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형이 실력을 숨김 (104)화 (104/593)

때때로 남자들의 우정은 이렇게나 단순했다.

오을은 제 기량을 거의 발휘하지 않고 몇 번 손발을 놀려서 사촌 형이자 남해 용궁 둘째 태자 오모를 해수면 위로 잡아채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러고 나서 오모를 옆으로 던지며 함지에게 사과하라고 말했다.

이렇게 하면 절교는 체면을 유지할 수 있고, 함지도 오모를 계속 탓하지 않을 것이고 추후 용궁과 금오도 사이에도 갈등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오을의 행동에 함지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입꼬리만 살짝 들어 올렸다.

오히려······.

얻어맞은 오모의 눈빛이 끊임없이 반짝였고, 눈 속에 조그마한 별들이 들어찼다.

오모의 두 수행원이 오을을 바라보는 눈빛에도 존경심이 더해졌다.

용족은 대외적으로 ‘태고 시절 패자(霸者)’라는 우월감이 있었다. 그리고 부족 내에서 젊은 용들은 주먹이 센 놈이 대장인 원칙을 한결같이 받들어왔다.

오모는 해수면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선력이 받치고 있는 터라 가라앉지는 않았다.

그는 다소 주저하는 기색으로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는 함지와 오을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너무 빨리 졌다. 다시 겨뤄서 또 지면 그땐 진심으로 승복하고 네 말대로 하마!”

오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탈하게 소매를 한번 탁 털고 다시 한번 겨뤄보자고 손짓했다.

오모는 다시 앞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눈에 진지함이 역력했다.

남해 용궁 둘째 태자가 낮게 소리치자 온갖 비장의 기술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용울음이 한차례 울리고 구름까지 닿을 법한 파도가 몰아쳤다.

삽시간에 오을은 다시 오모의 목덜미를 쥐었다.

소년 모습의 오을은 온몸에 상흔이 하나도 없었고, 이마 앞에 머리카락 몇 가닥만 젖었을 뿐이었다.

오을이 손을 뿌리치면서 오모는 다시 해수면 위에 주저앉았고 이번에는 제법 부드럽게 쓰러졌다.

순간, 고개를 들고 오을을 쳐다보는 오모의 눈에 별빛이 더더욱 반짝였다······.

“내겐 신통력이 더 있다!”

오모는 민망해했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또다시 진다면 이번 일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네 말을 듣겠다!”

오을은 미간을 찡그리고 눈앞에 있는 사촌 형을 바라보았다.

승패라는 두 글자에 이토록 연연한다고?

남해 용궁의 체면을 고려해서 고개를 끄덕인 오을은 이번에는 오모와 몇 수를 겨뤄야 적당할지 고민했다.

그렇게 반 시진 후.

일곱 번을 겨루는 동안 오모는 능력을 다 발휘해서 일곱 번 모두 패했다······.

“오을 형님! 아우의 절을 받으세요!”

기고만장했던 용들은 동시에 오을에게 읍했고, 오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 필요 없이 세 사람은 뒤돌아 함지에게 허리를 숙였고 함지는 연신 괜찮다고 화답했다.

오모는 2년 일찍 세상에 나왔음에도 지금 ‘형님’이라고 부를 때는 친형을 부를 때보다 훨씬 술술 나왔다.

남해 용궁 둘째 태자는 얻어맞고 나서 정말로 승복했다.

오모는 함지와 오을에게 남해 여행을 대접하기로 했다. 그리고 수행원들을 용궁으로 보내 배 한 척과 선물을 가득 싣고 와서 둘째 형님에게 사죄했다.

[이길 수 없다면, 철저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편이 낫다.]

오을이 함지에게 다른 장소에 가서 기분 전환하겠냐고 물었고, 함지는 남해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새롭게 합류한 ‘가이드 용’과 함께 남해를 계속 여행했다.

“형님, 신통력이 정말 대단하던데 절교에서 배운 겁니까?”

오모의 물음에 오을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진지하게 말했다.

“성인의 도승은 사상과 학식이 넓고 심오합니다. 절교 문하에 들어올 생각이 있습니까?”

“그건 됐습니다. 저는 정갈하게 몸을 닦는 괴로움은 견디지 못하거든요. 용궁에서 자유롭게 지내렵니다.”

오을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형님······.”

“아우라고 부르세요. 이제 제가 아우입니다.”

