이 교란하고 습격하여 문이 안온하지 않구나. 너도 당분간 폐관 수련하지 말고 문에 재난이 닥치거든 즉시 백범전으로 달려가거라.’
유금현아는 흰 구름 위에 서서 밀려오는 청량한 바람을 맞으며 사부님의 당부를 되새겼다.
재난이라······.
문파가 습격을 당하면, 당대 수석 제자로서 무엇을 해야 할까?
강적이 산문을 침략하면, 아직 선인이 되지 않은 제자들은 막아낼 수가 없다.
만에 하나 정말로 재난이 발생해서 호산 대진이 위태로워진다면, 각 봉 제자들은 자신을 잘 지키고, 문파 선인들께 폐를 끼치지 않아야 문에서 외부 적을 막는 데 쏟을 힘이 더 많이 생길 것이다.
다만 내가 아직 선인이 되지 못해서 사부님과 사조님의 걱정을 나누고 재난을 해소할 길이 없는 게 한이구나.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 해.
유금현아는 얇은 입술을 앙다물고 결연한 눈을 한 채 백범전으로 날아갔다.
이윽고 백범전의 윤허를 받은 그녀는 장로의 영패로 각 봉에 있는 동 세대 제자들에게 문에 지맥 탈출로가 있다는 일을 알리러 갈 참이었다.
백범전을 빠져나온 유금현아는 잠깐 고민에 잠겼다가 이내······.
소경봉으로 향했다.
‘소경봉은 제원 사숙과 장수 사형, 령아 사매 세 사람밖에 없어서 적을 만나면 자연히 제일 위험한 곳일 거야. 일단 그들에게 알리는 게 정리에 맞겠지.’
유금현아는 속으로 이유를 만들어낸 다음, 약간의 불안한 마음을 안고 소경봉으로 날아갔다.
멀리서부터 그녀는 호수 위에서 훌쩍 오고 가는 령아를 보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구름을 밟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소경봉 외곽의 차단 대진에 들어오자마자······.
개굴개굴.
개굴개굴.
여기저기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이어졌고 호숫가에는 옥빛이 반짝였다.
수선의 영지에서 한적한 농촌의 소리가 들려왔다.
호숫가로 내려온 유금현아는 펄쩍펄쩍 뛰는 옥개구리들을 구경하며 퍽 즐거워했다.
지난번 장수 사형에게 귀여운 분홍 돼지를 선물로 받으면서 그녀는 영수라는 신세계의 대문에 들어섰었다. 물론 폐관이 너무 잦은 탓에 돼지 영수가 죽어버렸지만. 그 일로 그녀는 오랜 시간 상심에 젖었다가 이내 파천봉 아래에 묻어주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유금현아는 귀엽게 생긴 영수에 퍽 애정이 갔다.
호숫가에 서서 허리를 굽히자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그녀의 용모와 자태가 거꾸로 비쳤다.
유금현아는 자그마한 수령식 옥개구리 두 마리를 응시하면서 늘 차갑기만 했던 얼굴에 미소를 어김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을 느껴서일까. ‘변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개구리들은 동시에 호숫가 여울물에 뛰어들었고, 발을 한번 디디더니 물결무늬와 함께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유금현아는 귓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눈빛만큼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이때, 호숫가에 물결이 일더니 구슬 세 개가 천천히 돌아가면서 부드러운 빛을 냈다.
곧바로 아리따운 인영이 호수에서 천천히 떠오르면서 두 손에 물공 두 개를 받치고 있었다. 왼쪽 물공에는 영어 한 마리가, 오른쪽 물공에는 옥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다······.
부드러운 빛을 받아내며 령아가 빙그레 웃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어여쁜 사저~ 맛있는 예유를 맛보실래요, 아니면 옥개구리를 맛보실래요. 그것도 아니면 귀엽고 슬기로운 사매가 타주는 차랑 다과를 맛보시렵니까.”
유금현아는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삽시간에 매화가 만개하는 듯한 미소. 마치 눈 속에 핀 연꽃 같았다.