“어쨌건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을은 의미심장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겨루기할 때, 형님에게서 허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용족은 기초가 탄탄하다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막 쓰면 안 됩니다. 온종일 해족 시녀들과 어울리지 마세요. 자신을 단속하지 못하겠거든 일찍이 동족을 찾아 혼인하여 서로 단속하시고요.”

오모는 헤헤 웃으며 마음에 둔 서해 용족 여인이 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함지는 처음엔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가 한순간 두 뺨이 발그레해졌고, 오을의 청수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정작 오을은 아무 느낌이 없었다. 용족은 평소 상태가 이랬고 큰형 ‘오갑’도 온종일 술에 취한 듯이 보냈으니 말이다.

오을처럼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결을 지키는 용이란······.

실로 드물었다.

······

한편, 파천봉 서쪽 주 선인들의 거처.

이장수는 주구 사숙의 누각 앞에 서서 진법 배치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별안간 미묘한 느낌을 받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나와 관련 있는 일이 발생할 것 같은 느낌인데?’

남해 끝자락의 형세를 느껴보니 일단 속세 인간들의 전투가 폭발할 조짐은 없었다.

“장수야······.”

옆에 있던 주구는 이장수가 인상을 쓰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정말로 답이 없는 것이냐?”

이장수는 곧바로 멋쩍게 웃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숙, 애매한 게 있어서 질문을 좀 하겠습니다.”

“그래. 물어봐라!”

이장수는 고개를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찌하셨기에 방호진을 억지로 부딪쳐서 나왔다면서 아래층 진기들이 6할이나 망가졌습니까.”

“에헤헤. 그리 추켜세울 것 없다. 난 언제나 유능했거든!”

주구는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이장수의 어깨를 토닥였다.

“부탁하마. 허울이라도 대충 진법을 만들면 된다! 내가 술에 취하고 잠들면 추태를 잘 보인다. 입고 있는 옷을 마구 던지거든······. 그런 게 아니면 진법도 필요 없지!”

이장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사숙, 그런 건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응?”

주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왔다.

“설마 본 것이냐?”

“그럴 리가요.”

이장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사숙.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지하에 있는 진기들을 꺼내오십시오. 진기를 정제할 보재도 필요합니다. 제가 배운 바에 따라 몇 가지 진법 조합을 만들 수 있으니 사숙이 고르십시오.”

주구는 순간 눈을 끔뻑이더니 반지를 꺼내 호탕하게 손을 흔들었다.

“마음대로 만들어라! 천 년 넘게 사는 동안 모아둔 게 많다.”

이장수는 빙그레 웃으며 반지를 건네받고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폐관하고 일상생활을 하는 곳의 진법은 몹시 중요했다. 하나 이장수는 정말로 자신이 쓸 수 있는 고급 진법을 다 드러낼 순 없으니 주오 사백이 해준 진법 수준으로 배치하고 주구 사숙을 꼼꼼하게 보호할 수 있는 진법을 써야 한다.

작은 도전이긴 했다.

이장수는 둥근 탁자 앞에 앉아서 옆에 있던 석판 몇 개를 찾아와 조각칼로 쓰고 그리기 시작했다.

재미가 상당했다.

주구는 곧바로 땅 밑으로 파고 들어가 한참 주물럭거렸던 진기를 끄집어냈다.

작은 진법인 터라 이장수는 아주 빠르게 설계했고, 주구가 진기들을 안고 돌아왔을 때 이미 몇 가지 진법도 방안을 갖추어두었다.

“음. 아주 빠르구나.”

“이전에 비슷한 구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이장수는 석판들을 들이밀었다.

“보십시오. 어느 것으로 배치하겠습니까? 이따가 방향을 찾아내면 사숙께서 진기를 묻으면 됩니다.”

주구는 석판을 건네받아 보자마자 눈앞이 팽팽 돌았다.

“네가 결정해. 난 봐도 모른다.”

“사숙.”

이장수는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어린애 장난이 아니고요.”

주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설명해다오. 어차피 다 같은 진법이 아니냐?”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론 천차만별입니다. 첫 번째 진법을 보십시오. 정찰 방지에 중점을 두고 있어서 이걸 놓으면 사숙의 사존께서도 꿰뚫어 보지 못할 겁니다.”

주구는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그래? 그럼 그걸로 치자!”

이장수는 목청을 가다듬고 계속 말했다.