령아는 호수에서 뛰어나와 웃으며 말했다.
“사저,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사형은 단정봉에 갔습니다.”
“그래.”
유금현아는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령아와 함께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뎠다. 그러다 별안간 무언가 떠올랐는지 약간 당황한 얼굴을 했다······.
맛 좋은?
“이거랑, 이거. 다 먹을 수 있다는 말이냐?”
령아는 눈을 끔뻑거렸다.
“물론이죠. 예유는 정말 맛있습니다. 구워도 되고 튀겨도 되고 쪄서 먹기도 하고 국으로 끓여도 되는걸요. 사형의 비밀 조미료도 있답니다! 이걸로 옥개구리 머리 찜이나 양념 옥개구리를 만들어 먹으면 돼요······. 이게 다 사형이 전수해준 거랍니다!”
유금현아는 인상을 썼다.
“우리는 이미 벽곡을 하고 있다. 한데 어째서 이것들을 먹어야 하니?”
“주구 사숙이라면 이해하실 겁니다. 술은 수행에 쓸모가 없지만, 사숙은 술을 목숨처럼 여기지요. 식욕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일리가 있긴 하구나······.”
“말만으로는 증거가 안 되겠죠?”
령아는 소매를 말아 올리고 조미료가 든 자루를 꺼내 호숫가 부뚜막으로 향했다.
“사저, 조금만 기다리세요. 오늘 솜씨 발휘를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유금현아는 눈을 끔뻑이며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령아는 벌써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뚜막으로 뛰어가 버린 후였다.
령아가 손끝으로 불꽃을 날리자 부뚜막 아래에 순식간에 약한 불이 피어올랐다. 손가락을 튕기자 영어 한 마리도 호숫가에서 튀어나와 마치 제 발로 도마로 뛰어오른 꼴이 되었다.
령아는 날카로운 법기 ‘비린내 제거’ 비수를 꺼내 대충 영어를 때려서 기절시킨 후, 익숙한 손놀림으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하러 다가온 유금현아는 어느새 소경봉에 찾아온 목적을 잊어버렸다.
반 시진 후.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구나.”
“맛 좀 보세요. 제 솜씨는 사형에게 뒤지지 않는답니다.”
“으음······. 맛있구나!”
유금현아는 옥으로 된 젓가락을 쥔 채 두 눈을 반짝였다.
령아는 옆에서 네모난 앉은뱅이책상을 꺼내고, 취기가 없는 맑은 술을 가져와 호숫가에서 유금현아와 간단히 한잔하며 고기를 맛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흰 구름 하나가 단정봉에서 날아왔다.
령아는 흰 구름의 고도를 흘끔 하더니 바로 입을 열었다.
“사형이 돌아왔습니다. 사저, 사형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유금현아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서서 이장수를 맞이했고, 이장수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구름을 몰아 다가갔다.
“사형! 유금 사저가 한참 기다렸어요!”
“장수 사형.”
령아는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불렀고, 유금현아는 이장수를 향해 고개를 드리우고 공수로 예를 갖췄다.
이장수는 읍으로 화답하며 말했다.
“유금 사저, 그리 예 차릴 것 없어. 그나저나 나는 무슨 일로 찾아왔어?”
유금현아는 이장수를 응시하며 지맥 이동진에 관해 이야기했다.
“외적이 산을 공격해서 호산 대진이 위기에 처하면, 사형과 사매는 곧장 백범전으로 가세요. 그곳에 탈출로가 있습니다. 저희는 아직 선인이 되질 않은 터라 이곳에 남았다간 공연히 문파 선배들께 폐만 끼칠 뿐입니다.”
이장수는 미간을 찡그린 채 되물었다.
“유금 사매, 이 일을 이미 각 봉 제자에게 알렸어?”
“아직이요······.”
유금현아는 약간 민망해하며 덧붙였다.
“······소경봉에 제일 먼저 왔습니다. 사형, 혹시 저와 함께 각 봉에 있는 동 세대 제자들을 찾아 이 일을 말해주시겠습니까?”