“급하게 선택하지 말고 다 들어본 후에 결정하세요. 이 진법을 배치하면 정찰 방지 수준은 중급이지만, 주로 방호에 치중합니다. 강적을 맞닥뜨렸을 때, 생존율을 높이고 훨씬 더 오래 버틸 수 있으니 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지도 모르죠. 저는 비교적 이런 진법을 선호합니다.”

주구는 또 다른 석판 두 개를 가리켰다.

“이거랑 이거는?”

“세 번째 진법은 취영진으로 영기를 모으는 데 치중됐습니다. 사숙이 수행할 때 영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데다 정찰 방지와 방어를 두루 갖춘 수준이지요······.”

주구는 한 차례 설명을 듣고 나니 더 어지러워졌다.

“몇 가지를 골라 다 고급 수준으로 할 순 없느냐?”

“그게······.”

이장수는 손에 있는 반지를 보며 싱긋 웃었다.

“사실 사숙께서 주신 재료로 만들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가진 모든 보재를 소경봉 진세에 투입했었지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줄 알았더니, 고작 그런 문제였냐?”

주구는 코웃음을 치더니 팔찌와 자루를 각각 하나씩 꺼내 이장수 앞에 내밀었다.

“전부 고급으로 만들어라!”

이장수는 약간 주저하더니 확인하듯 물었다.

“진심입니까?”

“그래!”

주구는 허리에 손을 턱 짚은 채 외쳤다.

“만들면 되지!”

누각 진법에 천 년 동안 모은 재산을 전부 써버릴 수 있다니!

하나 주구의 심경에 금세 미묘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장수는 그녀가 다년간 쌓은 보재를 전부 꺼내서 종류별로 배치했다. 마치 연단 하기 전에 약재를 정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건, 각종 보재는 이장수의 고민을 거쳐 전부 쓸 자리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장수는 사숙에게 계략을 꾸미지 않고, 주구의 안전에 꽤 신경 썼다.

어쨌거나 자신의 ‘베스트 연단 파트너’이자 ‘눈속임 대가’가 아닌가.

게다가 이장수는 일상생활과 폐관하는 장소의 수호 진법을 퍽 중요하게 여겼다.

사숙을 위해 훨씬 높은 수준의 대진을 배치하고자 이장수는 쓸 수 있는 진기를 새로 정제하고, 폐기한 진기도 해체해서 쓸 수 있는 건 전부 써 버렸다. 심지어 자신의 재료도 몇 가지 꺼냈다······.

주구는 옆에서 무어라 말하려다가 멈추었다. 이장수가 스스로 물건을 꺼내 그녀의 진법을 수선하는 걸 보며 순간 말을 꺼내기가 민망했다.

이틀 후.

구름을 몰아 소경봉으로 돌아가는 이장수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완벽에 가까운 ‘연동진(聯動陣)’을 구축하는 건 이장수에게 있어서 예술품을 제작해내는 것과 같았다.

앞으로 사숙의 안전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누각 앞, 주구는 이장수가 떠난 뒷모습을 응시하며 고개를 돌려 완전히 새로워진, 한눈에 봐도 깨뜨리기 힘든 대진을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제 손에 있는 진법 통제 옥패를 보았다.

이제부터 그녀의 선력을 주입한 이 옥패로만 이곳의 진법을 열 수 있다.

안전하고, 은밀하고, 마음에 들고, 편안하며 밤에도 빛의 공해가 없고 낮에도 어떤 영력의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주구는 손바닥 위에 수납 법보들을 올리고, 텅텅 비어있는 수납공간을 확인하며 두 다리에 힘이 풀려 문 앞 계단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천 년 넘게 모아온 것들이······.

정말로, 다 써버렸다. 하나도 낭비하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도 기쁘지 않고 공허하기만 할까.

앞으로 술이 떨어졌을 때 술로 바꾸고 싶어도······.

별안간, 주구는 이장수가 떠나기 전 귓가에 대고 위로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숙, 보재와 영석은 사라진 게 아닙니다. 새로운 형태로 바뀌어 사숙의 곁에 있는 것이지요.”

“아이고······.”

주구는 천천히 드러누웠다. 두 눈에 생기가 서서히 꺼져갔다.

“빈털터리구나. 술에 취하는 것 말고는 하는 일도 없으니 천 년이 더 지나도 알거지겠지.”

앞으로 소‘궁’봉에 입적하면 딱이겠구나······.

0