령아는 옆에서 눈을 깜빡거릴 뿐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이장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그녀에게 당부했다.
“말을 바꿔서 전달하는 게 좋겠어. 지맥 이동진은 절대 언급해선 안 돼. 생각해봐. 당대 제자는 입문한 지 수십 년이 된 이도 있고 백몇 년이 된 이도 있고 저마다 달라. 행여나 제자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 말을 전하는 첩자가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대놓고 이를 말한다면, 진짜로 외적이 산을 공격해올 때, 문인 제자의 퇴로를 끊어버리지 않겠어?”
유금현아는 당황하더니 이내 미간을 구겼다.
“사형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믿지 않는 사람을 어찌 믿게 만듭니까?”
“믿는다는 건 그 사람을 아느냐가 우선이야.”
이장수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매는 모르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겠어? 사람의 마음은 복잡해서 낯은 익히기 쉬워도 마음은 알기 어려워. 더군다나 유금 사매는 어째서 우리 문파에 비겁하게 죽음을 두려워하고, 적에게 빌붙어 살고자 하는 이가 없다고 확신하지?”
“그건······.”
유금현아는 당황하여 입만 벙끗거렸다.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속으로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장수는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당연히 문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왔어. 하나 우리가 그렇다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리하라고 요구할 순 없어. 도법천지(道法天地)는 마음에서 일어나고, 법술의 전개 또한 마음에서 생긴다. 이 세상에 제아무리 스승과 제자, 부모와 자식이라고 해도 완전히 같은 도가 있겠는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유금현아는 이장수에게 깊이 읍했다. 아리따운 눈에 존경의 빛이 감돌았다.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두루 생각지 못했군요. 사형, 이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알려주십시오.”
“사매, 이리 조심히 행동할 것 없어.”
이장수는 읍으로 화답하면서 속으로 남몰래 결론을 내렸다.
유독 같은 성정을 대할 땐 이치를 설명하는 게 의외로 효과가 있군······.
“기왕 각 봉의 문인 제자에게 통지할 생각이거든 대사를 바꿔보는 것도 좋아. 이를테면, 문파에 중요한 상황이 생겼으니 아직 선인이 되지 않은 동문은 즉시 파천봉으로 피신하라고 말하는 거지. 그러고 나서 이들을 다시 백범전으로 인도하면 모든 이가 무리를 이루어 백범전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군요.”
유금현아는 눈을 반짝이며 사뿐하게 말했다.
“사형께서 일러주지 않으셨다면······.”
“사매는 마음이 급해서 그랬지. 조금만 생각해도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인걸.”
이장수는 티가 나지 않게 그녀의 말을 끊고는 이제 가서 실행에 옮기라는 양 손짓했다.
“이 일은 늦을수록 좋지 않으니 더는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하지 말게.”
“예.”
유금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장수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춘 후, 구름을 몰아 파천봉으로 총망히 갔다.
백범전 장로를 찾아가 이 일을 상의하고 각 장로에게 소식을 누설하지 말도록 일깨워야겠다.
장수 사형이 이리 말씀하신 걸 보면······.
산에······.
정말로 외적의 첩자가 있을 수도 있어!
호숫가. 령아는 이장수를 보며 눈을 깜빡였고, 이장수는 그런 그녀에게 웃어주고는 구름을 몰아 단방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단방 지하 밀실 내 서재.
이장수는 만림균 장로가 준, 장문의 도장이 찍힌 수납 반지를 손에 쥐고 완상하면서 책상에 펼쳐둔 지형도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가 일전에 그려놓은 것이었다.
수납 반지에는 엄청난 양의 독초가 종류별로 있었다. 아무래도 문에서 만림균 장로에게 상으로 내린 것에 만림균 장로가 독단과 미단(迷丹)을 한껏 쑤셔 넣은 모양이다······.
선물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는다고 했던가. 이장수는 ‘공공재’ 독단을 사문을 수위하는 이들에게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이장수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책상을 두드리며 조목조목 따져가며 분석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 자식이라면 어느 방향에서 기습을 발동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